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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167화 (167/963)

167화. 매듭을 짓다 (1)

휴식을 취할 겸 거처로 돌아온 연위는 비틀거리며 마당으로 나온 묵비를 보았다.

연위의 눈이 커졌다.

“비아야.”

“헉! 아, 아버님 오셨어요?”

“그래. 한데……?”

스륵.

연위가 순식간에 묵비 앞에 나타났다.

그녀의 맥문을 쥐고 살피던 연위의 얼굴이 일순 차가워졌다.

“누구냐?”

“네?”

“대체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냔 말이다. 내상이 보통 심한 게 아니다.”

“아, 이거는…….”

묵비가 떠듬떠듬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연위가 혀를 찼다.

“위험천만한 수련을 했구나.”

“그, 그런가요.”

“진기를 역류시키고 기존의 호흡법까지 뒤틀어 공격을 시도한다……. 말은 쉽지만, 필살(必殺)을 위한 단 한 번의 공격에 혼(魂)을 싣기란 결코 쉽지 않지.”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무의식적으로 위기를 느끼기 힘든 일상에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네 집중력이 참으로 놀랍구나.”

내가고수는 저마다의 호흡으로 내공을 안정시키고 신체의 움직임을 최적화한다.

말하자면 심기체(心氣體)의 일체화다. 이는 곧 정기신(精氣神)의 완전한 호응을 위한 준비 단계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한 구조를 억지로 일그러트려 극한의 무공을 구현했으니, 몸이 망가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묵비의 경지가 높았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더 위험했을 것이다.

물론 경지가 상승하면 굳이 그런 수련을 할 필요도 없지만.

“네 내력의 근본이 되는 심법이 무엇이라 하였지?”

“활궁강현법(活弓鋼絃法)이요.”

“그래, 그 심법은 분명 철저한 동공(動功) 위주라 들었다.”

“맞습니다.”

묵비가 어색한 얼굴로 한 발 움직였다.

“그래서 운공도 할 겸 이렇게 나왔어요.”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좋지 않다.”

“네?”

“이전에는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상을 입었을 때 동공 수련은 효율적이라고 볼 수 없다. 혹, 좌공 수련이 가능한 심법은 익히지 않았느냐?”

“아! 하나 익혔어요.”

홍천기.

폭발적인 내력 증강에 초점을 맞추었기에, 당연히 늘어난 내공을 제어하는 데에도 능하다. 활궁강현법을 보조하는 심법으로는 그야말로 제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 이왕이면 좌공으로 내상을 다스리거라. 내 의원을 불러 주마.”

“헉! 그, 그러지 않으셔도 되는데…….”

“내상을 가벼이 봐선 안 된다. 특히나 호정이나 너처럼 실전에 투입될 일이 많은 무인들은 더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엄한 목소리 속에 은근한 걱정과 정(情)이 묻어 나왔다.

‘…….’

왜일까.

이렇게 심한 내상을 입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걸까? 그래서 괜스레 마음이 싱숭생숭해진 걸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질문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아버님.”

“왜 그러느냐?”

묵비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제게 왜 이렇게 잘해 주시는 건가요?”

꽤 당돌한 질문이었다.

연위가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아들의 친구가 아니더냐. 전에 말했듯, 호정이 친구를 데려온 건 네가 처음이었다.”

묵비는 그게 의문이었다.

그녀는 이제 세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특히나 이 무림이라는 세상에선 누군가를 이유 없이 믿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 없다.

한데 아들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잘해 준단다.

연위는 육대세가의 일익으로 꼽히는 연가의 가주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그런 낭만적인 이유만으로 제게 잘해 준다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혹시라도 제가 세작일지도 모르잖아요. 예전에 모용세가에서 보낸 세작 같은…….”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점점 미소를 짓는 것이 익숙해지는 것 같다. 묵비는 연위의 미소를 보며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을 느꼈다.

“세상 어떤 세작이 너처럼 어설프다더냐?”

“……윽.”

“호정과 함께 모용가의 세작을 색출하면서, 내가 무엇을 배웠는지 아느냐?”

“…….”

