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운명 (4)
마적의 눈이 커졌다.
‘화살?’
화살인지 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 건 자신의 팔뚝이 날아갔다는 것과, 팔뚝을 날린 무언가가 허벅지까지 그대로 관통했다는 것이다.
“크아악!”
마적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파사륵의 눈이 흔들렸다.
“뭐야!”
그때, 무려 십여 개의 섬광이 번쩍였다.
퍼버버버벅!
쏘아진 빛줄기가 인질 주변에 선 마적들의 미간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홱 고개를 돌린 파사륵의 눈이 번뜩였다.
‘저기!’
이곳에서 직선거리로만 백오십 장은 떨어져 있는 야산이다. 그곳에서 쏘아진 화살이 정확하게 부하들을 노린 것이다.
“이건 또 뭔 개수작……!”
번쩍!
또 한 줄기 섬광이 번쩍였다.
그 섬광이 노리는 것은 바로 파사륵이었다. 종전보다 훨씬 빠르고 예리한 일격이었다.
파사륵이 본능적으로 장(掌)을 올려 쳤다.
펑!
터진 장력에 맞은 화살이 파사륵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주르륵.
파사륵의 볼에서 피가 흘렀다. 방향은 꺾였지만, 위력은 죽지 않았던 것이다.
‘강하다!’
화살을 쳐 낸 손에 묵직한 충격이 남았다.
화살에 이 정도로 내력을 실을 수 있다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자신에 비해도 전혀 모자람이 없는 실력이었다.
파사륵이 외쳤다.
“인질을 다 죽여!”
모용우가 외쳤다.
“돌격!”
쿠르르릉!
선두에 선 이백 필의 군마가 돌진을 시작했다.
그 뒤에 도열한 남은 이백 군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위에 올라타 있던 탕마군병들이 날랜 신법으로 달려들었다.
선두의 기마병을 중심으로 유연한 전투가 가능한 보병이 더해진 공세였다. 뛰어난 무공을 기반으로 재빠른 전투가 가능한, 걸출한 무림인들로 구성된 전투 부대의 전술이었다.
“우아아아아!”
죽은 마적들 뒤로 또 다른 마적들이 다가와 인질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퍼버버버벅!
인질들의 몸에 칼이 닿기도 전에 마적들이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그야말로 신기(神技)의 연환속사(連環速射)였다. 그 먼 거리에서 어떻게 이곳 상황이 정확하게 보이는 건지, 보인다 해도 어찌 백발백중의 궁술을 구사할 수 있는 건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런 제기랄!’
설마하니 숨겨 둔 한 수가 이토록 수준 높은 궁병(弓兵)일 줄은 몰랐다.
‘양동 작전이 아니라 저 궁사를 믿고 배짱을 부린 거였나?!’
처음이었다. 상대의 패를 제대로 읽지 못한 것은.
파사륵이 외쳤다.
“인질은 놔둬! 후방으로 빠져라!”
히히히힝!
그 순간, 한 마리 군마가 용음(龍吟)과도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그 어떤 기마나 보병보다도 앞서 달려 나온 자는 모용우였다. 모용우가 파사륵의 전면을 향해 짓쳐 든 것이다.
파사륵의 푸른 안광이 화염을 내뿜었다. 그 눈빛에는 분명한 당혹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모용우가 차갑게 말했다.
“네놈만큼은 반드시 죽인다고 하였다.”
탕마(蕩魔).
마(魔)를 소탕하는 군대의 대장이 직접 뱉는 말이다. 그 살벌한 목소리가 파사륵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편히 죽을 생각은 말아라.”
번쩍!
파도처럼 밀려 들어오는 검력(劍力)이 단숨에 파사륵을 쪼갤 것처럼 흉흉했다.
파사륵의 주먹에 붉은 광채가 어렸다.
콰앙!
모용우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마적단 두목이라고 너무 얕본 거 아닌가?”
강한 진각과 함께 통나무 같은 팔을 내민 파사륵.
그의 전신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붉은 기운이 몹시도 사이해 보였다.
기운은 사이했지만, 일권(一拳)에 실린 힘은 엄청났다. 모용우는 물론 모용우가 타고 있는 군마까지 뒤로 밀어 낼 정도였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애송이.”
파악!
파사륵이 몸을 날렸다.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날랜 신법이었다. 단숨에 상단의 외단을 가로지르는데, 마치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파사륵이 외쳤다.
“뭣들 하고 있냐! 북쪽 벽을 허물어! 산길로 간다!”
그때였다.
파아아아악!
파사륵은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한 줄기 그림자가 그의 등 뒤까지 따라붙은 것이다.
“분명히 말했을 것이다.”
