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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49화 (149/963)

149화. 보이지 않는 싸움이 더 무섭다 (4)

“허허, 이렇게 와 주어서 고맙소.”

“음.”

“내 직접 우린 차외다. 근래 상품(上品)의 용정(龍井)을 들였는데 맛이 어떨는지는 모르겠소.”

중년 사내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모용군이 빙긋 웃었다.

“어떻소?”

“나쁘지 않군.”

용정은 찻잎 중 최고로 친다. 게다가 용정 중에서도 상품이라면 고관대작도 쉽게 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차를 마시고도 나쁘지 않다는 한마디로 끝이었다. 대접한 입장에서는 힘 빠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모용군의 표정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다행이오. 입맛 안 버린 게 어디요?”

껄껄껄 웃음을 터트리는 모용군을 보며 사내가 물었다.

“언제 한번 사천에 오시오. 괜찮은 차를 대접해 드리지.”

모용군의 눈이 번쩍였다.

사천으로 오라? 그 말인즉, 자신과 손을 잡겠다는 뜻이 아닌가?

“마음은 자셨소?”

중년 사내, 사천당가의 가주 당관이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고민은 신중하게, 결정은 칼날처럼. 그게 내 신조요.”

“허어?”

“손을 잡지 않을 거였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소이다.”

“하하하!”

모용군은 모처럼 크게 웃었다.

“예전에도 알았지만, 정말 화통하시구려.”

“당신이나 나나 이익을 위해 손을 잡았을 뿐이오. 서로가 서로에게 딱히 대단한 걸 바라는 건 아니잖소?”

“맞는 말이오. 그러나 나나 그대는 한 가문을 좌우하는 수장이외다. 결단을 내린 뒤에도 여러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소이다.”

“가문의 힘은 가주의 자신감에서 나오는 것이오.”

그 한마디로 당가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당가에서 가주는 군왕(君王)이나 마찬가지다. 다른 무가들도 대동소이한 면을 보이지만, 특히나 당가는 가주의 역량이 뛰어나지 않으면 힘을 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마치 흑도 사파 같군.’

다만 당가와 흑도의 문파가 다른 점은, 휘하 병력의 무공과 독심일 것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소이다.”

당관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성적으로 말수가 적은 건지, 이 자리가 불편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모용군은 명백히 후자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따님은…….”

“모용우는 어떻소?”

서슴없이 말을 끊었지만 모용군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한 조직의 우두머리로서 쓸 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냐는 뜻이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설마하니 내가 능력도 없는 사람을 탕마군의 수장으로 앉혔겠소?”

“그런가.”

“내 동생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오. 녀석은 천재요. 무공이야 말할 것도 없고, 상재(商材)까지 두루 갖춘 보기 드문 인재올시다.”

“음.”

당관이 눈을 빛냈다.

“나이가 이제 서른이라고?”

“그렇소.”

“아직 제 짝이 없다고 들었소이다.”

모용군이 눈을 빛냈다.

당관이 모용우에 대한 얘기를 꺼낼 때부터 그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모용군은 모른 척 말했다.

“그 나이 먹도록 일이 바빠 혼사도 못 치렀소이다. 내 마음이 아파 좋은 처자를 물색 중이긴 한데, 아직 그럴듯한 혼처가 보이진 않더구려.”

“그런가.”

“그나마 중원전장의 장녀가 괜찮더이다. 조금 더 물색해 본 연후에, 그보다 괜찮은 혼처가 없으면 시원하게 보낼 생각이오.”

당관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중원전장 따위보다는 사천의 주인과 연을 맺어 보는 게 어떻소?”

모용군의 눈이 재차 빛났다.

“그 말씀은?”

“내 장녀 역시 아직 혼인을 못 했소. 연배는 탕마군장보다 한 살 어리지.”

방년의 나이에 혼사를 치르는 게 당연하게 인식되는 세상이다. 제아무리 강호의 여인이라도 나이가 스물아홉이면 혼처를 찾기가 힘들다.

모용군이 다소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겠소. 나야 당가와 연을 맺는다면 그만큼 기쁜 일이 없겠지만, 막내의 생각도 들어 봐야 옳지 않겠소?”

