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운명 (3)
“뭐? 습격?”
“하필 이런 때에 나타난 걸 보면 계속 저희를 주시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중원에서 정파 운운하는 놈들인 것 같은데, 정확한 정체는 모르겠습니다.”
파사륵이 인상을 찡그렸다. 푸른 눈동자 속에 짜증이 어렸다.
“강해 뵈더냐?”
“제법…… 강해 보이긴 했습니다. 숫자도 제법이고요.”
항춘은 언제나 자신을 최고라고 떠받드는 놈이다. 그게 설령 빈말이라도.
그런 놈의 입에서 상대가 강해 보인다는 말이 나왔다는 건 보통 놈이 아니라는 뜻이리라.
“옆 마을로 보낸 놈들은?”
“혹시 몰라서 애들 몇을 더 보냈습니다. 곧 합류할 겁니다.”
“잘했어.”
잘한 건 잘한 거고, 열 받는 건 열 받는 거다.
쿠웅!
파사륵의 큼직한 주먹이 창고의 돌벽을 깨부쉈다.
“어떤 개새끼들인지, 원.”
이번 해룡상단 침공은 그저 심심풀이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바로 중원 최강자 중 한 명이자, 사악하기로는 자신보다도 더한 인간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원의 최강자라 한들 어설픈 회유로 회랑단을 움직일 순 없었다. 파사륵은 눈치가 빠른 만큼이나 자존심도 강한 인물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새외 제일의 마적단 두목이라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그분’께서 중원의 강자와 연수하란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래서 중원 놈들과 손을 잡으면 안 되는 거야. 병신 같은 놈들! 잔챙이들이 따라붙었으면 미리미리 말을 해 줘야 할 거 아냐?”
항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쩌면 그들도 모르는 존재가 아닐까요?”
“당연한 거 아냐? 놈들이 설마 우리 뒤통수치겠답시고 일부러 정보를 안 줬겠어?”
배신의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하지만 파사륵은 그 인간이 절대 배신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성품을 믿어서가 아니라 상황을 믿기 때문이다. 지금 그에게는 한낱 개미만큼의 전력조차도 소중했다.
“무림맹.”
파사륵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인간이 파악하기 힘든 전력에 정파로 추정된다면, 얼마 전에 창설된 무림맹일 확률이 높다.”
엄청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빠른 두뇌 회전. 파사륵이 이끄는 회랑단이 십 년 동안 새외를 종횡무진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항춘의 얼굴이 굳어졌다.
“상대가 무림맹이라면 튀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튀어야지.”
파사륵의 얼굴이 대번에 심드렁해졌다.
“튀긴 튀어야 하는데, 퇴로가 마땅치가 않잖아? 싸움은 불가피해.”
“그, 그렇죠.”
“쩝.”
파사륵이 창고 구석을 바라보았다.
젊은 여인 십여 명이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하나같이 미색이 고운 여인들이었다.
“거 되게 아쉽네. 맛도 못 보고 찢어야 한다니.”
찢는다? 의미를 알기 힘든 말이지만, 어조에서 느껴지는 살벌함은 엄청났다.
파사륵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꼬챙이 준비해라.”
“군장님, 적의 수괴가 나옵니다.”
“안다.”
모용우의 서늘한 안광이 부서진 외단 담벽을 넘어 내단을 향했다.
쿵. 쿵. 쿵.
힘차게 발을 굴리며 다가오는 마적단.
‘잘 단련됐군.’
무공 이전에, 육체가 아주 잘 다듬어진 게 느껴진다. 철저한 단련으로 만든 육체가 아니라 무수한 실전을 겪으며 저절로 단련된 몸이다.
‘개개인의 역량은 탕마멸사보다 떨어지지만, 집단전을 벌이면 필시…….’
그때였다.
“……!!”
모용우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저, 저게 뭐야?”
“미친놈들이!”
수백의 마적이 껄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낸다. 한데 그들 뒤, 이국적인 외모의 거대한 남자 주변에 선 마적들은 제각기 일 장이 넘는 길이의 철 깃대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철 깃대 끝엔 사지가 잘린 시체들이 깃발을 대신해 매달려 있다. 꼬챙이에 꿰뚫린 것처럼.
인간의 도덕관념으로는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진패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군장님, 쓸어 버리시지요.”
탕마군 중 가장 나이가 많고 신중하다는 일 조장 진패조차 치솟는 화를 참지 못한다.
모용우는 입을 열지 않았다. 입을 열면 저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외단으로 나온 회랑단주 파사륵이 외쳤다.
“여어어!”
