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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37화 (137/963)

137화. 오합지졸 (1)

새해가 지났다.

결국 모두가 예상한 것처럼 무림맹은 창설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충분한 논의가 된 이후의 결정이라지만, 아는 사람들은 그것이 과반수에 의한 결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무림맹 창설이 결정되자, 무림맹 산하 조직도(組織圖) 역시 무서운 속도로 만들어졌다.

이미 과거 선조들의 선례도 있었고, 발표가 나기 전 각파의 수장들이 짜 놓은 구상도를 검토하고 조정하는 과정이 워낙에 빨랐다.

그렇게 백도무림맹은 결성되었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의 수장들은 무림맹 봉공(奉公)의 직함을 올렸으며, 맹주 자리는 아직 공석이었다.

소문은 순식간에 중원 전역을 강타했다.

무림맹의 부활. 그것은 평화에 길들여진 중원 무림을 뒤흔드는 거대한 변화의 시작이었다.

터어어엉!

“큭!”

“물러서지 마라!”

파아악!

단숨에 거리를 좁힌 연호정이 일권을 내질렀다.

옥청이 눈을 부릅떴다.

‘또!’

평범한 일권이었다.

어떠한 변식도 없이 곧게 들어오는 일권. 속도도 그리 빠르지 않으며, 위력 역시 막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껏 번번이 저 일권에 당했다. 정확히는, 저 일권 뒤에 숨은 상상을 초월하는 공격에 당해 버렸다.

‘더는 안 돼!’

이번에도 당할 수는 없다. 의지로 불타오르는 옥청의 두 눈에 혼원기(混元氣)가 번뜩였다.

후우우웅.

연호정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손에 든 철검을 버리고 쌍수(雙手)로 주먹을 감싸 쥔다. 혼원기가 가득 실린 옥청의 양손이 기묘한 회전을 발했다.

‘흠.’

부우우웅!

연호정의 몸이 그 진기의 회전에 따라 휘돌았다.

옥청의 눈에 환희가 어렸다. 드디어 이 공성추처럼 공격해 오는 호장의 자세를 흐트러트린 것이다.

그때였다.

자세가 무너진 연호정이 그대로 옥청의 어깨에 각법을 날렸다.

빠각!

“크윽!”

옥청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쌍수에 담긴 태극산수(太極散手)의 공력이 갈 길을 잃고 흩어져 버렸다.

‘안 돼!’

파아악!

무릎을 꿇자마자 뒤로 물러났다. 연호정은 실전 무예의 대가였다. 언제, 어떤 자세에서라도 상대를 무너트릴 만한 수법을 펼친다. 일단은 물러나서 대응수를 찾아야만 했다.

화아아악!

그러나, 그간의 무지막지한 대련으로 싸움에 익숙해진 옥청도 연호정의 한계를 파악하진 못했다.

후우우웅!

‘억?!’

옥청의 눈에 경악이 깃들었다.

연호정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손을 뻗어 자신의 몸에 새하얀 호왕의 진기를 쏟아부었는데,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전신이 결박된 것만 같았다.

잠시지만 움직일 수가 없다. 혼원기가 전신을 옭아맨 백호기를 풀어냈지만, 그 시간은 연호정의 공격이 열 번은 성공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부우웅! 퍼억!

“꽥!”

옥청이 벌러덩 넘어졌다.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팔십칠 전, 팔십칠 승, 그리고 무패.”

“콜록콜록!”

“괜찮냐?”

“괘, 괜찮습니다. 우웨엑!”

기어이 피를 쏟는 옥청이었다. 마지막 일격에 힘을 뺐지만, 그래도 연호정의 일장(一掌)은 범상치 않은 괴력을 품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옥청.

“나쁘지 않았어.”

“예?”

“이번 싸움, 나쁘지 않았다고. 이제야 뭘 좀 아네.”

옥청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지금까지의 싸움에서 연호정은 빈말로도 옥청을 칭찬하지 않았다.

오히려 욕을 했고, 자존심이 갈기갈기 찢어질 만큼 조롱을 했다. 지금까지 익혀 온 검의(劍意)의 수련을 완전히 부정당할 만큼 철저한 비난이었다.

그런 연호정이 처음으로 칭찬을 했다.

‘……어.’

뭐랄까.