군마에서 뛰어내려 순식간에 파사륵에게로 따라붙은 모용우가 대검을 높이 쳐들었다.
“너는 이곳에서 죽는다.”
“이 애송이가!”
번쩍! 콰앙!
두 사람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파사륵의 몸에 부딪힌 마적들이 우르르 쓰러졌다. 건물 벽에 파묻힌 모용우는 재빨리 빠져나와 돌진했다.
순간 그의 눈에 인질들이 보였다. 알몸이 되어 벌벌 떠는 그녀들의 얼굴은 극도로 창백해져 있었다.
‘지켜 줄 것이다.’
철컹! 철컹!
모용우는 견갑과 비구(臂具)를 떼고 장포를 벗어 여인들에게 날렸다. 진기가 가득 실린 장포가 펄럭이며 여인들 앞에 떨어졌다.
‘저들은 묵 부장이 지켜 줄 거야.’
신호를 주기 전까지 절대 화살을 날리지 말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묵비는 상관의 명을 어긴 셈이다.
하지만 모용우는 그녀를 책잡을 생각이 없었다.
참으로 아슬아슬했던 상황이다. 계획도 없이 나서서 난전이 벌어졌지만, 그 덕에 인질이 살았으니 오히려 이쪽에서 고마움을 표해야 할 일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싸움뿐이다.
쾅!
강하게 진각을 밟은 모용우가 힘차게 장력을 날렸다.
파사륵의 눈이 번뜩였다.
퍼어엉!
강력한 장력에 마적 하나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파사륵이 부하를 던져 방패막이로 삼은 것이다.
기가 막힌 짓이지만, 모용우는 놀라지 않았다. 죄 없는 여인을 산 채로 목을 뽑아 죽인 미친놈이다. 어떤 만행을 저질러도 놀랍지 않다.
파바바박!
파사륵이 이를 갈았다.
신들린 보법으로 거리를 좁힌 모용우의 움직임은 실전적이진 않아도 몹시 절묘했다. 후방이나 좌우로 빠질 여지를 완벽하게 차단하는 신기(神技)의 몸놀림이었다.
지금은 부딪칠 수밖에 없겠다. 그리고 이왕이면 속전속결로 끝내는 것이 옳다.
쿠구구궁.
파사륵의 몸에서 또다시 검붉은 기운이 치솟았다. 서장 소뢰음사의 절기인 수미역불공(須彌逆佛功)을 끌어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에 맞서.
모용우 역시 최강의 검법, 건곤백팔검해(乾坤百八劍解)의 유장한 검력을 풀어 냈다.
두 사람의 검권(劍拳)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쩌저저저정!
수장들끼리의 거친 승부가 시작될 때, 탕마군 전원이 외단을 허물고 들어왔다.
퍼어억! 퍼억!
마적들이 하나둘씩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난전의 상황이었다. 하나로 똘똘 뭉쳤다면 모를까, 이런 상황에선 개개인의 무력이 높은 탕마군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회랑단도 만만치는 않았다.
퍼어어억!
“컥!”
군병 하나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절묘하게 날린 단창(短槍)에 가슴이 꿰뚫린 것이다.
탕마군의 첫 사상자였다. 임무를 하다 보면 사상자가 나는 거야 어쩔 수 없다지만, 시기가 너무 빨랐다.
마적 하나가 외쳤다.
“하나로 뭉쳐라! 이놈들, 오합지졸이다!”
“우아아아!”
마적들은 단순하다. 온갖 사선을 넘나들며 경험을 쌓은 일당백의 전사들이지만, 그들의 본질은 결국 마적에 불과하다.
그래서 더 무섭다.
상대가 오합지졸이라는 말에 회랑단의 기세가 완전히 돌변했다. 그들의 단순함은, 이런 상황에선 절정의 무공 못지않은 장점이 되었다.
콰아아앙!
놀라운 광경이었다.
상단의 외벽을 깨부수며 돌진한 덩치 큰 마적들이 몸통 박치기로 기마들을 밀어붙였다.
타고난 신력(神力)에 새외의 무공까지 익힌 그들의 힘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가 따로 없었다. 흔히 기마의 힘은 보병의 열 배라고들 하는데, 그들 앞에선 그러한 수치 놀음 따위는 무의미했다.
“죽여! 죽여라!”
“크아아악!”
처음에는 밀렸던 회랑단이, 이제는 점차 탕마군과 그럴듯하게 맞서기 시작했다.
아니, 오히려 서서히 압도하고 있었다.
퍼억! 퍼어억! 빠각!
탕마군의 기마병 십여 기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서걱! 푹! 푹!
쓰러진 기마의 목을 베어 버리고, 그 위에 탔던 군병들의 몸통에 창을 박아 넣는다.
