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54화 (154/963)

154화. 악명과 협명 (4)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놀랍게도 척강이었다.

“헉! 사숙!”

헐레벌떡 앞으로 나선 척강이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제자 척강이 사숙께 인사드립니다.”

중년 사내, 패율(貝律)은 척강의 인사를 본체만체했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척강의 사숙이라면 점창?’

점창파.

운남 점창산(點蒼山)에 똬리를 튼 문파로 초기에는 도교 문파로 일어섰으나, 무림에 뛰어든 이후 점차 속가적인 분위기를 띠게 된 문파였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구대문파 중 가장 속가적인 색채가 강한 문파기도 했다. 실제로 그들의 무공은 공동파와 함께 구파 무학 중 수위를 다툴 만큼 실전적이었다.

실제로 척강이 구사하는 무공을 보면 다른 군병들과 달리 빠르고 직선적이었다. 같은 상황에서도 더 과격하게 상대를 쓰러트리는 수법을 쓰는 것이다.

또한 점창파의 산인들은 다들 그들이 익힌 무공을 닮았다.

빠르고 직관적이며 뒤끝이 없었다.

“내가 연호정이오만.”

패율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점창의 장로다. 예의를 더 갖추도록 해.”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맹내에서라면 그러겠소.”

“뭐?”

“나는 무림맹 산하 유군 부대의 대장이오. 점창파의 장로든 장문인이든, 직책이 없다면 허리를 굽힐 이유가 없소.”

말하는 내용은 꽤 건방진데 표정에는 여유가 넘친다. 목소리에도 고저가 없으며, 눈빛 역시 맑고 깊었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패율이 척강을 보았다.

척강의 얼굴에는 은근한 불안함이 떠올라 있었다. 사문의 어른과 본인이 몸담은 조직의 수장끼리 신경전을 벌이나 싶어서였다.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뜻밖의 반응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말이오?”

“아끼는 사질 놈이 아무런 말도 없이 들어간 부대라길래 뭐가 그리 헐렁한가 싶었지. 하나 나쁘지 않군. 한 조직의 수장이라면 그 정도 강단은 있어야지.”

무뚝뚝하기 짝이 없는 말투로 그리 말하니 이게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연호정이 척강을 보았다.

“말도 안 하고 왔냐?”

“……예.”

“혼 좀 나겠군.”

척강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연호정이 다시 패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척강을 데려가고 싶다면 조금만 기다리시오. 내성으로 돌아가 귀환 절차를 밟고 난 후…….”

“내 볼일은 사질이 아니라 자네한테 있다.”

“나한테 말이오?”

“그렇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패율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 것도 같았다. 느낌이 왔다.

하지만 의아한 점이 있었다.

‘어떻게 알고?’

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다면 굳이 자신을 찾을 이유가 없을 것이며, 모용군이 흘렸다면 그 역시 자신을 찾을 이유가 없다. 아버지께 먼저 가는 게 상식이니까.

왜지? 뭐지?

“해를 쏘는(射日) 무학에 대해 알고 있나?”

역시 예상대로였다.

연호정은 굳이 말을 돌릴 생각이 없었다.

“몽의 때문이오?”

“……!”

패율의 눈빛이 돌변했다.

“굳이 그 이름을 입에 담을 필요는 없다.”

“알겠소.”

“내가 궁금한 것은 하나뿐이다.”

“…….”

“놈의 검은 어땠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 건지 모르겠소만, 그의 검을 제대로 견식해 보진 못했소.”

“어째서? 놈과 생사결을 나누었다고 들었거늘.”

“죽고 죽이는 싸움에서는 상대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오. ‘그 무공’을 쓰는 걸 봤지만, 제대로는 보지는 못했소.”

“그 전에 제압해 버렸다, 이건가?”

“그렇소.”

“……굉장하군.”

연호정이 웃으며 묵비의 어깨를 두들겼다.

“무공을 제대로 구사하기도 전에 이 친구 화살에 쓰러졌소. 아마 이 친구가 아니었다면 꽤 힘들었을 거요.”

패율이 묵비를 보았다.

‘고수?’

연호정의 기도가 워낙 정련되어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이렇게 보니 저 여인의 기도 역시 대단했다.

“합공했다고?”

