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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47화 (147/963)

147화. 보이지 않는 싸움이 더 무섭다 (2)

대별산맥에서 첫 실전을 치른 멸사군은 연호정의 인도에 따라 하남성 남부의 천중산(天中山)으로 향했다.

연호정은 천중산으로 향하는 내내 단 한 번도 현(縣)에 내려가지 않았다. 철저하게 산길을 고집했으며, 지쳐서 이동이 불가한 사람이 나올 때까지 신법을 펼쳤다.

그렇게 산길을 달린 지 사흘째 되던 날, 묵비가 물었다.

“굳이 구불구불한 산길만 타는 이유가 있어요? 괜히 빙 돌아가는 것 같은데.”

“있지.”

“뭔데요?”

“우리 외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배제해야 하니까.”

아직 첫 실전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이 많았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서로가 더 빨리 가까워지기 위해선 함께 지내는 것만큼 좋은 게 없었다.

연호정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휴식을 취할 때면 군내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다들 아닌 척했지만, 적도들을 격파하는 연호정의 모습에 은근히 그를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전투 때의 자신과 일상의 자신을 확실하게 구분 지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많은 대화와 공감을 유도했다.

연호정의 노력은 생각보다 더 빨리 빛을 발했다.

닷새쯤 지나자, 멸사군의 무인 중 연호정을 무서워하거나 무시하는 사람은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연호정은 강했다. 하지만 그만큼 장난기도 많았고, 그런데도 묘하게 어른스러웠다.

흑암제 시절 때는 보여 주지 못한 연호정 특유의 천성.

가족과의 대화가, 연가에서의 생활이,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어느새 연호정 스스로를 바꾸었다.

치열하게만 살아갔던 흑암제 연호정은 이제야 비로소 진짜 연가의 장남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 멸사군이 천중산 동쪽 끝자락에 들어섰을 때였다.

“군장님.”

“왜?”

동호는 우물쭈물했다.

첫 살인의 충격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그는 아직 옛날만큼의 활발함을 되찾진 못했다. 그래도 타고난 천성은 어쩔 수 없는지, 궁금한 건 꼭 물었다.

“그런데 우리의 다음 적은 누구예요?”

“지금은 몰라.”

“네?”

“후개에게 따로 연락이 올 거다. 그전까지는 교전하지 않는다.”

“그, 그럼 우린 어디로 향하는 거죠?”

“말했잖아, 천중산이라고. 이제 다 왔어.”

“저희는 천중산에 적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에요?”

“물론이지.”

“그럼 뭐 해요, 우리?”

동호의 의문은 모두의 의문이었다. 멸사군 전원이 의아함이 가득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석 달이다.”

“네?”

“석 달 동안 너희의 실전 감각을 최대한 끌어 올릴 거다.”

“……!”

“멸사군이 하나로 움직이는 건 다음 문제야. 지금까지는 편하게 이동했다면, 이제부터는 쓸 만한 전력(戰力)이 될 수 있도록 가꿔야지.”

연호정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어때? 진짜 강호인이 될 준비들은 됐어?”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두 눈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살아온 환경도, 실력도, 꿈도 제각각이지만 그들에겐 공통된 목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들이 익힌 무공이 강호 무림에서 통할 수 있도록 단련하는 것.

“준비됐으면 슬슬 시작하자. 미리 말해 두는데, 석 달 동안 무척 힘들 거야.”

* * *

펑펑 쏟아지는 눈과 칼날처럼 매서운 바람도 어느새 서서히 자취를 감춰 가고 있었다.

한 달, 두 달이 지나 석 달이 되었다.

뼛속까지 시리던 바람은 따스한 봄바람이 되었고, 그 봄바람을 타고 대기를 매만지는 것은 사나운 눈발이 아닌 꽃잎이 되었다.

“와아.”

제갈아연은 저 멀리 아름답게 물든 산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름답다, 아름다워. 그렇지 않니?”

“그러게요.”

“하북의 봄은 어때?”

“이 정도로 산뜻하진 않습니다. 뭐랄까, 묘하게 기침이 나올 것 같은 날씨랄까.”

“그래?”

“예. 뭐, 그래도 겨울보단 낫죠. 겨울은 정말 춥거든요.”

“아직 한 번도 하북에 가 본 적이 없어. 나중에 꼭 한번 들러야겠다. 가면 맛있는 거 사 줘야 된다?”

“그러시죠. 나중에 저랑 형이랑 호북에 들렀을 때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 곰탱아.”

“…….”

“왜 그래?”

