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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61화 (161/963)

161화. 암투(暗鬪)의 본질 (1)

“음? 옥청 도우?”

“아…… 오랜만이오.”

“오랜만이긴 뭐가 오랜만이오? 고작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그렇소……?”

여국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표정이 왜 그렇게 떨떠름하시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소?”

“없소.”

창백하게 질린 안색에 손까지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이 압권이었다. 대놓고 무슨 일이 있는 게 분명한 모습인지라, 오히려 진짜 별일이 없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뭔 일이오? 아니, 그나저나 옥청 도우도 들었소? 연 군장이 무종지벽을 돌파했다는 것 말이오. 허! 대단한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인제 보니 숫제 괴물이 따로 없…….”

“…….”

“으음, 많이 피곤하신 모양이구려. 들어가서 좀 쉬시오.”

“……나는 쉴 자격이 없는 놈이오.”

이건 또 뭔 소리야?

어지간하면 남의 일에 신경 쓰지 않는 여국이었지만, 옥청의 표정이 너무 심상치가 않았다.

여국이 물었다.

“말해 보시오. 무슨 일이오?”

“아무래도…….”

“아무래도?”

결국 옥청이 거나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멸사군엔 괜히 들어온 듯하오.”

“으잉?”

여국은 깜짝 놀라서 옥청을 보았다.

순하고 무던해 보이지만, 멸사군에서 옥청만큼 열정적인 사람은 몇 없었다. 무공 단련은 물론 임무의 집중도까지.

실력과는 별개로 참 열심히 하는 사람인데, 뜬금없이 이게 무슨 말인가?

옥청이 이마를 짚었다.

“안 되겠소. 군장님께 가 봐야겠소.”

“무슨…….”

“나중에 봅시다.”

그 말을 끝으로 옥청이 후다닥 달려 나갔다. 방향은 육대세가의 거처 중 파군각이 있는 방향이었다.

여국은 입맛을 다셨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 * *

승현진인의 눈에는 문지기고 뭐고,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파군각 대문을 부수고 들어갈 기세였다.

결국 연호정이 나섰다.

“자네가?”

“멸사군장입니다. 무당 장문인을 뵙습니다.”

연호정이 깍듯하게 포권을 취했다.

벌겋게 상기되었던 승현진인의 얼굴이 어느새 제빛을 되찾았다. 당사자를 보니 마음이 진정된 것이다.

‘음.’

침착함을 되찾고 흥분을 가라앉히니, 연호정이라는 청년에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

승현진인의 눈이 커졌다.

“허어.”

연호정이 담담하게 물었다.

“어인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마음 같아선 축객령을 내리고 싶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승현진인은 옥청의 사형이자 당대 무당파를 이끄는 거인이었다. 결정적으로, 아버지와 같은 무림맹 봉공이기도 했다.

정도 이상의 갈등이 생긴다면 모를까,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 했다.

“자네가 연 군장이라고?”

“그렇습니다.”

“허어, 허어.”

감탄인지 탄식인지 모를 기묘한 소리만 내던 승현진인이 이내 입을 열었다.

“반갑네. 당대 무당의 장문(掌門)이 나일세. 승현이라는 도호를 쓰고 있네.”

“알고 있습니다.”

예의와 절도가 있는 언행이었다.

와중에 묘한 여유가 묻어났다. 맑은 눈빛과 자연스레 늘어트린 자세가 몹시 유연해 보였다.

승현진인은 내심 당황했다.

‘휴식을 취해서 그런가? 아니면 무공 경지가 상승했기 때문인가…….’

훨씬 사람 냄새가 난다.

복귀 신고를 할 때, 무성전에서 스치듯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연호정에게서는 강한 살기가 느껴졌다. 무수히 많은 적을 격파하며 알게 모르게 살심(殺心)이 깃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저토록 깊고 맑은 눈빛은 실로 오랜만에 보는군.’

도교의 성지라는 무당산에도 저리 깨끗한 눈을 가진 자는 많지 않다.