“그렇소.”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연호정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명문 정파의 인물들은 대게 합공에 부정적이었다. 상대가 비무 대상이든 악인이든, 정정당당한 일대일 승부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율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점창파는 그런 식으로 가르치지 않았다.

실전에서는 죽지 않고 생존하는 것이 진리다. 전투가 벌어졌다면 상대를 죽이는 것은 물론, 자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 최선이다.

패율은 그 실전의 묘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합공했다는 것에도 거부감을 표하지 않는 것이다.

가만히 멸사군을 둘러보던 패율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 급해서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놈에 대해서는 꼭 확인해 보고 싶었어.”

“…….”

“내일 자네 거처로 다시 찾아가지.”

연호정이 쓰게 웃었다.

“이왕이면 저녁에 와 주시오.”

패율은 대답 없이 몸을 돌렸다.

솔직함과 무례함을 넘나드는 성정이다. 아마 지닌바 무공 역시 척강보다 훨씬 더 거칠 것이다.

그렇게 먼저 걸어가던 패율이 걸음을 멈추곤 뒤를 돌아보았다.

“자네.”

“말씀하시오.”

패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어디 아픈가?”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건강하오만?”

“……그래?”

그때, 연호정은 패율의 눈이 자신의 우측 복부를 훑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보도록 하지.”

“알겠소.”

쿠구궁.

청룡대문이 열렸다.

패율이 먼저 맹으로 들어가고, 그 뒤를 멸사군이 따랐다.

연호정은 패율의 말을 떠올리며 내심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내게 뭔가를 본 건가?’

의아해서 내부를 관조하고 벽라진결은 물론 삼신기까지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흠.’

하지만 패율 정도 되는 고수가 괜히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었다.

‘뭐, 당분간 푹 쉬면서 몸 좀 추슬러 봐야지.’

넓고 긴 외성을 지나 내성으로 들어온 연호정이 외쳤다.

“귀환 절차는 내가 알아서 밟겠다. 그간 고생했어. 푹 쉬도록 해.”

연호정의 말에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

“휴가다, 휴가!”

“아, 나 벌써 쓰러질 것 같아.”

시끌벅적 난리가 났다. 연호정에게 인사를 마친 그들은 제각기 무시무시한 속도로 사라져 버렸다.

“…….”

바보처럼 눈을 끔뻑이던 연호정이 묵비를 보았다.

“같이 귀환 절차 밟으러…….”

“아버님 뵈러 갈게요.”

묵비는 그 멋들어진 신법으로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입 안이 깔깔했다. 왠지 모를 배신감이 들었다.

연호정이 팽만호를 보았다.

팽만호가 멋쩍게 웃었다.

“책임자를 왜 책임자라고 부르는지 아시죠?”

“형님이라며?”

“고생하십시오, 형님.”

“말만 형…… 저 새끼 저거, 저렇게 빨랐나.”

번개처럼 달려 나가는 팽만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던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에라이,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새끼들.”

투덜대던 연호정이 문득 제갈아연을 보았다.

제갈아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너도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마냥 호다닥 가 보지 그러냐.”

“가긴 어딜 가. 귀환 절차 밟아야지.”

“응?”

“내가 이래 봬도 멸사군의 군사잖아. 마무리는 확실하게 지어야지.”

“……이런 멋진 놈을 봤나!”

연호정이 제갈아연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가자! 싸가지 없는 애새끼들은 놔두고 창공을 향해 나아가 보자!”

“야! 이거 놔! 무거워!”

“하하! 책임감 넘치는 녀석이 있어서 다행이야. 멸사군의 미래가 아주 밝아.”

“무겁다고!”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며 무성전으로 향했다.

* * *

그날 저녁.

모처럼 파군각으로 들어와 반나절이 넘도록 수면을 취한 연호정이 인상을 쓰며 일어났다.

‘밤인가?’

창가로 들어오는 달빛이 몹시 고왔다.

여름이 지나 가을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몸이 점차 차게 식었다.

이 차가운 바람이 좋았다. 몸을 일으킨 연호정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우우우웅.

벽라진기가 일며 전신의 근육과 신경이 활발해졌다.

몸 전체를 둘러싸는 푸르른 진기는 언제나처럼 맑고 고왔다. 밤이라서 그런지, 벽라진기의 색이 유독 달빛을 닮은 듯했다.

‘좋아.’