“곰탱이라고 안 부르면 안 되나요.”

“누가 봐도 곰이잖아.”

“그럼 전 누이한테 여우라고 부르면 되나요?”

“안 될 건 또 뭐야?”

당당하게 괜찮다고 말하니 오히려 이쪽에서 할 말이 없어졌다.

팽만호가 콧방귀를 뀌었다.

“거 좋네요. 여우와 곰이라? 왠지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설화(說話)에 나올 것 같지 않아요?”

“몰라.”

“아니, 그거 있잖아요. 잔꾀 많은 여우가 곰을 속여서…….”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도란도란 옛날이야기나 들을 만큼 여유 있는 가문은 아니었던 걸로 기억해.”

“거 희한하네. 지식의 보고라는 제갈세가에서 그런 것도 안 들려줬습니까?”

“다섯 살 때 천자문 떼고 바로 사서삼경(四書三經) 들어갔어. 옛날이야기에 혹할 시간이 없었다구.”

“소름 돋네. 너무 냉정한 거 아닙니까?”

“그땐 그랬지. 지금은 아니지만.”

확실히 제갈아연의 표정은 상쾌함 그 자체였다.

팽만호는 고개를 저었다.

“준이는 지금쯤 죽어 나가고 있겠군요.”

“한창 소가주 교육이나 받고 있겠지. 쌤통이다, 망할 놈.”

소가주 교육을 받는 걸 부러워해야지, 왜 쌤통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확실히 제갈아연에게는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누가 제갈세가 자녀 아니랄까 봐 눈치는 귀신처럼 빠르고 아는 것도 많았지만, 권력이나 거창한 꿈은 없어 보였다.

‘하긴, 그건 나도 비슷한가.’

쌍둥이 형인 팽대호는 전형적인 호걸 상이었다. 반면 자신은 귀찮은 일은 싫어하고, 그저 자유롭게 살길 바라는 이단아에 가까웠다.

팽만호는 문득 연호정을 떠올렸다.

‘재미있었으면 좋겠다.’

후기지수 회합에서 만난 연호정이란 존재는 그에게 잊지 못할 인상을 주었다.

다른 건 모르겠고, 그가 연호정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유쾌함.

그 유쾌함은 호쾌함의 일면일 수도, 섬뜩함의 일면일 수도 있다. 다만 왜인지 그와 함께 강호를 주유하면 심심할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그나저나 누이, 이제 슬슬 속도를 올려야 할 것 같은데요.”

“잉?”

“벌써 정오가 지났어요.”

“쿨럭! 달려, 곰탱이!”

“곰탱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파아아악!

두 남녀의 신법은 상당히 빨랐다.

단숨에 마을 어귀를 지나 천중산으로 접어든 두 사람은 약속 지점 인근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우거진 수목과 만발한 꽃이 시야를 가렸기 때문이다.

팽만호가 입맛을 다셨다.

“이거야 원. 왜 하필 이런 곳을 약속 장소로 잡아서는…….”

“저기다.”

“예?”

“저기라고, 곰탱아. 딱 보면 모르니?”

“딱 보고 아는 누님이 더 신기한데요. 근데 저긴 다 막혔잖아요. 누가 봐도 아닌데.”

“답답한 놈. 따라와, 인마. 누님이 한 수 가르쳐 줄게.”

“어? 어? 진짜 가요? 거기 아닌 것 같은데? 진짜 가?”

얼떨결에 제갈아연의 뒤를 따라가던 팽만호의 눈이 한순간 휘둥그레졌다.

‘뭐, 뭐야?’

제멋대로 엉킨 나무 사이로 미세하게 공기가 통했다.

제갈아연이 검지로 나무줄기를 가리켰다.

“아래쪽에서 올라왔으면 더 빨리 발견했을 텐데 아쉽네. 곰탱이, 저거 다 자르자.”

“예? 아! 예!”

후웅.

등 뒤에서 묵직한 대도(大刀)를 꺼낸 팽만호가 힘차게 일격을 휘둘렀다.

파바바바박!

강력한 도풍(刀風)이 일자 억센 나무줄기가 그대로 찢겨 날아갔다.

제갈아연이 휘파람을 불었다.

“장사네, 장사. 힘 하나는 쓸 만하구만?”

팽만호가 말없이 소매를 걷어 알통을 드러냈다. 산봉우리처럼 불쑥 솟은 근육이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제갈아연의 평가는 가혹했다.

“더러워.”

“…….”

“들어가자.”

“네, 여우.”