승현진인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어색하게 서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연호정만큼은 아니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굉장한 고수였고, 특히나 눈빛은 연호정 이상으로 맑았다.

‘저 친구가 멸사군의 부장이라고 했던가.’

열이 뻗쳐 무턱대고 찾아오긴 했는데, 눈빛 맑은 남녀를 보니 어느새 평정심이 돌아왔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으음.”

할 말이 잔뜩 있었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쉬이 입이 열리지 않는다.

결국 승현진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혹, 차 한잔 얻어 마실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들어오시지요.”

잠시 후, 연호정의 방에서 두 사람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이제 할 말을 해야겠다. 승현진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옥청 사제 때문에 왔네.”

“옥청이요?”

“그렇다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옥청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있다고 생각하네.”

승현진인의 눈이 깊어졌다.

“오랜만에 사제의 무공을 봐주었지. 놀랍도록 변했더군. 무당 무공의 진결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네. 과거 철저하게 형(形)의 연마로 구도(求道)의 길을 걸었던 사제에게서, 어느새 무인의 냄새가 풍겼더랬네.”

“좋은 일이로군요.”

“그래, 좋은 일이지. 거기서 끝이었다면.”

그제야 연호정은 승현진인이 하고픈 얘기를 알 수 있었다.

“무공에 깃든 살기 때문에 그러시는군요.”

“그렇다네.”

승현진인의 얼굴이 어느새 잔뜩 굳어졌다.

“단순한 변화가 아니었네. 일초, 일초가 상대의 맥을 파열하고 사혈을 노리는 극단적인 살법(殺法)이었어.”

“그렇겠지요.”

묘한 대답이다.

그 대답은 마치, 당연히 그리 변할 줄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렸다.

승현진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그러한 살기 넘치는 무공이 몸에 붙었음에도 무당 무공의 본질을 잃지 않아 다행이네. 다만 도고일척(道高一尺)이면 마고일장(魔高一丈)이라 하였지. 살기에 물든 무공을 연성하다 보면, 어느새 무당 무공 본연의 선기(仙氣)를 잃을 확률이 높을 걸세.”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이번에도 묘한 대답이었다.

승현진인의 목덜미가 슬슬 붉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담담하게 가라앉았던 열기가 다시 고개를 쳐드는 듯했다.

“나는 옥청 사제를 아네. 제아무리 지옥 같은 상황을 겪었더라도, 그러한 무공을 연성할 아이가 아니야.”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힌 게으른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천성이 선도(仙道)의 맥(脈)을 잇기에 적합할 정도로 순수하더군요.”

“그렇다네.”

잠시 말을 멈춘 승현진인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자네가 뜯어고쳤는가?”

“그렇습니다.”

예상했던 답변이었다. 하지만 이리 담백하게 말하니 오히려 이쪽에서 할 말이 없어졌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승현진인이 말했다.

“옥청 사제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분이 본문의 제일 큰 어르신이자, 만인에게 칭송받는 검선(劍仙) 사백님이라는 건 알고 있는가.”

“압니다만.”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일세. 누구에게 사사했든, 옥청 스스로가 나서서 무공을 변형시켰다면 충분히 이해했을 걸세.”

“…….”

“그러나 그 아이의 변화는 본인의 깨달음이 아닌 타인의 강압적인 가르침으로…….”

“중간에 말을 끊어서 죄송합니다만, 그래서 제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당돌한 질문이었다.

놀랍게도, 승현진인은 연호정의 말에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옥청을 빼 가겠다? 그럴 수는 없다. 옥청이 멸사군에 들어간 이상, 그의 거취를 결정할 수 있는 자는 멸사군장뿐이다. 봉공회의에서 그것을 인정했으니 승현진인이 이제 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연호정의 방식은 분명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꼭 그랬어야만 했나?”

연호정이 희미하게 웃었다.

승현진인이 곧장 말을 이었다.

“멸사군은 큰 공을 세웠네. 다 자네 덕분이며, 군병들이 힘을 쓴 결과이기도 하지. 살기 넘치는 무공이 사지(死地)에서의 생환에 더 유리하다는 것도 이해하네. 그러나…….”

