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오합지졸 (4)
“말도 안 되는 소리요. 출맹이라니?”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 유군을 이루는 무사들도 뽑지 않은 판에 어찌 출맹을 한단 말이오? 설마하니, 유군 대장 혼자 보낼 생각이오?”
“아닙니다.”
“하면?”
제갈문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연호정 유군장은 이미 모든 무인을 선발했습니다.”
“……?!”
“숫자는 적지만, 유군장의 병법 조예가 깊고 일신의 무공도 대단한 만큼 한시라도 빨리 강호로 보내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이는 유군장이 직접 요청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때, 남궁인이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이건 너무 심한 처사외다.”
“심한 처사라니요?”
“독립유군이라는, 무림맹에 두 개뿐인 단독 부대가 창설되었소. 제아무리 자유로운 부대라고 하나, 군장 취임식이나 도열식도 하지 않고 보낸 것은 분명 실수라 아니 말할 수 없소.”
점잖은 목소리로 질책 어린 내용을 말한다.
제갈문호가 미소를 지었다.
“남궁가주님께서는 본맹이 군부라고 생각하십니까?”
“군부는 아니지만 일에는 절차라는 게 있소이다. 벌써 출맹했다면 다시 불러들여야 하고, 아직 나가지 않았다면 정식 허가가 나올 때까지 붙들어야 하오.”
“말씀은 이해합니다만, 그런 것은 허례허식에 불과합니다.”
남궁인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허례허식이라니?”
“연 군장이 하루라도 빨리 출맹하겠다고 한 것은 각지에서 창궐할 흑도 무리의 세(勢)를 약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설마하니 남궁가주님께서는, 흑도 무리의 득세보다도 예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남궁인의 눈이 차가워졌다.
생각지도 못한 과격한 대응이었다. 어조는 세련됐지만, 그 내용엔 공격적인 의도가 다분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는 건가.’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제갈가주의 말씀은…….”
“정정해 주십시오. 저는 무림맹의 군사입니다. ”
순간 무성전 내의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또한 이곳에 모인 분들은 당대 백도를 이끌어 가고 있는 주역입니다. 사석이라면 모를까, 공석이니만큼 호칭에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모용군이 희미한 웃음을 띠었다.
“죄송합니다. 아직 직명이 익숙지 않아 이 사람이 실수했습니다.”
“이해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제갈 군사의 말씀에는 어폐가 있습니다.”
“삼가 세이경청하겠습니다.”
“무림맹 창설에 대한 소문은 일파만파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소문이 퍼진다고 하여, 흑도가 준비도 없이 득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갈 군사께서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것이 아닐는지요.”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나아가, 설령 흑도 무리가 지금 이 순간에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다 한들, 그곳이 어디인지 일일이 확인하긴 어렵습니다. 연 군장의 부대 하나로 각지의 흑도 무리를 제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란 말입니다.”
제갈문호가 미소를 머금었다.
순간 모용군은 아차 싶었다.
‘이 말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나?’
제갈문호가 무성전 입구를 향해 소리쳤다.
“가득상 후개는 대전으로 들어오시오.”
쿠르릉.
문이 열리고 가득상이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돌돌 말린 커다란 종이가 들려 있었다.
“개방의 후개 가득상이 무림맹 봉공 어른들을 뵙습니다.”
제갈문호가 말했다.
“지도를 주시겠소?”
“여기 있습니다.”
거대한 탁자 위로 상세한 중원전도(中原全圖)가 펼쳐졌다.
지도 곳곳에는 붉은 글씨로 흑도 무리 방파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놀랍게도 그 수는 무려 일백이 넘었다. 이름난 흑도 방파부터 소규모 방파까지, 세밀하게도 적혀 있었다.
“봉공들께서도 아시다시피 천하는 넓습니다. 붉은 표시는 규모가 크거나 민생 안전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는 곳, 앞으로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방파들만 우선적으로 표기해 둔 것입니다.”
“허어.”
“적게 잡아도 이 정도입니다. 일일이 파악하려면 셀 수도 없겠지요. 다만…….”
제갈문호가 가득상을 바라보았다.
가득상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유군이 중원 전역을 돌며 여기에 표기된 곳을 전부 섬멸한다면, 흑도 무림은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걷게 될 것입니다.”
애초에 흑도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존재다. 어떤 의미로 그들은 양민들의 삶에 백도 무림보다 훨씬 더 깊게 녹아들어 있었다.
고수로 명성을 떨치는 자도 흑도요, 기루의 기둥서방도 흑도이며, 고리대금으로 양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자들 역시 흑도이다.
그러한 악랄한 자들을 흑도라 총칭하니, 천하 모든 사람이 죽지 않는 이상 흑도를 없앨 수는 없다.
그렇다면 결국 흑도를 짓누르는 방법은 하나다.
흑도의 명성 높은 방파나 고수들을 위주로 사정없이 깨부수는 것이다. 다시 고개를 들면 또 찾아가 깨부수고, 숨어 있다면 끄집어내서라도 섬멸해야 한다.
“여기 계신 봉공들께서는 강호 경험이 누구 못지않은 무림의 거인들이십니다. 지도상의 흑도 무리를 척결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으실 테지요.”
당연히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것은 무공의 강약 이전에 병법이 필요한 일이고, 병법 이전에 부대의 단결력이 중요한 일이었다.
모용군이 말했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습니다만, 대체 연호정의 유군에 속한 무인들은 어디서 뽑았습니까?”
그러자 구대문파 장문인 중 몇몇이 연신 헛기침을 해 댔다.
모용군의 눈이 커졌다.
“설마 구대문파에서 차출했습니까?”
