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악명과 협명 (6)
“뭐라?”
모용군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멸사군을 휘하에 두었다고?”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모용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휘하에 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첫 출정을 함께하기로 했을 뿐입니다.”
“네가 방금 말하지 않았느냐. 멸사군을 아래로 두었다고.”
“정확히는 첫 출정에서 멸사군을 본군의 휘하로 움직여 적을 섬멸하겠다는 작전입니다. 물론…….”
모용우가 다소 심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들을 방패막이로 써 볼 생각입니다.”
“방패막이?”
“멸사군은 짧은 순간 큰 전공을 세웠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의 실력은 이미 검증되었습니다.”
모용우의 눈이 창가로 향했다.
새벽 공기가 텁텁하게 느껴졌다.
“형님께서 연 군장을 껄끄러워하시는 걸 압니다. 제가 보았을 때 그는 나쁘지 않은 사람입니다만, 위험한 사람이기도 하더군요.”
“……위험하지.”
“이번에 함께 출정하여 그의 역량을 보겠습니다. 첫 출전에서 제가 대수(大帥)가 되었으니, 그 역시 저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허어!”
“멸사군이 적을 섬멸한다면 그 역시 좋은 일입니다. 그들을 부린 사람은 저니까요. 저도 이왕이면 그들의 피해가 크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용군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첫 출정에서 탕마멸사의 대수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놈의 함정이거나 뭔가의 노림수가 있다면…….”
“그럼 즉참입니다.”
“……?!”
“수장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 군율에 따라 처리합니다. 저는 돌발 행동을 하는 부하를 용서할 생각이 없습니다.”
“혹, 녀석이 너와의 대결을 도모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제가 이기겠던데요.”
“뭐라?”
모용우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가볍게 손속을 나눠 보았습니다. 굉장한 무공이었습니다만, 부상이 제법 심한 듯했습니다.”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연호정이 부상을 입었다? 그럴 수야 있겠지만, 무공이 뛰어난 만큼 회복 속도도 빠를 것이다.
한데도 아직 회복하지 못했다면 대체 얼마나 크게 다쳤다는 것인가?
“온전한 몸 상태를 가정하더라도 제가 반 수 위, 낮게 잡아도 동수(同手)입니다.”
“그렇더냐?”
“적어도 지금은 그렇습니다. 그 연배에 그 무공, 대단하더군요.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합니다.”
모용우의 눈이 서늘해졌다.
“그래서 막아야 합니다.”
모용군은 동생의 눈빛을 보며 상당히 놀랐다. 녀석이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나 싶었던 것이다.
“화단에서 키우지 못할 꽃은 속히 뽑아 버려야 합니다. 뽑지 못할 거라면, 시간이 날 때마다 잘라 줘야지요.”
모용군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방금 모용우의 말은 과거 자신이 모용연화에게 했던 말이었다.
‘피는 못 속인다는 것인가?’
멍하니 동생을 보던 모용군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좋군.’
지난 몇 달간 막내의 성장을 보며 흐뭇했지만, 내심 녀석의 마음이 느슨해지지는 않았을까, 발톱이 무뎌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도 조금은 있었다.
오늘 이렇게 보니, 그 걱정은 기우(杞憂)에 불과했다.
모용우는 천성이 선했다. 하지만 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에는 요동의 황야를 전전하며 모든 적을 분쇄, 통합한 모용세가의 혼이 깃들어 있었다.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건 한다. 모용우의 본격적인 움직임에 모용군은 크게 흡족해했다.
“즉, 멸사군을 탕마군의 장신구로 쓰겠다는 것이렷다?”
“연 군장의 능력이 몹시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만, 휘하로 들어온 이상 저의 공훈(功勳)을 만들어 줄 장기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용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이런 방법은 선호하지 않습니다만,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지금은 바른길을 찾을 때가 아니라 빠른 길을 찾아야 할 때니까요.”
“정확하다.”
모용군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잘 보았다. 그래, 어떤 공세에도 흔들리지 않는 권력 기반을 쌓았다면 모를까, 지금은 도덕을 내려놓고 빠르게 치고 나아가야 할 때다. 너의 안목이 참으로 신통하구나.”