일순 대기가 출렁거리는 것 같다. 엄청난 울림을 담은 목소리였다.
푸르르륵.
탕마군이 탄 군마들이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투레질을 했다. 파사륵의 목소리에 담긴 기묘한 내력에 불안함을 느낀 것이다.
그때, 모용우가 대검을 들었다.
우우우우웅!
대검에서 올올이 피어오르는 건곤팔극진기가 얇게 퍼져 나가며 무형의 방벽을 만들었다.
전방위를 아우르는 진기의 장막이었다. 어지간한 깨달음과 내공으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신기(神技)였다.
푸륵!
군마들이 금세 진정했다. 익숙한 기운에 감싸이자 안정을 되찾은 것이다.
‘호오.’
파사륵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명문가의 도련님이다, 이건가?’
얼추 서른 전후로 보이는 연배다. 한데도 저리 세밀한 내공 조절을 보여 준다.
파사륵이 할 수 없는 내공 운용이었다. 그가 모용우보다 약해서가 아니라, 평생 익히고 연마해 온 무공 그 자체의 성향 차이 때문이었다.
‘천재로군.’
파사륵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껏 소위 천재라는 놈들을 수도 없이 만나 본 그였다. 그리고 그 천재들은 모두 자신의 손에 농락당한 후 비참하게 죽었다.
잘 교육 받은 명문가의 천재. 가지고 놀기 좋은 상대였다.
파아악!
단숨에 달려 나온 파사륵이 무리의 전면에 섰다.
‘흠.’
외단 입구에서 모용우를 보는 파사륵이 턱을 쓰다듬었다.
‘어설픈 천재는 아니군.’
눈빛을 보니 답이 나온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상대의 안광에는 깊은 분노와 냉정한 신중함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모용우가 입을 열었다.
“파사륵인가.”
이것 보게?
파사륵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목소리에 한 점 흔들림이 없다.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는 게 아니라 실제로 흔들리지 않는다.
화는 나지만, 마음은 고요하다는 것이다. 그 예상 밖의 면모에 파사륵은 묘한 부담을 느꼈다.
‘가지고 놀기 쉽지 않겠어.’
파사륵이 탕마군을 둘러보았다.
“허이구, 어디서 이런 잡졸 나부랭이를 끌어모았나?”
츠츠츠.
탕마군병들의 몸에서 일제히 살기가 뿜어졌다.
안 그래도 적의 무도한 짓에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기 힘들어하던 그들이었다. 거기에 모욕까지 당하니 좀처럼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택해라.”
모용우가 입을 열자 탕마군 전체가 뿜는 살기가 출렁거렸다.
“전원 무장 해제 후 항복하거나 정면으로 붙거나.”
파사륵이 피식 웃었다.
“이 잡병들을 그렇게 믿나?”
“일각의 시간을 주마.”
찌릿!
극도로 달아오른 건곤팔극진기가 모용우의 눈을 파랗게 물들였다.
파사륵처럼 선천적으로 타고난 청안(靑眼)이 아니라서 더더욱 신비롭고 무섭다. 파사륵은 순간 주먹이 움찔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항복하면 단전 폐쇄, 사지 근맥 절단 후 뇌옥에 수감되어 십 년 형을 살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항전하면 모조리 죽이겠다.”
“…….”
“어차피 너희 마적 놈들에게는 생존이 최우선 과제 아닌가? 빌어먹더라도 말이야.”
파사륵의 미소가 짙어졌다.
꽤 자극적인 도발이었다. 그 도발이 꾸민 게 아니라 진심이라서 더 무섭다.
“제안 한번 살벌하게도 하시네. 이거 뭐 무서워서 살겠어?”
파사륵이 보란 듯이 몸을 떨었다. 상대를 농락할 의도가 명백했다.
“그럼 우리도 제안 하나 할까?”
파사륵이 손을 까딱였다.
“꺄아아악!”
마적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알몸이 된 여인들이 머리채가 잡혀 끌려 나왔다.
모용우의 얼굴에 살기가 일었다.
파사륵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당장 백 리 밖으로 꺼지지 않으면 한 년씩 찢어 죽이겠다.”
“…….”
“바로 이렇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덩치 큰 마적 하나가 한 여인의 목을 잡았다.
콰드득!
이내 끔찍한 소리와 함께 여인의 목이 뽑혀 나왔다.
“으아아아!”
“꺄아악!”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마적 둘이서 목이 뽑힌 여인의 시체를 칼로 마구 난자했다.