“진심은 훈련을 통해 연마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세작을 색출하기 어려운 이유는 상대의 진심을 읽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

“너는 나를 어려워하지?”

“네? 아! 그, 그건…….”

“왜 어려워하는지 안다. 다만, 나는 너를 불편하게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리고 그 마음을 네게 호소하거나 강요할 생각도 없다.”

“……!”

“네가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나의 진심을 알아줄 때가, 언젠가는 오지 않겠느냐?”

묵비는 괜스레 울컥하는 걸 느꼈다.

“저는…… 아버님을 믿습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아들의 친구라고 하지만, 연위는 어느덧 묵비를 딸처럼 여기고 있었다. 아들만 둘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묵비의 성품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었다.

묵비는 순수하다. 세상을 겪으며 그 순수함을 제법 잃었지만, 타고난 천성 자체가 순하다. 그 순함은 어떤 의미론 둘째의 그것보다도 더 인상적이었다.

“그보다 호정은 어디에 있느냐?”

“아! 연 공자는 약속이 있다고 잠시 나갔어요.”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명색이 독립 유군을 이끄는 수장이다. 이런저런 약속이 잡힐 만한 위치였다.

“일단 운공부터 하거라. 네 수준이면 사나흘 후엔 무공을 구사하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네!”

그때였다.

“실례합니다.”

연위가 고개를 돌렸다. 파군각에 누군가가 찾아온 모양이었다.

“누구신가?”

“무림맹 내성 파군각, 벽산연가의 연호정 이름으로 물건이 왔습니다.”

“물건?”

“예, 강소성에서 온 물건입니다만.”

뭐지?

연위가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한 무사가 큼직한 상자 하나를 내려놓았다.

“전달했으니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수고했네.”

연위가 상자를 들어 흔들어 보았다.

드드득. 치리링.

상자가 긁히는 소리, 그리고 자잘한 쇠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연위는 내심 갸웃거렸다.

이게 뭘까? 쇠로 만든 물건인 것 같은데 도검(刀劍) 종류는 아닌 듯했다.

그때, 묵비의 눈이 빛났다.

“혹시 그거…….”

“음?”

“할아버지께서 보내 주신 거 아닐까요?”

“할아버지?”

“아, 편 신공님이요.”

연위의 눈이 빛났다.

묵비의 얼굴에 묘한 설렘이 일었다.

“연 공자의 물건이 완성됐나 봐요.”

* * *

‘오랜만이군.’

가슴에서는 열불이 나는데 머리는 묘하게 차갑다.

‘이런 놈은 오랜만이야.’

당가의 주인에게 대접이 박하다는 둥, 술이나 내오라는 둥 배짱을 부리는 놈은 실로 오랜만이다.

아니, 처음이라 해도 무방하다. 지금껏 당관과 마주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불안해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천하에서 가장 지독하다는 사천당가의 악명을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배짱은 배짱이고, 무례는 무례다.

당관은 연호정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술을 내와라?”

“오량액으로.”

“네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일장(一掌)에 쳐 죽이지 않는 것만도 감사하게 여기지 못할망정.”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화를 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뭐라?”

“화를 내려면 오히려 내가 내야지. 제아무리 연배가 높다지만, 사람을 너무 쉽게 보시는 것 같습니다.”

기가 차는 말이었다.

당관의 눈에 살기가 맺혔다.

“이유는 저승 가서 들어도 될 것이다.”

츠츠츠츠.

연호정이 그의 좌수를 보았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운이 실로 대단했다. 독기(毒氣) 이전에 내공의 밀도 자체가 굉장했다.

저 정도 내공이면 거의 모용군에 필적할 정도였다. 괜히 사천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여전하군.’

당관의 성품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바로 그의 무공 시작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게 금관백독수(禁觀百毒手)요?”

순간 당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가만히 연호정을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이 무공을 아느냐?”

“금관백독수로 전투력을 격감시키고 철라신망(鐵羅神網)의 암기술로 휘어 감아 절명장(絶命掌)으로 목숨을 끊는다.”

“……!!”