“아닙니다.”
“어허, 그런 안목은 쉽게 단련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모용우가 고개를 저었다.
“절강의 무역상을 상대로 써먹었던 술수의 응용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술수가 통할지는 이제부터 지켜봐야겠지요.”
“허허허.”
모용우가 어떻게 절강 무역상들을 휘어잡았는지 모용군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본가의 칼을 빌려 골치 아픈 절강 사업을 단번에 휘어잡았다고 하였다. 그 와중에 대봉공의 직위까지 얻어, 무역 연합을 완전히 수중에 넣었다고 했다.
방법을 떠올리기는 쉬워도 막상 실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즉, 모용우는 뛰어난 두뇌와 거침없는 실행력을 동시에 갖추었다는 뜻이다.
‘기대되는구나.’
이 정도 모습을 보여 주니, 연호정에게 한 방 먹어도 괜찮다는 심정이었다.
연가는 연호정이라는 패를 쥐고 흔들었지만, 이쪽에도 연호정의 대항마가 있다.
“눈에 보이는 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길게 볼 줄 아는구나. 그래, 앞으로도 그렇게 가 보도록 하자.”
“예.”
모용군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한데 무슨 수를 썼기에 통합 유군의 대수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더냐? 녀석이 순순히 네 밑으로 들어왔을 리가 없는데.”
“상대를 안심하게 했을 뿐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모용우가 쓰게 웃었다.
“두꺼운 옷을 벗길 수 있는 것은 거센 바람이 아니라 뜨거운 뙤약볕이지요. 저는 연호정과 대립한 게 아니라, 그와 손을 잡았을 뿐입니다.”
“……!!”
“이제 판이 재미있게 돌아갈 겁니다.”
* * *
다음 날.
“뭐냐?”
묵비를 본 연호정의 얼굴에 황당함이 가득했다.
수 개월간 산중 생활을 하면서도 묵비의 의관은 항상 단정했다. 군병들에게 못난 모습을 보여 주기 싫다는 이유였다.
한데 지금은?
“두피에다 잡초라도 심은 거냐? 머리카락이 왜 그렇게 뻗쳤어?”
“……으으.”
비틀거리던 묵비가 평상에 벌러덩 누웠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크게 숨을 몰아쉬니 술 냄새가 확 풍겨 왔다.
“이거 또 얼마나 처마신 거야. 야! 얼른 내공으로 주독 뽑아내.”
“안 돼요.”
“안 되긴 뭐가 안 돼.”
“아연이가 아침에 같이 해장하자고 했어요. 숙취 푸는 맛을 알려 주겠다고…….”
“염병을 쌍으로 떨고 앉아 있네. 해장할 시간에 활시위나 한 번 더 당겨.”
“약속한 걸 어떻게 해요.”
“그런 약속은 어겨도 돼! 술을 마셔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마실 것이지, 어떻게 마실 때마다 몸뚱이를 작살 내냐고.”
“아, 됐어요. 머리 울리니까 그만 떠들어요.”
연호정은 멈추지 않고 쫑알댔다.
“주도(酒道)라는 건 말이다, 기분 좋다고 무작정 퍼마시는 게 아니야.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마시는 게 잘 마시는 거지. 일례로 나를 봐라. 그렇게 마시고도 다음날이면 내공으로 주독을 뽑을 필요가 없을 만큼…….”
우다다다 쏟아 내는 단어의 폭격에 묵비는 치를 떨었다.
“아오, 됐다고요! 좀 조용히 해욧!”
“크흠.”
“내가 알아서 한다는데 왜 자꾸…….”
“커허험.”
순간 묵비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서 상체를 세웠다. 그러자 그녀 앞에는 헤벌쭉 웃는 연호정과……
“헉! 아버님!”
연위가 연신 헛기침을 터트렸다.
“술을 많이 마신 모양이다.”
“컥! 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저는 그냥…….”
그때, 연호정이 끼어들었다.
“저거 아주 긴장 풀렸다고 술이란 술은 죄다 위장에 쏟아부었나 봅니다. 아무리 휴가라도 그렇지, 자세가 글러 먹지 않았습니까?”
