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멸사군(滅邪軍) (5)
퍼억!
장작 패듯 내리친 도끼질로 근거리에 있는 마지막 음사방도를 죽인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철컹! 철컹!
우람한 상체를 에워싸고 있던 쇠사슬이 조각조각 끊어져 땅으로 떨어졌다.
히히힝!
불안한 듯 말이 거친 울음을 토해 냈다. 자신이 태운 인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불길한 기운에 겁을 먹은 것이다.
그때였다.
사내가 커다란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머리가 부서진 말이 그대로 주저앉듯 다리를 접었다. 사내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땅에 내려섰다.
“후욱.”
한 차례 거친 숨을 토해 낸 사내가 멍하니 전방을 주시했다. 말을 죽일 때는 거침이 없더니, 지금은 또 자아가 없는 인형 같다.
기묘한 자였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불길한 기세를 뿜어내면서도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언뜻 보면 백치 같기도 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뭐야, 저놈은?’
움직이기 전까지는 존재감이 극히 미미했다. 하지만 쇠사슬을 부수고 나서는 어떤 고수 못지않은 강력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다.
‘강하다.’
회귀 후, 그가 상대했던 적 중 가장 강한 자는 바로 명천이었다.
하지만 명천은 변형된 주작공(朱雀功)을 익히고 있었다. 그의 경지는 능히 아버지에 비견될 만했지만, 상극 중의 상극인 연호정의 무공 앞에선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주작기(朱雀氣)가 상단전을 망쳐 놓아서 제 실력을 보여 줄 상태도 아니었다. 명천이 연호정에게 패배한 이유였다.
명천을 제외한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고수로 몽의를 들 수 있겠다. 묵비와의 연수로 순식간에 잡았지만, 당시의 실력으론 일대일 정면 승부로는 승패를 장담키 힘든 고수가 몽의였다.
저 사내는, 적어도 느껴지는 기파로만 봤을 때는 몽의보다도 강자였다.
‘최소 한 수 위.’
그때, 아광이 외쳤다.
“평산! 네 주인으로서 말한다! 놈들을 싹 죽여 버려라!”
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평산이라 불린 거구의 사내가 연호정 앞에 나타났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엄청난 속도!’
콰앙!
평산의 주먹이 땅을 부쉈다.
번개 같은 몸놀림, 무식한 권법이었다. 연호정이 제때 세 걸음 물러나지 않았다면 좌측 어깨가 산산조각이 났을 것이다.
아광의 눈이 커졌다.
“그놈은 나중에 처리해! 저 구파 떨거지들부터 죽여라!”
파아앙!
평산이 재차 연호정에게 돌진했다.
놀랍게도 그는 아광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 흐리멍덩했던 그의 두 눈은 오로지 연호정만을 쫓고 있었다.
“저, 저놈이!”
당황한 아광.
반면 연호정은 내심 안도했다.
‘차라리 좋아.’
이 정도 고수가 작정하고 후기지수들을 노리게 되면 이쪽으로서도 곤욕이다. 누구 하나 죽게 놔두진 않겠지만, 자칫 이 무리의 수장을 놓칠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말인즉.
‘일대일. 이놈만 무너트리면 되는 것이로군.’
도출된 답이 순식간에 연호정의 몸을 이끌었다.
번쩍! 퍼억!
평산의 몸이 거칠게 흔들렸다.
고공각으로 그를 밀어 낸 연호정이 질풍처럼 돌진하며 반룡장(反龍掌)을 내쳤다.
두우웅!
타격이 아닌 밀어 내는 배(排) 자 결이었다. 평산의 거대한 몸이 붕 떠서 뒤로 날아갔다.
‘좋아.’
후기지수들에게까지 미쳤던 전권이 한층 멀어졌다. 이제는 온 힘을 다 해도 될 것이다.
콰앙!
태산이라도 뒤흔들 듯 강력한 진각과 함께 백색의 돌풍이 불어닥쳤다.
마침내 꺼내 드는 사신무, 백호공의 호왕구벽세(虎王九霹勢)가 펼쳐졌다.
부우우웅!
허공을 가르는 광룡부가 범의 앞발처럼 평산의 상체를 노렸다.
평산의 두 눈에 광기가 어렸다.
쩌저저저저정!
무시무시한 칠 연타를 양 주먹으로 맞선다.
파아아악!
평산의 두 주먹에 희미한 핏물이 번졌다. 광룡부의 과격한 공세를 전부 튕겨 내진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연호정의 내공, 실력, 더하여 신병이기 소리를 들어도 부족함이 없는 광룡부까지.
어지간한 고수는 다섯 합 안에 날려 버릴 공격을 맨주먹으로 쳐 낸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공력이 두 주먹에 집결되어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무공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쩌저저정! 콰르르릉!
쇠와 쇠가 부딪칠 때 터져 나오는 공명음 위로 천둥소리에 가까운 굉음이 더해졌다.
회피나 반격 따위는 일절 허용하지 않는 지극히 전투적인 싸움이었다. 철저하게 상대를 박살 내는 데에 집중한 힘 대 힘의 생사결이었다.