천하의 모용군이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칫 당신의 딸이 나이가 너무 많아 꺼려진다는 인식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게다가 대대로 당가의 여식과 혼인한 사내는 데릴사위로 들어가지 않소? 우가 그것을 받아들일지는…….”

“상관없소.”

“음?”

당관이 나른한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데릴사위로 들일 생각 없으니, 마음이 있으면 혼사를 추진합시다.”

천하제일로 독하다는 당가주의 얼굴 위에 은근한 피로가 어렸다.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모양이었다. 모용군은 굳이 그 부분을 캐묻지 않았다.

“그리 말씀하시니 우를 한번 설득해 보겠소이다. 늦어도 내일 자정 안에는 답을 드리리다.”

“알겠소.”

모용군은 머릿속으로 당가와 중원전장을 비교했다.

강호에 드리워진 영향력을 생각하면 말할 것도 없이 당가를 선택해야 한다. 비록 존경보다는 두려움의 시선을 받지만, 그 또한 무시할 수 없는 힘이니까.

그러나 중원전장의 자금력 역시 쉬이 무시할 수 없었다. 중원전장은 전장 중 가장 깊은 역사를 자랑한다. 무림도 돈이라는 기반이 없으면 살림을 꾸려 가기 힘든 것이다.

‘어려운 선택지로군.’

적어도 하나는 알겠다.

당관은 지금 확실히 무리하고 있었다. 그 역시 모용세가를 이용하겠지만, 모용세가 역시 당가를 이용할 것임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데릴사위의 관습까지 포기할 정도라면.’

자존심 강한 당가주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

“저쪽은 어떻소?”

“음?”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는 듯 당관이 물었다.

“멸사군 쪽 말이오. 별다른 특이 동향은 없었소이까?”

모용군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쉽게도 있소.”

“……?”

“제대로 확인된 건 아니지만, 제갈과 팽가가 멸사군에 힘을 실어 줄 모양이외다.”

당관이 차갑게 조소했다.

“얼치기 글쟁이들과 힘만 센 바보 놈들?”

무시무시한 발언이었다. 제아무리 당가주라도 같은 육대세가를 지나치게 폄하하고 있었다.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마냥 무시할 수는 없소이다. 그 글쟁이들의 수장이 무림맹의 군사고, 바보들의 수장 또한 하북의 패자 소리를 듣는 사람이오.”

“그래 봤자 대세에 지장을 줄 만한 힘은 없는 놈들이오.”

“틀린 말은 아니외다. 하지만 그 둘이서 한 가문의 날개가 되어 주고 있소.”

당관의 눈이 광포한 빛을 뿜었다.

“연가 말이오?”

“그렇소.”

모용군은 당관의 장자가 연호정에게 호되게 당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이런 자리에서 언급할 만한 얘기는 아니었다.

“내 지금껏 살아오며 가장 크게 놀란 인재가 둘이 있소. 그중 하나가 바로 연가의 장남 연호정이오.”

“그놈이 그렇게 대단하더이까?”

“쉽게 말해 천재고, 내 솔직한 감상으로는 괴물이오.”

당관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모용군의 무공을 인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이 그의 수완이었다.

효웅(梟雄)이자 간웅(奸雄)이라 불릴 만한 위인이 괴물이라고까지 부르는 인재.

대체 연호정이란 놈은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일까?

“강하오?”

“강하오. 지난 겨울, 놈과 손속을 나눠 본 적이 있소. 놀랍게도 놈의 무공은 구대문파, 육대세가의 장로 수준을 상회하더이다. 일룡삼봉보다도 뛰어나 보였소.”

“그 정도요?”

“더 놀라운 건 녀석이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라는 것이오. 그 연배에 그만한 무공, 장담컨대 이대로 크면 누구도 감당 못 할 괴수가 되어 중원을 뒤흔들게요.”

이건 절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당관은 모용군의 눈빛을 읽었다. 그 눈빛에서 묻어난 순수한 놀라움과 분노 등의 감정은 그가 진심으로 연호정에게 탄복했음을 알려 주었다.

‘그 정도 괴물이라…… 양선이 그 꼴이 된 것도 무리가 아니란 말인가.’

당관은 내심 이를 갈았다.

그 대상은 연호정이 아닌, 제 아들 당양선이었다.

‘상대가 설령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파락호라도 방심치 말라 하였거늘.’