움직이고 싶어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다. 탕마군 전원이 강호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는 이들이었지만, 이처럼 집단 대 집단의 싸움을 겪은 적은 없었다.
훈련과 경험 없이는 개인의 뛰어난 무(武)를 절반도 활용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집단전, 전쟁이라는 것이다.
콰아앙!
대검의 검날을 세워 막았지만 파사륵의 주먹은 멀쩡했다.
강철의 순도를 자랑하는 권법이었다. 주먹 자체의 강도도 놀라웠지만, 그 주먹을 감싸고 있는 사이한 기운이 자아내는 파괴력도 대단했다.
‘이래서는 안 돼.’
치리리리링! 퍼억!
파사륵이 주춤거리며 삼 보(三步) 뒤로 물러났다.
힘이 온전히 실리진 않았다지만, 각법으로 복부를 후려쳤는데도 고작 세 걸음 물러난 게 전부다. 절정의 외공(外功)이라도 익혔는지, 방어력이 엄청났다.
‘이대로 진행되어선 안 된다.’
쩌어어어엉!
그대로 내리친 대검이 파사륵의 팔뚝을 베어 냈다.
베었지만, 피육에 불과했다. 검날이 닿음과 동시에 팔을 틀어 절단상을 면한 것이다.
머리가 아닌 본능의 영역까지 단련된 실전 박투술이었다. 고작 마적단 두목의 실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대단했다.
‘기습의 이점은 충분히 얻었다. 이제는 물러나야 할 때야.’
무시할 수 없는 상대와 겨루면서도 전장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 낸다.
다만 조금 늦었다. 제때 그것을 보았다면 탕마군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첫 출정에 신들린 판단을 내릴 수는 없는 노릇, 이 정도만 해도 모용우의 재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건 분명했다.
모용우가 외쳤다.
“진 조장! 병력을 후방으로 빼!”
한참 마적들을 도륙하던 진패가 눈을 빛냈다.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이 미친놈들을 모조리 소탕하고 싶었다.
하지만 군장의 명령이었다.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장들 전원이 아닌 자신에게만 저 명령을 내린 것은, 반드시 명을 따를 것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탕마군 전원 후퇴하라!”
치리리리링!
힘차게 마적들을 몰아붙이던 군병들이 열기 가득한 눈으로 진패를 보았다.
“하지만 조장님!”
“군장님의 명령이다! 당장 물러나!”
규벽이 이를 악물었다.
“이 조 전원 후퇴하라!”
군병들이 주춤거렸다.
이번에도 늦었다. 모용우의 판단이 다소 늦었지만 확실했다면, 군병들은 상관의 명령에 즉각 반응하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상관의 명령이 절대적이라는 것도 알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무림인 특유의 자존심이 그들의 반응을 한 박자 늦추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상당히 끔찍했다.
퍼버버버벅!
절호의 시기를 노리고 있던 마적들의 화살이 탕마군 이 조의 기마병들에게 퍼부어졌다.
퍼버버벅! 히히히힝!
절반이 넘는 화살을 막아 냈지만, 나머지는 막지 못했다. 기마병 삼십여 기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안 돼!”
“후퇴! 후퇴해!”
그제야 빠지는 속도가 빨라졌다.
하지만 회랑단은 집요했다. 그들은 의도치 않은 후퇴가 적의 사기를 왕창 깎아 먹는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카가가가강!
파사륵이 모용군의 대검을 잡았다.
손바닥이 베여 피가 흘렀지만, 수미역불공의 강력한 힘 덕에 뼈까지 베이진 않았다.
“어떠냐, 애송이.”
파사륵이 하얗게 웃었다.
“누가 누굴 죽이겠다고?”
“……역시 뜻대로 되지 않는군.”
“크하하하! 그걸 이제 알았더냐?”
후욱!
강력한 힘이 모용우를 더더욱 밀어붙였다. 힘에 있어선 명백히 파사륵이 한 수 위였다.
“간만에 재미있었어. 잘 가시게, 애송이 대장.”
그때였다.
빠각!
“컥!”
파사륵이 코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이, 이 개자식이 지금 뭘……?!”
“막 나가자는 거지.”
모용우가 이마를 훔쳤다. 박치기로 파사륵의 콧대를 분질러 버린 것이다.
“이제 부하들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으니, 지금까지의 나와는 다를 것이다.”
“개새끼가 뭐라는 것이냐!”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남쪽 야산의 나무들이 모조리 터져 나갔다. 바위며, 나무며 무차별로 쓰러트리면서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파사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모용우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너희는 오늘, 이곳에서 잡는다.”
크허허헝!!
성난 포효와 함께 백색의 폭풍이 외단의 남쪽 담벼락을 깨부수며 치고 들어왔다.
멸사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