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고향으로 (4)
연호정의 얼굴에 작은 흥미가 일었다.
“이건 꽤 흥미진진한 상황이로군요.”
“그런가?”
패율이 미소를 지었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웃음에 흉흉한 포식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자네라면 이해할 거라 생각하는데? 내가 봤을 때, 나나 자네나 별반 다르지 않거든.”
“그렇게 보이십니까?”
“물론이지. 자네는 고루한 산인들과는 달라. 구파든 육가든, 하나같이 고고한 학처럼 살려고 하지. 그러나 자네는 거침없이 먹잇감의 살점을 물어뜯는 호랑이가 아니던가?”
“저를 너무 높이 보시는 겁니다.”
“자네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관심 없네. 다만 내가 보는 자네가 중요할 뿐이지.”
척강은 중간에서 괜히 안절부절못했다.
“사, 사숙님.”
그때, 연호정이 손을 들어 척강을 막았다.
어느새 그의 눈빛도 진지해졌다.
“진심이십니까?”
“음?”
“제게 패배하면 제 명령에 즉각 따르겠다는 말. 죽으라고 하면 죽는시늉이 아니라 진짜 죽어 줄 수도 있다는 말.”
패율의 얼굴이 굳어졌다.
“나 역시 젊었을 적, 강이처럼 골칫거리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지. 그러나 날 싫어하던 자들도 이것 하나는 인정했어.”
“그게 무엇입니까?”
“난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아.”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놀랍게도 그의 미소는 어딘지 패율의 미소와 닮아 보였다.
“일구이언(一口二言)하지 않는다…… 중요한 덕목이지요.”
“그래서, 마음이 좀 동하였는가?”
“승부가 고프셨습니까?”
패율이 피식 웃었다.
“역시 자네는 나와 비슷한 과야. 그게 바로 보이던가?”
“같은 부류가 아니더라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알겠던데요.”
“그런가.”
“정 그렇게 승부가 고프셨다면 아무나 잡고 비무를 벌이지 그러셨습니까? 상대의 사정을 봐줘 가면서 칼 뽑는 분은 아닌 듯한데.”
패율이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분명 난 경우가 없는 사람이지만, 이 나이 먹고 장로라는 직책까지 달고 있는 이상 문파의 품위라는 것도 아예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다네.”
“한참이나 후배 밑에 들어와 명을 받는 건 괜찮고요?”
“자네가 날 이긴다면 말이지.”
공기가 서서히 달아올랐다.
패율의 미소가 짙어졌다.
“내외상이 상당하군. 일단 치료부터 받고 나서…….”
“규칙이 있습니까?”
“음? 무슨 말인가?”
“서로의 역량을 알아보는 비무(比武)를 원하시는 겁니까? 아차 하면 목이 달아나는 실전 같은 승부를 원하시는 겁니까?”
“당연히 후자 아니겠나.”
“그렇군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전에 대한 이해가 확실하신 분이라 믿겠습니다.”
“물론이…….”
그때였다.
파아아앙!
패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느새 거리를 좁힌 연호정이 대뜸 일장(一掌)을 내치고 있었다.
묵직하게 밀고 들어오는 장법에 대기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연가의 비전무공 반룡장(反龍掌)이었다.
‘흡!’
터어엉!
탄력 넘치는 신법으로 물러난 패율이 외쳤다.
“이게 갑자기 무슨……?!”
순간 연호정이 힘차게 진각을 밟았다.
콰아앙!
내친 장법에서 쏟아져 나오는 장력이 처음보다 두 배는 더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그렇다면 막아야 하는데, 몰아치는 힘을 보면 막는 것도 벅찰 듯했다.
‘무념(無念)!’
생각이 많았다. 패율은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촤아아아악!
반룡장의 장력이 반으로 쪼개졌다.
콰앙!
쪼개진 장력이 그대로 바닥에 꽂혀 좌우의 땅거죽을 뒤집어 놓았다.
패율의 노기 어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짓인가!”
파아아악!
연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백호군림보로 강력한 위세를 발하며 접근한 그가 폭풍 같은 쌍권(雙拳)을 휘둘렀다.
패율의 눈이 커졌다.
‘엄청난 위력!’
휘어져 들어오는 주먹세례는 절묘함 그 자체였다. 그 모든 주먹질이 마치 거대한 야수의 이빨을 그리는 듯했다.
상대를 봐줄 여유가 없다. 패율의 검이 고속으로 회전하며 살벌한 검풍(劍風)을 일으켰다.
파바바바박! 쾅!
“큭!”
무식한 힘이었다.
찰나지간 펼친 탓에 본래 위력의 절반도 내지 못했다지만, 회풍무류사십팔검(回風舞柳四十八劍)은 점창파가 자랑하는 비전 검법 중 하나였다.
