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183화 (183/963)

183화. 실은 끊어지지 않았다 (1)

“양천이라.”

가득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사실 그에 대해선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저희 꼰대가…….”

“…….”

“아니, 사부님이 양천에 대해 조사하려고 이것저것 시도를 많이 하시긴 했거든요? 근데요, 지금까지 제대로 알아낸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가?”

“예. 별호 투왕(鬪王). 이름은 양천이고, 나이는 올해 예순셋으로 추정.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어찌나 기력이 좋은지, 지금까지도 박투술에 있어선 중원제일을 논할 정도랍니다.”

“별호부터가 이미 투왕이니까. 그의 싸움은 정사양도(正邪兩道) 누구라도 감탄할 만큼 호쾌하고 절묘하다고 들었네.”

“예. 하지만 성품이 독하고 잔혹해서, 한번 원한을 지면 중원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작살을 낸다고 합니다.”

“당가와 비슷하군.”

“사실, 어떤 면에서는 더 깐깐하죠. 그만한 고수가 홀로 쫓아가서 죽을 때까지 두들겨 팬다지 않습니까.”

“음? 그게 왜 더 깐깐한가?”

“나잇살 처먹고 그러기도 쉽지 않으니까요.”

제갈문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후개 가득상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무공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두뇌만큼은 개방의 후계자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한 번씩 이렇게 걸걸한 농담이 날아올 때면 당황스럽기도 하다.

물론 그 농담에는 뼈가 있었다. 가득상의 말을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이유였다.

“어찌 되었든, 그에 관한 정보는 이게 전부입니다. 사문은 어딘지, 흑도에 몸을 담은 이유는 뭔지, 집은 어디인지, 형제자매는 있는지 무엇 하나 알려진 게 없어요.”

“제자들에 관한 건 알려졌잖나? 무공의 명칭도.”

“아! 그건 그렇죠. 한데요, 보아하니 제자들에게도 온전한 무공 전수는 하지 않은 모양인데요?”

“그런가?”

“예. 중원에 모습을 드러낸 제자들이 저마다 다른 무공을 구사했다고 합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였다.

“즉, 자신의 무공을 전수하지 않았거나 혹은 자신의 무공을 분해해서 따로 전수했거나?”

“정확하십니다. 후자에 가깝다고 생각하고는 있습니다만, 그것도 확실하진 않아요.”

제갈문호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성천십삼좌 중 알려진 게 가장 적은 자라…….”

“생각해 보면 이상하긴 하지요. 무림인에게 명성은 목숨과도 같은 건데, 그 인간은 그 대단한 무공을 갖고도 중원에 나서길 꺼리고 있잖습니까.”

“그만큼 철두철미한 성격이라고 봐도 되겠지. 자신에 대해 잘 알려질수록 약점도 늘어나는 법이니까.”

“물론 그렇습니다만, 이미 투왕의 칭호까지 받은 사람인데요.”

“그래서 더더욱 몸을 사릴 수도 있다고 보네.”

“음, 생각해 보니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요.”

가득상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 투왕이, 지금은 보란 듯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모자라 제자들까지 풀어 버렸네요.”

“뭔가 노리는 게 있는 것이지.”

“대체 무엇을 노리는 걸까요? 의도를 모르니 방도들을 파견하기도 애매해서요.”

“흑도 최고의 고수가, 하필이면 무림맹이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냈네. 냄새가 나도 보통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게 아니야.”

“어떻게 할까요? 제대로 파 볼까요?”

제갈문호는 고심했다.

‘흑도라.’

사실상 흑도는 삼백 년 전 혈교지란 이후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말이 흑도고 사파지, 결국 그들의 생존 원리는 돈과 배신이다. 살아남은 자만이 강자라고 인정받는 약육강식의 세계인 것이다.

의와 협, 도덕과 윤리, 이상과 선(善)을 추구하는 백도 정파와는 뿌리부터가 다르다.