“여우라고 부르는 건 좋은데, 누님 소리는 꼬박꼬박 해 줬음 좋겠다.”

“네, 여우.”

“나중에 진법에다 사흘 동안 가둬 놔야…….”

“들어가시지요, 누님.”

“오냐.”

두 사람이 나무줄기 사이로 들어갔다.

장난처럼 티격태격했지만, 팽만호는 내심 제갈아연의 안목에 감탄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좁은 동굴처럼 생겨난 공간을 빠져나오자 삼 장 앞에 큼직한 공터가 나타났다.

경치가 빼어난 공터였지만 바람이 깃들기 힘든 장소였다.

바람을 타지 않으니 공기의 흐름도 지극히 적다. 당연히 그 흐름을 타고 이동하는 기(氣)의 흐름 역시 알아채기 힘들다.

‘세상을 보는 눈 자체가 다른 거다. 지극히 입체적인 시각으로 사물을 보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어.’

저 단련된 안목은 단순히 길을 빨리 찾는 데에만 유용할 게 아니었다.

지형지물을 이용한 전략 전술, 나아가 적의 이동을 예측하거나 진법(陣法)을 형성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팽만호가 모르는 또 다른 세계, 군략가(軍略家)가 보는 세상은 그토록 신비로웠다.

“그나저나 아직 안 온 모양입니다.”

“곧 와.”

“그렇겠지요. 시간이 얼추 다 되어 가니까…….”

“그래서가 아니야.”

제갈아연이 동쪽 봉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약속 시간 딱 맞췄네.”

“예?”

그때였다.

‘……!’

팽만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 뭐야?’

저 멀리 동쪽 봉우리 끝에서 자욱한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 먼지가 눈에 띄게 커진다 싶은 순간.

파바바박! 우지끈! 퍼억!

봉우리 끝에서부터 아래쪽으로 줄지어 서 있는 나무들이 차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보고 있어서 그렇지, 실제로는 무서운 속도로 무너지고 있을 것이다. 한 번씩 땅이 울리는 굉음이 터지면 나무 서너 그루가 부러지거나 박살 났다.

그리고 잠시 후.

“……음.”

우우우웅!

먼지구름과의 거리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고요하기만 했던 공터의 공기가 무섭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람의 세기가 달라졌다. 폭발적으로 다가오는 누군가로 인해 공터의 대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마침내 두 사람의 눈에 선두에서 달리는 사람의 모습이 포착되었다.

제갈아연이 미소를 지었고, 팽만호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요란도 하다.”

파아아앙!

이제는 발끝으로 땅을 박찰 때마다 공기 터지는 소리까지 들렸다.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는 사람은 해질 대로 해진 옷을 입은 문사풍 청년이었다. 어깨에 엄청난 크기의 도끼를 매고 달리는데도 그 속도가 바람처럼 빨랐다.

퍼엉!

마지막으로 땅을 박찬 연호정이 두 사람의 삼 장 거리 앞에서 멈추었다.

제갈아연이 손을 들었다.

“얌전히 오면 누가 욕이라도 해? 뭐가 그렇게 급…….”

사라락.

그때,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한 명의 여인이 있었다.

연호정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옷 역시 상당히 더러워져 있었다. 다만 강인하고도 부드러운 특유의 움직임이 놀랍도록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박!

여유롭게 하강한 묵비는 연호정보다 두 발자국 앞에 내려섰다.

“빨라졌네요?”

“네가 할 말이냐? 한참 늦게 출발해 놓곤 이 등이라고? 미쳤구만.”

“칭찬으로 들을게요.”

연호정이 제갈아연을 향해 손을 들었다.

“여어, 오랜만이네?”

“……어? 어어, 오랜만!”

“피부 때깔 봐라. 이제는 분도 바르냐?”

제갈아연이 피식 웃었다.

“내 피부는 원래 도자기였거든?”

“웃기고 있네.”

재차 말을 이으려던 제갈아연을 향해 연호정이 손을 저었다.

“잠깐만 기다려. 애들 슬슬 도착한다.”

연호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십여 명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보던 제갈아연과 팽만호의 얼굴은 이내 황당함으로 얼룩졌다.

“으아아아아!”

“오, 오 등! 오 등이야!”

“커헉! 헉헉!”

“이, 이제는 그만…… 그만 살고, 아니 그만하고 싶어.”

“끄르륵…….”

비틀거리며 공터에 도착한 남녀들은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 것 같았다.

제갈아연은 기가 차는 걸 느꼈다.

팽만호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혹시 멸사군 무사들은 다 개방에서 차출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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