기분이 짜릿하다고 해야 하나. 사부님께 칭찬을 받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지 싶었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하긴 뭘 감사해. 여기까지 따라온 네 독기가 대단한 거지.”

실제로 연호정은 옥청의 독기 하나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성질머리로는 자신의 무지막지한 독설을 참기 힘들 테니까.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 자신감을 잃기도 했을 것이다. 칠십 전 때였던가? 오히려 기량이 낮아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옥청은 그 독하디독한 일과를 기어이 참아 내며 지금에 도달했다.

“홀로 무공을 연마하든 상대와 싸움을 주고받든, 수련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야. 효율적인 노력이지.”

“효율…….”

“너 방금 검을 놓았지?”

“예? 아, 예!”

“왜 검을 놨어? 쓰러지는 그 순간까지 꼭꼭 쥐고 있더니만.”

옥청은 당황한 눈으로 떨어진 검을 바라보았다.

‘내가 검을 놨네?’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검을 놓고 태극산수로 연호정의 공격을 비틀어 버렸다는 걸.

‘이럴 수가.’

검사에게 검은 절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위기의 순간이라고 검을 놓는 것은 검사가 아니다.

털썩!

옥청이 허망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칭찬해 주려던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냐?”

“내, 내가 검을 놓다니.”

“엉?”

“검사가 검을 놓쳤습니다. 이런 수치가……!”

퍽!

“컥!”

옥청이 바닥을 굴렀다. 허연 도복에 흙 묻은 눈이 잔뜩 달라붙었다.

“이 새끼야, 이제야 검을 놓은 스스로를 칭찬해야지 뭘 충격을 받고 있어?”

“……예?”

옥청이 순진한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왠지 구슬픈 소 눈알 같다는 생각과 함께,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네 무공은 하나같이 그런 식이야. 전부 틀에 박혀 있지.”

“틀이요?”

“검을 왜 놔서는 안 돼? 이게 실전이었으면 넌 죽었어. 검사라고, 끝까지 검만 쥐고 있다가 죽을 거야?”

“……!”

“거봐. 검사는 이래야 한다, 이 심법은 이런 운용을 따라야 한다, 저 보법은 부드러워야 하니까 부드럽게 운용한다. 다 이런 식이잖아?”

“그, 그건……!”

“오히려 그렇게 틀에 박힌 채 익힌 네가 더 신기하다. 어떻게 그러고도 절정의 영역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거냐? 고민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순수하게 재능발로 올라간 거잖아.”

“…….”

“어떤 의미로는 참 괴물 같은 재능이다. 범재(凡才)가 너처럼 꽉 막힌 채 수련을 지속했다가는, 일류는커녕 평생 삼류를 전전하며 살 게 될 거다.”

옥청의 눈이 퉁방울처럼 불거졌다.

연호정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간 넌 나와 싸우면서 스스로의 무공만을 돌아봤을 거다. 맞지?”

“……예에.”

“왜 내 수법들을 따라 하려고 하지 않았어?”

“예?!”

“난 대단한 무공으로 널 공략한 게 아니야. 뒷골목의 시정잡배라도 쓸 수 있는 간단한 동작에 힘과 속도만 실었을 뿐이지.”

“아…….”

“상대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대응하면, 평범한 무공도 절정의 무공으로 탈바꿈하기 마련이야. 너는 실전 감각이 극도로 떨어져. 왜? 벗어나려고 하지 않거든.”

옥청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연호정이 고소를 지었다.

“사실 말로도 충분히 깨우쳐 줄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넌 심해도 너무 심했어. 내 말 몇 마디에 사로잡혀 며칠을 끙끙대며 고민했을 거 아니냐?”

“…….”

“그럴 시간에 처맞아 가면서 고통과 공격법을 몸에 익히는 게 낫지.”

재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올 수 없는 영역.

그것이 바로 실전이요, 경험이다. 첫 실전에서의 생존 확률을 살펴보면 확실히 재능 있는 자가 범재보다 높지만,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다.

결국은 집중이다. 의지였다. 무엇 하나에 몰입할 줄 아는 사람은 빠르든 늦든, 언제라도 틀을 부술 수 있다.

옥청은 그게 부족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옥청은 연호정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했는지를 확실하게 ‘체감’할 수 있었다.