“장기적으로 봤을 때, 큰 폐해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네.”

“그럼 그것은 무당의 어르신들께서 잡아 주십시오.”

“뭐라?”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사지에서의 생환에 더 유리하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 저는 녀석들에게 실전과 살법을 가르쳤습니다. 장기적인 발전을 상정하는 것은, 적어도 제 입장에선 일고의 가치도 없는 문제입니다.”

“……!”

“멸사군은 공을 세워야 했습니다. 하지만 공도 군병들이 멀쩡해야 세울 수 있는 것이지요. 나아가, 멸사군이 공을 못 세우더라도 군병들이 죽어선 안 됩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군병 대부분이 작정하고 입군(入軍)한 게 아닌 이상, 저에게는 그들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그러나 멸사군은 독립 유군이기도 한 만큼 반드시 공을 세워야 합니다. 이 모순된 상황에서, 제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군병들의 칼을 날카롭게 벼려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멸사군의 싸움을 지켜보며 그답지 않게 잔뜩 긴장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들이 진정 멸사군이라는 조직을 자신의 문파처럼, 가족처럼 여기기 전까지는.

또한, 그렇게 된 이후에도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최소한 개죽음 당하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

‘…….’

연호정을 보는 승현진인의 얼굴에 당혹감이 일었다.

‘그랬군.’

연호정에게 여러모로 따지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연호정의 확고한 대답은 승현진인 자신을 돌아보게 하였다.

‘연 군장은 연 군장 나름대로 휘하 군병들을 아끼고 있다는 뜻인가.’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 당연함을, 고작 옥청의 무공이 지나치게 살벌해졌다는 이유로 씩씩대며 달려와 꾸짖으려 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무당파 장문인이라는 자리는 무공이 강하다고 거머쥘 수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승현진인은 솔직하게 말했다.

“무당을 이끄는 사람답지 않게 멀리도, 넓게도, 깊게도 보지 못했구먼.”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포권한 채 고개를 숙였다.

“내 달리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자네 역시 장고 끝에 내린 선택이었을 터, 나의 무지(無知)로 인해 큰 실례를 범했어. 이렇게 사과하겠네.”

감히 가볍게 받을 인사가 아니다. 연호정 역시 일어나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충분히 걱정하실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승현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빈말처럼 들릴 법한 말에도 강한 진심이 깃들어 있다. 그만큼 상대에게 신경을 쓴다는 뜻이리라.

“옥청은 좋은 아이일세. 그 나이를 먹도록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어렵지. 해서 본문의 모든 도사가 옥청을 아낀다네.”

막내 사제에 대한 강한 애정이 눈을 흐리게 했다는 뜻이리라.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훗날 멸사군이 해체되는 날이 온다면, 옥청에게 가르친 살법은 최대한 거두어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나야 고맙지. 어떤 방법으로 그런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승현진인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자칫 잘못했다간 관계가 틀어졌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나 연호정의 강단 넘치는 대응과 승현진인의 유연함이 관계를 되레 탄탄하게 만들었다.

인간관계란 다 그런 것이다. 한발 물러설 때와 밀고 나가야 할 때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하며, 스스로의 언행을 되돌아볼 줄도 알아야 한다.

‘좋은 사람이다.’

연호정은 승현진인에게 은근한 호감을 느꼈다.

본디 자기 사람을 챙길 줄 아는 사람도 좋아하고, 우직한 현인(賢人)도 좋아한다. 승현진인은 그 두 가지 특성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들 품에서 컸으니, 옥청도 엇나가지는 않겠군.’

그때였다.

“그나저나 자네.”

“말씀하십시오.”

“옥청의 권수(拳手)와 검장(劍掌) 속 극도로 세밀한 식(式)에까지 영향을 줄 정도라면, 무당의 무공에 제법 정통해야 가능한 일이거늘.”

“……아, 그게요.”

“말해 보게.”

승현진인이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얼마나 훔쳐 갔나?”

대화의 주도권이 역전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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