어떤 의미로 그들은, 인간 세상의 가장 원초적인 생존 원리가 적나라하게 뿌리내린 곳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뭐가 되었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지. 성천십삼좌는 이름부터가 전설이야. 그중 대부분이 전대의 고수들이며, 실제 활동을 하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하네.”

“그렇습니다.”

“성천십삼좌의 별칭은 무신(武神)일세. 그들 개개인의 힘은 구파일방, 육대세가급 문파를 홀로 담당할 수 있을 만큼 막강하지.”

제갈문호의 눈빛에 짙은 긴장이 깃들었다.

“양천은 바로 그런 괴물 중 하나야. 그가 흑도를 규합하면, 천하는 또다시 혼란 가득한 늪지대로 빠지게 되네.”

“결국 알아볼 수밖에 없겠네요.”

“그렇다네.”

가득상이 인상을 찡그렸다.

“거기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정보원들의 목숨.”

“그건 당연한 거고요.”

“음?”

“저희 방도 애들을 보내든 무림맹 소속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보내든, 일단 걸리기만 하면 절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 양반 성격이 워낙 지랄맞으니까요.”

“맞는 말일세.”

“어차피 저희도 목숨 내놓고 일하는 놈들이니 그거야 감수할 수 있지만, 문제는 양천의 반응입니다.”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였다.

“무림맹 소속원으로 보낸다면, 양천이 더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도 있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가득상이 탁자 위에 펼쳐져 있던 지도를 두들겼다.

“그쪽 역시 우리가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겠지요. 충분히 조심하고 있을 겁니다. 다만 우리 쪽에서 본격적으로 견제에 들어갔다, 너 조심해야 할 거다, 같은 인상을 줘선 안 됩니다.”

제갈문호 역시 가득상의 말에 동의했다.

상대는 다름 아닌 투왕 양천이다. 만일 그가 작정하고 숨는다면 찾아낼 만한 사람이 없고, 반대로 작정하고 움직인다 한들 막아 낼 사람도 몇 없다. 여러모로 건드리기 힘든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지간히 배포 좋은 가득상이 이렇게 조심하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제갈문호가 탄식했다.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군. 한 개인의 힘이 너무 뛰어나도 문제야.”

“그렇죠. 그렇다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도 없고, 참 머리 아프게 됐습니다.”

그때였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연위가 입을 열었다.

“결국, 당장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라는 것이군.”

제갈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음.”

제갈문호의 얼굴에 은근한 기대감이 어렸다.

턱을 잡고 고민하는 연위. 무뚝뚝한 그의 얼굴에 일순 묘한 빛이 떠올랐다.

제갈문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달리 생각이 있으신지요?”

연위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자신이나 가득상처럼 대국 전체를 살피는 데에 능하진 않지만, 번뜩이는 기지로 몇 번이나 난국을 헤쳐 온 전적이 있는 사람이다.

천만다행히도, 이번 역시 연위는 제갈문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지나치게 파격적이라 문제였지만.

“제갈가주의 지혜야 말할 것도 없고, 후개 역시 몹시 똑똑한 사람이오. 하지만 그런 둘이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는구려.”

“부끄럽습니다.”

“그렇다면, 머리를 더 모아 봐야 하지 않겠소?”

제갈문호와 가득상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머리를 더 모아야 한다는 말씀은……?”

“이런 골치 아픈 일을 파격적인 접근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자. 무림의 사정에 밝고, 어떤 의미로는 현재 무림맹에서 가장 위험하다고도 할 수 있는 사람.”

전혀 다른 사람이겠지만, 제갈문호는 문득 연호정을 떠올렸다.

연호정은 연위의 말에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무공 이전에 정치에 능하고 눈치도 빨랐으며, 파격적인 술수로 판을 제 입맛대로 바꾸는 역량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놀라운 능력을 지닌 자가 이제 약관에 이른 청년이라는 게 기가 막힐 뿐이다. 그러한 능력은, 어떤 의미론 무공보다도 무서운 힘이라 할 수 있었다.