청성파(靑城派) 장문인 풍벽자(風癖者)가 입을 열었다.
“다른 문파는 모르겠습니다만, 청성의 경우 제자들의 자율에 맡겼습니다.”
“자율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녀석들은 본산의 소중한 제자들입니다. 다만 지금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지요. 그런 제자들에게 독립유군으로서 강호행을 한다는 것은, 색다른 자극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허어.”
모용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른 장문인들께서도 비슷한 이유십니까?”
다들 말이 없었다. 딱히 할 말도 없었고, 말해 봤자 얘기만 길어질 것 같았던 것이다.
풍벽자가 재차 입을 열었다.
“하나, 숫자가 극히 적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오십이 채 안 됩니다.”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십이 안 된다고는 하나 그들 하나하나는 구대문파의 절기를 전수한 청년 고수들입니다. 동시에, 지금껏 한 번도 뭉쳐 본 적이 없는 이들이지요. 그런 이들을 데리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은 채 강호로 나가다니,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말씀은 그냥 넘기기 힘듭니다만.”
“무어라?”
“독립유군을 만들자 주창하신 분도, 유군의 대장에게 휘하 병력의 생사여탈 권한을 주자고 말한 분도 모용 봉공님 아니셨습니까?”
“……!!”
“어떻게 훈련하든, 어떤 식으로 부대 운용을 하든 그것은 전부 유군 대장의 몫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군 대장이 짊어져야 할 책임도 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한 방 맞았군.’
설마하니 연호정이 이리 빨리 출맹해 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두 개의 독립유군이 창설식을 거행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히 연호정이 맡은 유군은 모용우가 맡을 유군에 비하면 조잡하기 그지없을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부대의 사기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시작부터 짓누르고 출발시키려 했거늘, 아예 먼저 출발해 버렸다고? 허!’
정말이지 머리 돌아가는 것 하나만큼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놈이다. 승부를 기다렸더니 판을 엎고 다른 도박장으로 가 버린 격이다.
제갈문호가 말을 이었다.
“나아가 말씀드립니다. 혹 유군에 속한 구파의 제자 중 본산 어른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이가 있다 해도, 다시 빼 가는 것은 군장의 허락 없이 불가능합니다.”
화산파 장문인, 용화진인(龍華眞人)의 눈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본산의 제자가 허락도 없이 증명도 안 된 부대에 속해 있거늘, 어찌 좌시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절대 안 될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맹회법(盟會法)에 이 문구를 빼야겠지요.”
제갈문호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맹법은 지엄하여, 무림맹 소속원은 누구도 법령에서 자유롭지 아니한다. 설령 맹주라 한들, 맹주 특별법에 의거한 보호 기간이 끝난 후에는 법령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다.”
“……!!”
“각 부대장에게 그 정도 권한도 주지 않을 생각이시라면, 저 역시 군사직을 내려놓겠습니다.”
용화진인은 당황했다.
“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오랫동안 비어 있던 무림맹에, 다시 백도의 힘이 집결되었습니다. 이곳에 모인 우리 봉공들은 각 문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지요.”
제갈문호가 봉공들을 둘러보았다.
지혜로 가득 찼던 그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엄한 빛을 발했다.
“무림맹 창설에 동의했을 때, 이곳에 계신 봉공분들 모두가 맹법의 지엄함을 따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믿습니다.”
세 치 혀로 좌중을 압도하는 제갈문호다.
모용군은 내심 혀를 찼다.
‘완전히 한 방 먹었군.’
제갈문호가 연호정과 모종의 관계가 있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연호정의 특이 행동으로 인해 제갈문호는 봉공들을 휘어잡을 명분을 얻었다. 그리고 제갈문호는 그 멋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제 그 누구도 제갈문호의 말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유추한 모용군조차도.
“에,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가득상이 머리를 긁적였다. 허연 비듬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왕지사 봉공분들께서 다 모이셨으니, 방금 들어온 따끈따끈한 정보 하나를 풀어도 되겠습니까?”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개께선 편히 말씀하시오.”
“감사합니다.”
가득상이 나직이 숨을 들이쉬었다.
“흑도 관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맹회 측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흑도 인사들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게 누구요?”
“투왕(鬪王)의 제자들입니다.”
“……!!”
“그리고 그중 몇몇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 * *
어둠으로 가득한 공간.
그곳에 활활 타오르는 두 쌍의 귀안(鬼眼)이 나타났다.
“무림맹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정파 놈들이 무림맹을 창설했단 말이지?”
“예.”
“혹, 우리가 움직인 것을 알아챈 건 아닌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습니다만, 모를 확률이 높다고 사료됩니다.”
“만일 우리에 대해 모른다면, 어찌 이 시국에 무림맹이 창설된 거지?”
“상세한 이유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구주명가의 멸문이 정파 무림 연합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그렇군.”
“아직 그들의 움직임에 특이 사항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조심할 필요성은 있지만, 백도무림맹 때문에 일을 지체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지체할 생각은 없었네. 다만 충분히 조심해야 해. 사음(邪淫)이라면 모를까, 우리는 안개가 되어야 하네. 적어도 칠 할 이상의 점거율을 보일 때까지는 지금의 체제를 유지할 것이네.”
“알겠습니다.”
“천만다행히도 ‘그’가 눈을 떴으니, 본래 대계(大計)보다 십 년 이상 빨라질 듯하네.”
“드디어 눈을 떴습니까?”
“그렇다네.”
“…….”
“좋은 일이지만, 너무 흥분하지는 말게.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 차근차근 가도록 하세나.”
“명심하겠습니다.”
“……긴 싸움이 될 거야. 아주 지루하고도 긴 싸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