이제는 정말 코앞이다. 벽라진결이 십 성의 경지를 뚫기 위해 저 스스로 아등바등하고 있었다.

우우웅.

안정적인 벽라진결을 바탕으로 백호기가 일었다.

“후웁.”

풍성하게 들어오는 공기 속에 대량의 자연기가 함유되어 있다.

폐장으로 들어온 백색의 진기가 전신 신경으로 뻗어 나갔다. 심장 박동이 서서히 빨라지며 이내 선명한 붉은 기운을 틔워 냈다.

푸스스스.

연호정의 호(呼)에 따라 반투명한 검은 기운이 몸 밖으로 흘러나왔다. 북흑의 현무기가 체내에 도사리고 있던 탁기를 묶어 배출한 것이다.

‘상쾌하군.’

근래 내상을 치유하기 위해 삼신기보다는 벽라진결 자체에 신경을 많이 썼다. 물론 성취를 올리기 위함이기도 했다.

오랜만에 긴 시간 동안 삼신기를 활발하게 하니, 확실히 몸이 달라지는 느낌이었다. 당장이라도 연무장으로 달려 나가 광룡부를 휘두르고 싶었다.

꾸욱.

찢어진 손바닥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깊은 수면 한 번으로 몸의 피로가 대부분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이거야 원.”

심신이 그 어느 때보다 상쾌했지만, 연호정은 씁쓸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애들 신경을 썼다지만, 그간 너무 안일했군. 반성해야겠어.”

벽라진기나 삼신기야 그럴 수 있다곤 해도, 초절정의 벽을 눈앞에 둔 지금 이 몸뚱이에 피로가 쌓이는 것도 모르고 있었단다.

흑암제 때는 그러지 않았다. 실력이나 바탕으로 하는 내공의 문제를 떠나, 그때는 철저하게 혼자 싸웠기 때문이다.

피로가 쌓이면 아무도 모르는 거처로 들어가 몇 날 며칠 동안 체력을 회복하고 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전투를 벌였고, 심하게 다치면 또 숨어서 체력을 비축했다.

혼자였기에 끊임없이 강해질 수 있었던 시절.

곰곰이 과거를 추억하던 연호정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웃기지도 않는 소리는 그만해라. 혼자든 함께든, 발전 속도가 느려진 건 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환경 차이는 분명히 있다. 하지만 연호정은 그런 걸 변명 삼으려 들지 않았다.

‘슬슬.’

연호정의 푸른 동공 속에 삼색의 빛깔이 일렁였다.

‘깨워야겠어.’

벽라진결은 십 성을 코앞에 두고 있고, 그간의 실전으로 삼신기 역시 충분한 성숙도와 분리도를 보여 주었다.

욕심 같아선 더 높은 곳에 오른 뒤 뽑아내려 했지만, 더 이상 늦어져선 안 될 것 같았다.

조금은 느슨해진 정신을 예전처럼 팽팽하게 만들 필요성을 느낀다.

‘맹에서 떠나기 전, 마지막 사신(四神)을 불러낸다.’

청룡.

동방의 신수, 생명력의 화신(化神)을 불러 온전한 사신기(四神氣)를 형성할 것이다.

‘내일은 아버지께 비무나 부탁드려 봐야지.’

귀환 절차를 밟을 때 무성전에서 아버지를 뵐 수 있었다.

하지만 봉공들의 회의는 오늘도 길었다. 슬슬 무림맹의 체계가 잡혀 가고 있지만, 아직 세세한 잔업들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음, 더 잘까?”

귀하게 얻은 휴식이다. 오늘만큼은 근심을 접어 두고 수면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연호정이 침상에 누우려 할 때였다.

“……오?”

창가 밖, 파군각 입구 쪽에서 느껴지는 맑은 기도 하나.

연호정은 곧바로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파라라락!

바람에 휘날리는 의복이 마치 날개와도 같았다.

부드럽게 착지한 연호정의 눈앞에 한 명의 사내가 서 있었다.

연호정이 묘한 눈으로 그의 몸을 훑어보았다.

“허! 반성해야겠군. 안 본 새에 놀랍도록 발전했어.”

“그런가?”

모용우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미소를 지었다.

모용군 앞에서도 보여 준 적 없는, 거리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자의 멋진 표정이었다.

“잘 지냈는가, 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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