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오합지졸 (2)
“오셨습니까.”
“그래.”
“차 한잔 드시겠습니까?”
“허허, 그러자꾸나.”
잠시 후, 모용군과 모용우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차로 목을 축인 모용군이 물었다.
“건곤백팔검해(乾坤百八劍解)는 어떻더냐?”
“어렵더군요.”
모용군이 다 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모용세가 수백 년 역사가 결집된 최고의 검학이다. 내 이십 년 가까이 익혀 왔지만, 아직도 더 뻗어 나갈 길이 있더구나.”
“무궁무진한 검결이라는 것은 알았습니다.”
“잘 보았다. 방위, 검력, 속도, 기예 등등 파도 파도 끝이 보이질 않지.”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허허, 형제간에 그런 딱딱한 인사는 필요 없다.”
기묘한 말이다.
모용군은 진심으로 뱉은 말이겠지만, 그것은 모용우가 자신을 따르겠다 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모용우가 끝까지 절강에서 버티고 있었다면, 아마 죽을 때까지 보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이게 낫구나.’
모용군은 수일간 모용우를 찾아와 이런저런 대담을 나누었다. 마치 밀린 정을 이제야 주는 듯 모용우를 위했다.
하지만 모용우는 알고 있었다. 모용군의 호의는 본인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잠시지간 취해 있었지.’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졌다. 모용군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고, 모용우 역시 일정 부분 동의했다.
그러나 이렇게 한 번씩 위화감이 깃든 말을 들을 때마다 깨우치게 된다.
‘형님은 위험합니다.’
미세하게 흔들렸던 다짐이 다시 완고해졌다.
“괜찮겠느냐?”
“예?”
“절강지부를 네 수하에게 맡겨 두어도 말이다. 당분간 너는 내 밑에서 일해야 할 텐데.”
모용우가 자신 있게 말했다.
“제 수하의 행정 능력은 저보다도 뛰어납니다. 오히려 지부 사업을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는 더 나을 것입니다.”
“허허, 그래? 네가 그런 평가를 내릴 정도면 보통 인재는 아니겠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후, 상황을 봐서 그이도 본가로 들이도록 하자.”
“예?”
“음? 허허, 뭘 그리 놀라느냐. 네 사람이라면 본가의 사람이기도 하잖느냐?”
가만히 모용군을 보던 모용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모용군의 인재 욕심은 끝이 없다.
하지만 구주명가의 세력 확장 방식과는 달랐다. 욕심은 내지만 문제가 될 것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모용군이 안정적인 기반을 쌓아 올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일순 모용우가 표정을 굳혔다.
“형님.”
“그래, 먼저 말하거라.”
“전에 말씀하셨던 부분 있잖습니까?”
“무엇 말이냐?”
“혼인…… 말입니다.”
“아, 중원전장의 장녀 말이냐?”
모용군이 웃으며 수염을 쓸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나도 전에 그 아이를 한 번 본 적이 있다만, 총기(聰氣)가 뛰어나고 미색도 몹시 고왔다. 나이도 어리니, 네 배필로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모용우의 얼굴에 솔직한 당혹감이 드리워졌다.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허허, 혼인이라는 게 별것이 아니다. 일단 해치우고 나면 왜 고민했나 싶을 게야.”
그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모용군에게는 정말 별문제가 아닌 모양이었다. 실제로 그 역시 신붓감의 배경과 능력을 보고 혼인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이 그랬다.
평화로운 세상이지만, 이 평화는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끝나지 않은 난세(亂世)에서 유력가와의 혼인은, 어쩌면 필수일는지도 몰랐다.
“다만, 혼사를 늦출 필요는 있겠더구나.”
“예?”
모용군이 품에서 금빛 문서를 꺼내 들었다.
모용우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봉공회의를 거쳐 작성된 맹회의 문서다.”
“그런 문서를 외부로 유출해도 되는 것입니까?”