모용우의 눈이 서서히 충혈되었다. 아무리 참으려 해도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파사륵이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본보기 삼아서 보여 준 거야. 너희가 말만 잘 들으면 저년들은 다 살려 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
“어때? 나쁘지 않은 제안이지?”
“한 번만 더 무고한 사람을 건드리면.”
푸스스스.
파사륵의 눈이 깊어졌다.
애써 막아 두었던 살기의 제방이 터져 버렸다. 쏟아져 들어오는 모용우의 살기에 파사륵은 내공이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때는 너 하나만큼은 확실히 죽이고 시작한다.”
협박에는 협박이다.
세상을 제법 거칠게 살아온 모용우도 이런 무도한 협박을 받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도 하나는 알고 있었다.
악당들의 제안과 협박은 절대로 믿어선 안 된다는 걸.
약세를 보이는 순간 끝이다. 모용우의 대응은 결코 최선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최악도 아니었다.
‘진짜로군.’
파사륵의 눈이 번뜩였다.
‘이놈은 진짜로 나부터 노릴 생각이다.’
이거 상황이 꽤 재미있게 흘러간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아니다. 파사륵이 본 모용우는 적을 섬멸하는 것보다 인질의 안전을 우선으로 두는 자였다.
그런데도 되레 협박한다? 단순히 지기 싫어서일까?
‘그럴 리가 없지.’
이놈은 그간 숱하게 봐 온 얼치기들과는 다르다.
‘믿는 바가 있는 거야.’
그간의 경험과 재빠른 눈치가 순식간에 상황을 꿰뚫어 본다.
파사륵이 외쳤다.
“주변 경계 확실히들 해라! 이놈들, 또 다른 아군이 있는 모양이다!”
사사사삭.
회랑단이 사방을 주시했다.
집단 훈련을 받진 않았는지, 진형 자체는 허술하다. 그런데도 빈틈이 없었다. 무수히 많은 경험으로 쌓아 올린 회랑단만의 전술은 사나운 야생의 늑대와 같았다.
파사륵이 또다시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봐, 애송이. 상대와 협상을 하려거든 들고 있는 패가 뭔지 들키질 말아야지.”
하늘을 보며 대소를 터트리는 파사륵을 보며, 모용우가 입을 열었다.
“반 각 남았다.”
“……?”
“반 각 후, 너희의 운명이 결정된다. 심사숙고하도록.”
“오호.”
파사륵의 푸른 눈이 번뜩였다.
“자네는 참으로 재미있는 애송이야. 그렇지 않나?”
“…….”
“내 분명 말만 잘 들으면 인질은 살려 주겠다고 했거늘,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재미없지.”
파사륵이 다시 한번 손을 까딱였다.
그때, 모용우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일갈이 튀어나왔다.
“두목이 죽는 꼴을 보고 싶다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일대를 뒤흔들었다.
“그 여자들을 건드려 봐라. 이 돼지 놈을 반으로 쪼갠 후, 너희 모두를 바다에 수장시켜 주지.”
움찔!
묵직하게 깔린 목소리에 심상치 않은 살기가 가득하다.
우우우웅.
탕마대검에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단숨에 일검을 내칠 기세였다.
여인들 주변에 선 마적들은 괜히 눈치를 살폈다. 이런 상황이야 수도 없이 겪었지만, 이번 상대의 기백은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파사륵의 얼굴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배포 하나만큼은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구만. 날 죽이겠다고? 그럴 자신은 있고?”
“궁금하면 건드려 보든지.”
“내가 원래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그러니까 해 보라 하지 않더냐.”
웃으며 모용우를 주시하던 파사륵이 외쳤다.
“한 년 잡아 찢어라!”
“탕마군 전원 돌격 준비!”
쿠르르릉.
심상치 않은 기파가 치솟았다.
마적들은 당황해서 서로를 보았다. 정말로 인질을 죽여도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파사륵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새끼들아! 너희가 언제부터 생각이란 걸 했어! 당장 찢어 죽여!”
“놈들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두목은 반드시 죽인다!”
“어서 안 죽여, 이 개새끼들아!”
“무조건 두목부터 노려라!”
살벌한 기 싸움이었다. 누구 하나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후우우우웅!
파사륵이 기어이 살기를 터트렸다. 그 살기의 방향은 휘하 마적단을 향하고 있었다.
“안 죽이면 너희부터 죽인다.”
그제야 마적 하나가 여인의 머리채를 잡았다.
모용우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전원 돌……!”
그때였다.
한 줄기 소름 끼치는 섬광이 여인의 머리칼을 틀어잡은 마적의 팔을 꿰뚫었다.
퍼어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