“삼격(三擊)의 연환기를 선택한 것을 보니, 나를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생각하는 것 같소. 만만하게 봤다면 십정독장(十精毒掌)으로 일격에 끝내 버릴 생각을 했을 텐데. 안 그렇소?”

당관의 얼굴에 경악이 드리워졌다. 연호정의 말투가 미묘하게 바뀌었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놀라 버린 그였다.

“너……?!”

“당신의 무공 구현 습관을 어떻게 아느냐고?”

연호정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러니 아드님 정신 교육부터 제대로 하지 그랬소?”

“뭐?!”

“잔뜩 겁에 질려 물어보지도 않은 걸 미주알고주알 알려 주더이다.”

“……!!”

“아들을 그 지경으로 박살을 내 놨으니, 언제고 당신과 한 번은 부딪치리라고 생각했었지. 외워 두고 있길 잘했어.”

당관의 눈빛이 흔들렸다.

“양선이 말해 주었다고?”

“그럼 누가 말해 줬겠소?”

“말도 안 되는 소리! 양선이 네놈에게 그런 걸 알려 줬을 리 없다!”

“믿거나 말거나 당신 자유요. 중요한 건 내가 손님이라는 거 아니겠소?”

연호정은 어느 틈에 쓰러진 의자를 세워 앉았다.

충격으로 얼룩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던 당관이 이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 거짓말을 하는구나.”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미있는 분이군. 설마하니 내가 본인을 감시했을 거라 생각하는 걸까?”

“…….”

“여하간 술은 언제 대접해 줄 거요?”

당관의 얼굴에 혼란이 깃들었다.

‘설마 정말로?’

그는 다시 한번 연호정의 얼굴을 보았다.

‘……!’

믿을 수 없게도, 당관은 연호정의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편협하고 독랄한 성격이라 손가락질을 받을지언정, 무림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당가를 지배하는 자가 그였다. 그의 눈치는 무림의 여느 노강호 못지않았다.

그런 그의 눈에도 읽히지 않는다. 상대의 본심이.

참과 거짓 정도는 한눈에 구분해 내는 능력이, 연호정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당관이 입을 열었다.

“……진정, 양선이 말해 주었단 말이지?”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소?”

“닥쳐라! 내 질문에 확실히 대답부터 해!”

“내가 왜?”

“……?”

“나는 당신에게 따질 게 있어서 왔소이다. 취조나 당하려고 온 게 아니란 말이오.”

연호정이 나직이 투덜거렸다.

“당양선 그 머저리 같은 놈도 적반하장으로 나오더니만, 당씨들은 다 그런가?”

당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네놈, 진정 겁을 상실했느냐?”

“그럴 리가.”

“그러지 않고서야 감히 내 앞에서 그따위 방자한 태도를……!”

“댁이 뭐라고?”

“……?!”

“스스로를 몹시도 위대하게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거 자만이외다. 진짜 대단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볼 줄 알거든.”

복장을 뒤집는 언사였다.

상황이 이 정도가 되니, 당장이라도 터질 듯 치솟는 울화 뒤로 감탄이 나왔다. 지금껏 아버지를 제외하고, 이렇게까지 성질을 건드리는 놈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아아악.

당관의 몸에서 번져 나오는 살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짙어졌다.

“하나는 알겠구나.”

“음?”

“모용가주가 사람을 잘못 봤어. 거슬린다면 그냥 죽여 버리면 그만일 터, 괴물 운운하며 칭찬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연호정이 서늘하게 웃었다.

“모용가주가 당신보다 똑똑한 거지. 그 사람은 후폭풍을 걱정할 줄 알거든.”

당관 역시 차갑게 웃었다.

“독기가 약해서 그런 거겠지.”

“댁은 생각이 없어 보이는군.”

“안 그래도 죽을 이유가 차고 넘치거늘, 굳이 그렇게까지 안달하지 않아도 된다.”

“그거 재미있군. 내게도 당신을 파멸시킬 한 수가 있는데, 한번 들어 보겠소?”

“웃기지도 않는…….”

“왜 그랬소?”

“뭐?”

화르륵!

연호정의 동공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 홍요회를 시켜 우릴 죽이려 했냐고 묻고 있잖아, 이 개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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