“문 앞까지 데려다줬으니, 그 문을 열고 나가는 건 네 몫이다. 그간 고생했어.”

“헉! 이, 이제 가르침은 끝난 겁니까?”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뭘 더하게? 할 만큼 했잖아.”

“하, 하지만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대협의 치사한 공략법을 더 봐두고 싶어요!”

이 새끼가 순진한 얼굴로 비수를 날리네.

“시끄러워. 이 이상 비무를 거듭해 봤자 의미 없어.”

옥청이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떨어트렸다.

전대 노고수의 제자라면 배분으로는 연호정보다 위였다. 그런 인간이 저리 풀 죽어 있으니, 그것도 나름 진귀한 광경이었다.

‘그나저나, 검선 그 양반은 뭐 하고 있었던 거지?’

옥청과 싸우며 몇 번이고 들었던 의문이었다.

‘제자가 저런 벽창호가 될 때까지 이런 걸 가르쳐 주지 않았단 말이야? 사부 맞나?’

안쓰러운 눈으로 옥청을 보던 연호정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나랑은 상관없는 문제니까.”

“예?”

“아냐. 이제 슬슬 네 거처로 가라. 내일부터는 올 필요 없어.”

“……예에.”

힘없이 일어난 옥청이 포권을 취했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큰 은혜를 입었어요.”

“아니다. 나도 네 덕에 크게 배웠다. 오히려 고마운 건 나야.”

옥청이 미소를 지었다.

‘좋은 사람이다.’

싸울 때는 온갖 창의적인 욕설을 구사하며 속을 박박 긁어 댔지만, 싸움이 끝나면 직접 몸을 풀어 주기도 하고 어깨를 두들겨 주기도 했다.

‘큰사람이야. 나도 이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저 정도 무공을 익힌 사람이 자신에게 배울 점이라곤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많이 배웠다고 말해 준다.

마음 씀씀이가 고운 사람이었다.

그때, 연호정이 버럭 소리쳤다.

“인사 끝났으면 얼른 가라고, 인마!”

“헉! 예! 나중에 뵙겠습니다!”

옥청이 후다닥 파군각을 나섰다.

혀를 차며 옥청의 뒷모습을 보던 연호정의 얼굴에 음침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흐음. 흐으음. 으흐흠.”

쿠웅!

힘차게 진각을 밟은 연호정이 자세를 낮추었다.

‘아마 이런 느낌이었지?’

후웅.

연호정의 두 주먹이 부드럽게 허공을 갈랐다.

놀랍게도 그것은 무당의 태극권(太極拳)이었다. 시중에 나도는 체조 형태의 태극권이 아닌, 무당의 제자만 배울 수 있다는 진짜 태극권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파파팡!

순식간에 일곱 점을 찌르는 권법에서 호쾌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부드러웠다. 섬전처럼 빠른 권법이지만 그 속에는 유장하게 흐르는 진기의 물결이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좋아. 완벽하게 따 냈다.’

옥청은 배우고 익힌 형(形)을 제 것으로 만들지 않았다. 즉, 배운 무공 모두를 원형에 가깝게 구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무당 무공의 원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연호정은 옥청을 가르치며, 그의 수법 대부분을 따올 수 있었다. 물론 외가무공의 형(形)에 불과하지만.

“크으, 역시 무당파구먼. 형(形)만 따왔는데도 대기에 이 정도 흐름을 만들어 낸단 말이지? 걸물이다, 걸물.”

그때,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럽게 치사하네요.”

“컥!”

연호정은 깜짝 놀랐다.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사람이 다가온 줄도 몰랐던 것이다.

묵비가 눈살을 찌푸렸다.

“남의 무공 훔치니까 좋아요?”

“훔치다니! 그냥 그놈 가르치면서 자연스럽게 익힌 거야. 뭐, 좋잖아?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이 된 건데.”

“으이그, 으이그!”

“쩝, 그렇게 경멸 가득한 눈으로 보지 마라.”

연호정이 점잖지 못하게 낄낄거렸다.

“어휴, 그만 웃고 따라와요.”

“음? 어딜?”

“아버님이 부르세요.”

“날 왜?”

“나야 모르죠. 군(軍) 뭐라는 말씀은 들었는데.”

장난기 가득하던 연호정의 얼굴이 금세 진지해졌다.

“시작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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