그는 아들의 오만한 성품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차후 당가의 주인이 될 남자다. 당가의 주인은 곧 사천의 주인, 그 정도 위치라면 다소 오만하더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오만과 자만은 다른 문제다.

당가가 강한 것은 독이나 암기 때문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적을 죽이고야 마는 독기와 뚝심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독기와 뚝심이 힘을 받으려면 결코 방심을 해서는 안 된다.

아들은 그걸 간과한 것이다. 그렇게 방심치 말라 주의를 시키었는데도.

‘아버님.’

당관의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본가의 수장이 될 아이에게도 신경을 써 주셨어야 했습니다.’

당관의 아버지, 전대 당가주는 당대 무림에서도 전설로 통하는 고수였다.

암왕(暗王) 당형(唐衡).

십 인의 신선제왕 중 하나로 독과 암기 양면에서 궁극의 경지에 도달한 당가 역사상 최고의 천재다.

대다수의 신선제왕처럼 당형 역시 일선에서 물러나 무공만 연마하는 중이었다. 다만, 워낙 손주들을 아끼기에 가끔 가르침을 내려 주곤 했다.

그리고 그런 당형이 최고로 아끼는 손주가 바로 당관의 장녀, 당상아(唐祥娥)였다.

당관은 아버지의 탄식 어린 목소리를 떠올렸다.

‘아쉽구나. 상아가 사내로 태어났다면 역대 최고의 가주로 역사에 이름을 새겼을 텐데.’

대체 그 말이 어디서 샜는지, 전대 가주를 언급하며 당상아에게 중책을 맡겨 보는 게 어떻냐는 의견이 하나둘 많아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당상아는 무재(武才) 외에 뛰어난 미모와 강단 있는 성격으로, 사천의 젊은 무사들이 선망해 마지않는 대상이 되었다. 당가 내에서도 당상아를 추종하는 혈족들이 꾸준하게 늘어 갔다.

당관은 가주로서 그런 상황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아비로서는 피눈물을 쏟을 만큼 안타까웠지만, 가주로서는 가문의 정통성과 가풍을 지켜야만 했다.

“녀석이 그리 뛰어난 인물이라면, 하루빨리 싹을 뽑아 버려야 할 터인데.”

모용군이 고소를 머금었다.

“그러려고 했소. 한데 놈도 만만치가 않더이다.”

“무슨 뜻이오?”

“연호정 그놈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무공이 아니라 심계에 있소.”

“심계?”

“그렇소. 부끄러운 말이오만, 나 역시 놈에게 당한 적이 있소이다.”

이건 그냥 넘기기 힘든 말이다.

기실 당관은 모용군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의 무공과 심계만큼은 인정하고 있었다.

그런 모용군이 이제 막 약관에 이른 젊은 청년에게 한 방 먹었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다면.”

부글부글.

손도 대지 않은 찻잔 속의 찻물이 끓어올랐다. 엄청난 내공 조예였다.

“더더욱 빨리 뽑아내야겠군.”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때를 기다릴 생각이오? 아니면 적극적인 공세를 퍼부을 생각이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천천히 때를 기다리려 했소만, 귀하의 생각은 나와 다른 모양이오.”

딱!

당관이 탁자 끄트머리를 떼어 냈다. 단단한 나무 탁자 모서리를 고작 검지와 엄지만으로 손쉽게 뜯어낸 것이다.

“독초(毒草)에 대해 좀 아시오?”

“내 어찌 당가주 앞에서 독에 대해 논하겠소.”

우우우웅.

당관의 손바닥 위에 놓인 나뭇조각이 서서히 떠올랐다.

“독초 중에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죽는 놈이 있는가 하면, 차 한 잔 마시는 사이에 쑥쑥 커 버리는 괴물 같은 놈도 있소이다.”

모용군의 눈이 빛났다.

“연호정이 그런 놈이다?”

“나야 모르지. 다만 그대가 그리 말할 정도면, 보통 독초는 아니겠소.”

“음.”

당관이 주먹을 쥐었다.

푸스스스!

허공에 떠오른 나뭇조각이 그대로 기화(氣化)했다.

“이 애들 장난 같은 대리전(代理戰)을 두고 보기엔 내 성미가 너무 급하오. 속히 뿌리를 뽑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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