“음? 허허! 여기도 무림맹이 아니더냐.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중요 문서의 외부 유출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중죄다.
‘믿고 있으신 것이다.’
모용우는 모용군의 얼굴을 살폈다.
문서를 유출했음에도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다.
‘믿고 있으신 거야. 문서를 유출한 게 걸려도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는 걸.’
맹내의 기반이 어지간히 탄탄하지 않으면 이런 짓도 쉽게 못 한다. 그만큼 모용군은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각파의 수장 몇몇과 손을 잡으신 게 분명해. 적어도 넷 이상…….’
무섭다.
일신의 무공과 지략만이 뛰어난 게 아니었다. 모용군은 정치에도 일가견이 있었고, 그 능력은 산전수전 다 겪은 무림의 거인들에게도 통했다.
“왜 그러느냐?”
“……아닙니다.”
모용우가 문서를 읽어 내렸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무림맹 산하의 조직도가 완성되었다. 물론 모든 조직이 정비될 때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이다만.”
“……유군은 빠르군요.”
“그렇다. 독립유군의 경우, 맹에 가입할 무인들 중 옥석을 가려 뽑을 예정이다. 아마 네게 큰 힘이 될 것이다.”
모용우의 눈이 커졌다.
“한데 숫자가 다르군요.”
“음?”
“제가 맡을 유군과 연가의 장남이 맡을 유군의 인원 한도가 다릅니다.”
모용군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저쪽에다가 많은 숫자를 넣어 줄 필요는 없잖느냐?”
모용우가 맡을 유군의 인원 한도는 오백이었다.
반면 연호정이 맡을 유군의 인원 한도는 고작 백에 불과했다.
“인원이 많다고 좋은 전과를 올릴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능력이 비슷하다면, 그때부터는 외부 요인이 큰 힘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
“이 년 내로 저쪽 유군을 해체하거나 통합해 보거라. 그것이 네가 맡을 첫 번째 임무다.”
“알겠습니다.”
모용우가 문서를 놓았다.
눈빛은 다소 흔들렸지만, 표정만큼은 완고했다. 나름의 자신이 있다는 뜻이리라.
“그 전에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음?”
모용우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연가의 장남을 만나야겠습니다.”
* * *
“흐음, 백 명이라.”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구나. 내 나름대로 노력은 했다만, 결과가 이리 나와 버렸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유군이란 존재를 탐탁지 않아 하셨잖습니까?”
“그래서 반대했다. 하지만 이왕 만들어질 유군이라면, 너에게 힘을 실어 주고 싶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연호정의 얼굴에 재미있다는 기색이 떠올랐다.
“백 명이 한도라…….”
“기실 활동 조항을 보면 그리 적은 숫자는 아니다.”
“오히려 많습니다.”
“뭐라?”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백 명을 채울 생각은 없습니다. 물론 쓸 만한 자들이 나타나면 영입하고는 싶지만요.”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제가 궁금한 건 하나입니다.”
“무엇이냐?”
“언제 맹을 나설 수 있습니까?”
연위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벌써 유군과 맹을 나설 생각을 하고 있느냐?”
“물론입니다. 애초에 백 명까진 필요하지 않았지만, 어찌 되었든 저 쪽에게 숫자로 밀려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나가 전공을 세울 수밖에요.”
“너무 급한 것 아니더냐? 게다가 유군이 유군으로서 활동하기 위해선 마땅한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
“목적은 만들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
“……라고 말씀드려 봤습니다만, 기실 저는 정도(正道)만 따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정도를 따른다?”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모용군에게 독립유군이라는 패를 가져올 때부터 구상해 두었던 목표.
“흑도를 정리할 생각입니다.”
“흑도 무림을?!”
“그렇습니다.”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연호정이 연위에게 속내를 숨긴 것은.
“민생의 피를 빨아먹는 흑도의 악랄한 방파들을 싹 도려내 놓겠습니다. 물론 흑도가 아니더라도 민생을 위협하는 존재들을 박멸하면 되겠지요.”