푸화악!
평산의 팔뚝이 쩍쩍 갈라져 피로 물들었다. 백호기의 사나운 압력을 피부가 버티지 못한 것이다.
촤아아악!
연호정의 양쪽 소매도 갈기갈기 찢어졌다. 찢어진 소매 밖으로 드러난 그의 양팔 역시 평산처럼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괴력끼리의 충돌이었다. 힘 싸움으로는 승부를 가리기가 어려웠다.
호왕의 기세를 받아 연신 맹공을 퍼붓던 연호정이 이내 몸을 휘돌렸다.
파바바박!
힘의 무공에서 속도의 무공으로 전환한다. 허벅지, 옆구리, 팔뚝, 어깨를 후려친 각법에 평산의 공격이 주춤했다.
‘빈틈!’
절묘한 연계기로 만들어 낸 틈이었다. 연호정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후욱!
찰나지간 평산의 품으로 파고드는 연호정.
도끼를 휘두르기 어려운 위치임에도 뿜어내는 투기는 여전했다. 평산은 본능적으로 무릎을 올려 쳤다.
그때였다.
백색의 바람이 흑청의 귀갑으로 탈바꿈했다.
쾅!
엄청난 반탄력에 평산의 자세가 허무하리만치 쉽게 무너져 버렸다. 절대방어, 현무기의 북천십이벽이었다.
곧바로 공수 전환인가?
그렇지 않았다.
쾅! 쾅! 쾅!
백호군림의 무서운 진각을 밟아 가며 전진하는 연호정의 상체 위로 귀갑의 형상이 점차 뚜렷해졌다.
놀랍게도 현무기를 극한까지 끌어올려 전진한다. 백호공이나 주작공이 아닌, 방어의 현무공으로 공격을 시전하는 것이다.
평산의 얼굴이 흑청의 빛으로 어둡게 물들어 갔다.
콰아앙!
평산의 몸이 훨훨 날아 땅에 처박혔다.
“푸화악!”
코와 입에서 대량의 선혈을 토해 낸다. 북천십이벽의 엄청난 반탄력에 극심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좋아.’
완전한 방어는 곧, 무적의 공격이 될 수 있으니.
지나치게 무거워 쉬이 구사할 순 없으나, 시기적절하게 이용하면 이 정도의 위력도 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한 성과야.’
시간이 지날수록 무공 전환의 속도가 빨라지고, 그 속도를 감당할 만큼 신체가 단련되어 간다.
무림맹에 오기 전, 두 달 동안 자신의 무공을 다듬은 연호정의 무위는 어느새 이 정도 수준까지 성장해 있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화르르르륵!
북흑의 어둠으로 물들었던 연호정의 두 눈에서 태양 같은 살기가 쏟아졌다.
“크아아악!”
피를 토하며 일어난 평산이 재차 연호정에게 달려들었다. 또다시 힘의 무공, 파괴의 권법을 시전하는 것이다.
훅!
평산의 눈에 어리둥절한 기색이 어렸다. 눈앞에 있던 연호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어디로 갔는가?
번쩍!
사신무 최속의 보법, 혈익휘천으로 평산의 후미를 점한 연호정.
휘두르는 광룡부에서 불꽃처럼 뜨거운 홍색의 진기가 뿜어져 나왔다.
퍼버버버벅!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
어느새 자세를 낮추고 광룡부를 높이 쳐든 연호정의 모습은 날개를 접은 주작의 자태, 그 자체였다.
주르르륵.
평산의 몸 여기저기에 붉은 실선이 그어졌다.
잠시 후.
푸화아악!
전신이 열두 조각으로 분리된 평산이 죽음을 맞이했다.
스륵.
자세를 바로잡은 연호정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제대로 들어갔군.’
남천의 지배자, 주작의 절대살공(絶對殺功).
백호의 호왕구벽세, 현무의 북천십이벽에 이은 주작의 홍염육살공(紅焰六殺功)이 완벽한 형(形)으로 구현되는 순간이었다.
‘한데.’
평산의 조각난 시신을 내려다보던 연호정의 얼굴에 묘한 기색이 어렸다.
‘이놈, 그 자에게 사사했나?’
성천십삼좌의 일인.
신선제왕 중 유일하게 흑도 사파 소속인 투왕(鬪王) 양천(楊擅)의 무공 투로가 얼핏 보였다.
‘……지금은 상관없겠지.’
과거 흑제성을 만들 때 최후까지 부딪쳤던 사람이 바로 양천이었다.
양천을 죽이고 흑제성을 건립한 그 순간, 연호정은 흑도대종사로서 만인에게 인정받았다.
‘어차피 흑도를 규합하는 과정에서 부딪치게 될 사람이다. 지금은 그에게 신경 쓸 때가 아니야.’
연호정이 아광을 돌아보았다.
아광의 두 눈은 지독한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괴, 괴물 같은 놈!”