묵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연위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가 묵비의 눈에는 무척이나 떨떠름해 보였다.
“수 개월간 적과 싸웠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냐. 충분히 이해한다.”
“아, 아버님! 그게 아니라…….”
연호정이 또다시 얄밉게 끼어들었다.
“그래도 저러면 안 되죠. 습관이라는 게 저렇게 생기는 겁니다. 못된 습관 들기 전에 혼쭐을 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연위가 또 한 번 헛기침을 했다.
딴에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는 유독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술을 마시는 건 좋다만, 과음은 몸에 해로운 법이다. 나는 네가 건강을 해칠까 두렵구나.”
“컥!”
서둘러 머리를 정리한 묵비가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죄, 죄송합니다! 저 이만 들어가 볼게요!”
“그래, 들어가서 좀 더 쉬거라. 그간의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네!”
후다닥 사라지는 묵비를 보며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해장 끝났네.”
한 방에 술이 깼을 것이다. 연호정은 사악한 얼굴로 킥킥거렸다.
연위가 입맛을 다셨다.
“아직 비아가 날 많이 어려워하는구나.”
“덕분에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비아를 너무 놀리지 말거라. 착한 아이다.”
“착하니까 놀리는 맛이 있지요. 아침밥 안 먹어도 되겠어요.”
연위는 못 말린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나저나.”
그가 연호정의 몸을 위아래로 살폈다.
“크게 다치지 않고 돌아왔구나.”
무성전에서는 봉공회의가 진행 중이라 눈빛만 교환한 게 전부였다. 귀맹 후, 처음으로 아버지와 독대하는 자리였다.
연호정은 그 자리에서 절을 올렸다.
“다녀왔습니다.”
“오냐.”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푹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연호정의 안색은 며칠 전보다 훨씬 밝아져 있었다.
“강행군이 너무 심했던 것 아니냐? 듣기로 군병들이 제대로 된 실전을 겪어 보지 않아 고심했다고 들었는데.”
“실전만큼 좋은 배움의 장이 없지요. 군병들 모두 많이 발전했습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어지간히 신경을 썼겠구나.”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군요.”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항상 조심하거라.”
“물론입니다.”
“그래.”
그게 끝이었다. 자질구레한 얘기 따위 하지 않아도 연호정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도 좀 쉬시지요. 밤새도록 회의를 하셨는데.”
“괜찮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연위는 전혀 피로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수련으로 강제로 몸을 혹사한다면 모를까, 초절정의 벽을 넘은 그에게 며칠 날을 새우는 것 정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웃으며 아버지를 보던 연호정의 얼굴에 조금씩 놀라움이 일었다.
“한데 그간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음?”
“예전과 달라지셨는데요?”
연위의 눈이 반짝였다.
“네 눈에는 보이는 모양이구나.”
“검을 뽑지도 않으셨는데 전신 가득 날 선 검기(劍氣)가 느껴집니다. 몸이 긴장한 건 아니고, 진기의 날이 바짝 선 느낌이군요.”
연호정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고작 몇 개월 만에 한 단계를 뛰어넘으신 겁니까?”
“지나치게 뛰어난 자식을 둔 부모의 비애다. 따라잡힐까 무서워 내 나름대로 열심히 수련했다.”
천하의 연위가 열심히 수련했단다. 어지간해선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닌 만큼, 진정 지옥 같은 나날들을 보냈을 것이다.
“대단하십니다.”
세상 모든 영역이 그러하듯, 무공 역시 고수가 될수록 한 걸음 나아가기가 힘들어진다.
연위는 육대세가 가주 중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무공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가 몇 달 만에 경지를 끌어올렸으니, 이는 보통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물끄러미 아들을 보던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담소를 나누기 전에, 한참 날카로워졌을 게 분명한 네 무공을 보고 싶다만 어떠냐?”
연호정이 씨익 웃었다.
우우웅.
한 형제와도 같은 신공의 냄새를 맡았음인가? 벽라진기가 잔뜩 흥분하여 저절로 운용되는 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부탁드릴까 했습니다.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