흑도 무림인이라고 다들 ‘나 흑도요.’ 하면서 살지는 않다.
도리를 어기고 명확한 위법을 저지르는 자들. 그런 자들이 흑도가 아니고 무엇일까.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아니, 오히려 좋다. 백도 무림의 힘이 무림맹으로 집결되면 필연코 각 지역의 흑도가 위세를 떨치기 마련이지.”
“그렇습니다. 그런 잔가지들을 잘라 내는 것부터 시작해야지요.”
“음.”
연위는 아들의 표정을 살폈다.
연호정이 희미하게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연위는 알 수 있었다. 연호정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이제는 아들의 표정과 눈빛만 봐도 속내를 꿰뚫어 볼 수 있다. 그만큼 부자지간의 교류가 깊었기 때문이리라.
“그 외에 다른 목적은 없느냐?”
“…….”
거짓말을 할 수가 없군.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있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걸로 끝이다.
무슨 목적이 있는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연위는 그 이상 캐내려 하지 않았다.
말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면 애초에 자신을 속일 녀석이 아니니까. 연위는 아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다짐은 받아 두어야겠다.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아닐 거라 믿겠다.”
“적어도 제 도의에는 어긋나지 않습니다.”
애매한 발언이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됐다.”
연호정은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마음 같아선 광신삼교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백도무림맹뿐 아니라 흑도 역시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아직은…….’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
죽어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아버지다. 어떤 얘기를 해도 믿어 주실 분이라는 걸 안다.
그래도 아직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고 적의 실체가 명확해졌을 때, 바로 그때 말을 해도 늦진 않으리라.
‘일단은 나의 일에 집중하자. 시간이 얼마 없어.’
본래라면 이십 년도 더 뒤에 광신삼교가 중원을 침공한다.
그러나 역사가 바뀌었다.
연호정, 그 단 한 명으로 인해 멸문했어야 할 연가가 살았고, 구주명가가 더 빨리 무너졌으며, 무림맹의 설립 역시 앞당겨졌다.
이 변화는 결코 작지 않았다.
‘더 나중에 침공할 수도 있다. 어쩌면 모종의 사건으로 평생 중원을 넘보지 않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만일 그들이 예전부터 침공을 준비했다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더 빨라질 가능성이 있다. 그것 하나만 생각해도 시간이 없어.’
연호정이 생각한 적들의 최대 여유는 십 년이었다.
적어도 십 년 안에 광신삼교가 중원으로 진출한다고 봐야 했다. 그렇게 상정하고 움직여도 모자랄 판이었다.
말하자면, 십 년 내로 모용우를 무림맹주로 만든 후 백도 전력을 가꾸어야 하고, 동시에 흑도 무림의 힘을 하나로 맞춰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의 목표이자 사명이었다. 하늘이 자신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연호정은 진심으로 그리 믿었다.
“어찌 되었든, 너무 급하게 움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당장 유군의 병력을 어떻게 뽑을지 명확한 얘기조차 나오지 않은 실정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생각해 둔 게 있습니다.”
“으음?”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아주 맹탕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강호를 자유롭게 종횡할 만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모일지는 모르겠지만, 최소 서른 명은 될 거라 예상합니다.”
“서른 명…….”
연위의 눈이 번뜩였다.
“너 설마?”
그때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겠습니다.”
“……모용세가의 사람인 것 같다만.”
“맞습니다. 제 손님일 겁니다.”
파군각으로 오고 있는 무인, 바로 모용우였다.
‘준비해 두길 잘했군.’
연호정은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그곳에는 제법 두꺼운 서신이 들어 있었다.
모용우에게 전해 줄 서신이었다.
‘내가 없어도 잘하리라 믿는다. 당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 봐.’
연호정이 연위에게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아버지.”
“음?”
“모든 일이 잘 풀릴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특유의 어색했던 미소가 이제는 제법 자연스러워 보였다.
“사고나 치지 말거라, 이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