평산과 싸우기 전에도 이미 자신을 압도했던 놈이다. 한데 인제 보니, 그때는 제 실력을 전부 드러내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진신진력을 꺼내 든 연호정의 무공은 이미 일가(一家)를 이루었다는 평을 받아도 부족함이 없었다.
연호정이 광룡부로 아광을 겨누었다.
깜짝 놀란 아광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슬슬 끝을 내야지.”
파아악!
아광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곡 입구로 돌진했다. 수많은 바위가 쌓여 있어 넘어가기도 힘들었지만, 그보다는 연호정과 맞서 싸우는 게 더 힘들다.
상요 역시 아광의 뒤를 따랐다. 더 이상의 교전이 이어져 봤자 의미가 없다. 목숨이라도 보전해야 했다.
연호정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묵비.”
티이이이잉! 퍼퍽!
연호정의 얼굴 좌우를 스치듯 날아간 화살 두 발이 아광과 상요의 뒤통수를 정확하게 꿰뚫었다.
전투 종료였다.
* * *
“후우, 고되군.”
광룡부를 놓고 맨땅에 앉은 연호정이 후기지수들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형용할 수 없는 충격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백도 정파의 기둥인 구대문파 출신으로 오랜 시간 무공을 익혀 온 그들이었다. 그 자부심 넘치는 무학을 정작 실전에선 삼 할도 써먹지 못했으니 충격이 클 만도 했다.
게다가 오십 명에 달하는 그들이, 고작 연호정과 묵비 두 사람에게 보호를 받았다.
적에게 당한 상처보다 마음에 입은 상처가 더 컸다.
“꽤 살벌하지? 실전이라는 거.”
살벌한 정도가 아니었다. 이유 불문하고 달려드는 적도들의 칼은 공포 그 자체였다. 몸에 밴 무공 초식 하나 제대로 뽑아내기가 힘들 정도였다.
“미리 말해 두지 않은 건 미안하다. 다만 이거 하나는 알아줬으면 좋겠군. 너희가 그 정도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거란 생각은 못 했다.”
자존심을 자극하는 언사였다.
하지만 왜일까? 그 말에 화조차 낼 수가 없었다. 그만큼 그들이 입은 충격이, 상심이 컸다.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하나 놀라운 사실을 알려 줄까?”
“…….”
“이 궁수, 묵비라고 하는 내 친구 역시 실전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녀석은 자신이 가진 실력의 팔 할 이상을 실전에서 써먹었지.”
분명 묵비의 무공은 강했다.
하지만 실전에선 무공의 수준보다 마음가짐이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그들이었다.
설령 천하제일의 경지에 올랐어도 당황하면 죽을 수 있다. 강호의 칼부림은 삼초를 양보하거나 목 앞에서 칼을 멈춰 주질 않는다.
그것이 바로 실전이다. 내가 죽기 전에 상대를 죽여야만 살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은 연호정에게 목숨의 빚을 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연호정이 억지로 만든 생사결이라 해도.
흑백 또렷한 눈으로 후기지수들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나와 함께하면 이런 일이 수도 없이 생길 거다. 앞으로 흑도 무리 중 악랄한 놈들만 골라서 칠 생각이거든.”
“……!”
“말했다시피 나에게는 너희를 마음대로 조리할 수 있는 생사여탈권이 있다. 그리고 나의 생사여탈권은 무림 연합의 맹법(盟法)으로 수호받는다.”
“…….”
“즉, 날 따라왔을 때부터 너희는 내 수하다. 다만…….”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저런 애송이들 상대로 칼 한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하는 어중이떠중이라면 꽤 곤란해. 그러니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지.”
“…….”
“열을 세겠다. 그 전에 나가지 않는 자들은, 이 시간 이후로 나와 함께 흑도 무림을 정리할 것이다.”
연호정의 얼굴에 사악한 웃음이 떠올랐다.
“하나, 둘, 열.”
“……?”
“오호? 없네? 확실히 구파 출신이라 그런가, 다들 강단이 있어.”
윤호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아, 아니 열을 센다면서요? 둘에서 바로 열로 갑니까?”
“내 마음이야, 인마. 토 달지 마.”
“이, 이런.”
당황한 윤호. 짓궂은 얼굴의 연호정.
후기지수들은 저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어 버렸다. 워낙 심각한 분위기여서 그런지, 작은 농담에도 공기가 부드러워졌다.
심각한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지자, 연호정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왕 왔으니 이유 따위는 던져 버리고 제대로 싸워 보자. 대장으로서, 최소한 너희가 쪽팔리게 죽는 일은 없도록 할게.”
송연경이 웃으며 물었다.
“생존을 보장해 주는 게 아니고요?”
“칼날 위를 걷는 삶이야.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어떻게 아나? 난 지키지도 못할 약속은 하고 싶지 않아.”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기지수들의 눈에, 연호정은 더 이상 연가의 장남으로 보이지 않았다.
여국이 툭 던지듯 물었다.
“이름이 뭡니까?”
“뭔 이름?”
“우리 유군 부대 말입니다.”
예전보다 공손해진 말투, 그리고 우리라는 표현.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멸사군(滅邪軍). 우리는 멸사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