‘음.’

제갈문호와 가득상의 시선이 부딪쳤다.

두 사람은 서로가 같은 인물을 떠올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 정도로 연호정의 활약상이 놀라웠기 때문이리라.

물론, 연위가 말하는 사람은 연호정이 아니었다.

“그 역시 무림맹의 봉공이고, 나름의 백도를 걷는 사람이오. 대외의 골치 아픈 일을 함께 고민해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소.”

“봉공이라 하심은……?”

연위의 눈이 서늘해졌다.

“모용가주외다.”

제갈문호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가득상이 다급히 말했다.

“가, 가주님. 그건 안 됩니다!”

“안 될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야심가입니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야심을 품고 있지요.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대놓고 말하자면 악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네 말이 맞네.”

“한데 어찌 모용군 그 씹새…… 죄송합니다. 모용가주에게 도움을 청하자고 하시는 겁니까?”

“능력이 되니까.”

“예?”

연위의 눈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서늘해졌다.

“그는 능력이 있는 사람일세. 물론 나 역시 어지간해선 그런 위인에게 이런 부탁을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상대는 성천십삼좌의 일좌를 차지하는 괴물이며, 나아가 천하를 혼란에 빠트릴 만한 힘을 지닌 사람일세.”

“……!”

“악으로 악을 소탕한다는 흔해 빠진 말은 않겠네. 그럴 생각도 없어. 다만 그의 생각을 들어 보고, 타당하다면 그 의견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보네.”

가득상이 제갈문호를 보았다.

“군사님. 군사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으음.”

제갈문호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드리워졌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저는 이번 연가주님의 제안에 반대합니다.”

“그렇소?”

“심정적으로는요.”

“하면?”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들어서 나쁠 게 없다면, 의견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봅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

“허허.”

제갈문호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모용군은 적이다. 같은 육대세가의 일원이자 봉공이지만, 그를 아군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생각 때문에 저도 모르게 선을 그어 두었던 모양이다.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해도 되는 것을, 사감 때문에 배제하고 있었다니.

‘나도 많이 부족하구나.’

제갈문호가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휘황찬란한 보검이든 백정의 칼이든, 재료 손질만 잘하면 요리의 질도 상승하는 법이지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모용가주의 꾀주머니를 빌려 봐야겠습니다. 함께하시겠습니까?”

“좋소.”

그때 가득상이 입을 열었다.

“한데 말입니다.”

“음?”

가득상은 여전히 불안한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그럴 거면 차라리 봉공회의를 열어 다 같이 의논하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연위와 제갈문호가 동시에 말했다.

“그건 안 되네.”

“불가하네.”

단호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가득상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물론 기가 죽어도 말은 한다.

“왜 그렇습니까?”

연위가 말했다.

“편이 갈렸으니까.”

“예?”

제갈문호가 설명을 덧붙였다.

“봉공회의를 열면 모용군과 손을 잡은 이들이 최대한 그를 지지하며 당파 싸움으로 몰고 갈 걸세.”

“아…….”

“그리고 모용군은, 당원들의 힘을 받아 본인에게 유리한 제안을 하나둘 꺼낼 테지.”

가득상이 한숨을 쉬었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제갈문호가 냉정하게 말했다.

“이번 건은 당원들끼리의 싸움으로 물을 흐려서는 안 될 사안이야. 괜히 시간만 낭비될 것이고, 나아가 감정이 상하는 사람도 나올 걸세.”

“그래선 안 되지요.”

“그렇다네. 적어도 이번 건은 말이지.”

제갈문호가 연위에게 말했다.

“가실까요.”

“그럽시다.”

연위의 안광이 칼날처럼 매서워졌다.

“긴장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이오. 그자, 이쪽에서 빈틈만 보이면 교묘한 술책을 쓸 것이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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