그 검의 위력이 뿌리부터 제약당했다. 단순히 위력을 흐트러트리는 것을 넘어 상대 무공의 맥을 짚고 파열하는 극도로 실전적인 권박이었다.
파아아앙!
갑작스러운 전개지만 당황하지 않는다. 패율의 몸이 빠르게 회전하며 순식간에 연호정의 우측 후방으로 빠져나갔다.
절묘한 몸놀림이었다. 신기막측한 보법, 점창의 축영보(縮影步)였다.
후방을 점한 패율은 단숨에 검을 내리쳤다. 목표는 연호정의 등판 중앙이었다. 상대가 검을 피해도, 막아도 중상을 입을 수밖에 없는 곳으로 검격을 때려 넣은 것이다.
그때였다.
카아아앙!
패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걸 맨손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뻗은 연호정.
그 손에 검격이 막혔다. 검격을 막은 손에서는 묘하게 어두운 청색 기운이 범람하고 있었다.
현무기였다. 현무기 특유의 반탄력에 오히려 공격을 가한 패율의 검이 뒤로 튕겨 나갈 정도였다.
파아악!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전신의 힘을 모아 회전하여 발끝을 차올리는데, 그 속도가 벼락처럼 빨랐다.
속도는 곧 힘이다. 쾌검(快劍)만큼이나 빠른 각법은 필시 위력도 엄청날 것이다.
‘맞받을 수 없다.’
피해야 한다. 막으면 밀리지만, 피하면 반격할 수 있다.
퍼어엉!
공기를 찢어발기며 쏘아진 발끝에 패율의 장포 자락이 터져 나갔다.
‘여기!’
패율의 검이 연호정의 목을 노렸다. 시기적절한 일격이었고, 절묘한 방위였다. 누구라도 피하기 힘든 검격이었다.
순간 연호정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사르르륵.
패율의 얼굴에 경악이 깃들었다.
검 끝이 허공을 뚫었다.
강한 공격은 필연코 빈틈을 낳게 마련이다. 그 틈을 노린 일격이었는데, 어느새 연호정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 어디로?!’
순간 그는 하단에서 휘어져 올라오는 섬뜩한 살기를 느꼈다.
파아아악! 퍽!
“큭!”
살기를 느낀 순간 피했지만 약간 늦었다. 낮게 치받아 날아드는 각법이 그의 허벅지에 작렬했다.
찌이이잉.
‘이런.’
허벅지에서부터 올라오는 통증이 엄청났다. 하지만 이건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한다. 늦게나마라도 피하지 못하고 적중당했다면, 뼈가 부러지고 근육과 살점이 찢어져 날아갔을 것이다.
무시무시한 공격력. 패율은 상대의 강철 같은 체술에 혀를 내둘렀다.
‘그게 허초였다고?!’
섬광과도 같은 각법을 허초로 두어 적을 방심케 한 후, 치명적인 일격을 날렸다.
그야말로 백전노장의 싸움 방식이었다. 게다가 허초로 내친 공격조차도 맞았다면 중상을 면키 힘들 만큼의 위력을 구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다. 패율은 허벅지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참고 탄력적인 검격을 쏟아 냈다.
연호정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패율은 연호정의 눈빛이 변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상대도 당황한 게 분명했다.
그때, 연호정의 손이 기묘하게 움직였다.
‘……?’
패율의 눈이 커졌다.
‘뭐……?!’
우우우우웅.
뱀처럼, 혹은 용처럼.
마치 뼈가 없기라도 한 양 유연하게 회전하며 들어온 연호정의 손에서 녹청빛 광채가 솟구쳤다. 그리고 그 광채는 단숨에 패율의 검과 손을 휘감았다.
퍼억! 티이이잉!
‘부러졌다.’
손목이 부러졌다. 단단하게 쥐고 있던 검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훅!
곧장 뒤로 물러난 패율은 후측방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운 기도에 전율했다.
뒤를 잡혔다. 빤히 보고 있었는데도.
불처럼 화려한 살기를 발하지도, 물처럼 묵직한 흐름을 만들어 내지도, 바람처럼 경쾌한 움직임을 선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부드러웠다.
부드럽고도 웅장하며, 빠르고 신묘했다. 일순 머리가 하얗게 변할 만큼 무서운 보법이었다.
극한의 회피 능력, 그리고 철저한 반격 태세를 만들어 내는 보법.
청룡기(靑龍氣), 청룡답운보(靑龍踏雲步)였다. 지금의 패율로서는 그 기기묘묘한 보법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에는 무리였다.
청룡답운보로 공격점을 선점한 연호정이 주먹을 뻗었다.
우우우우웅!
소용돌이치는 권력(拳力) 주변으로 어딘지 모르게 따스한 바람이 깃드는 듯했다. 분명한 일격인데도 중첩된 파괴력으로 상대를 날려 버릴 것 같은 살벌함을 풍기고 있었다.
청룡의 기예, 용군삼형(龍群三形)이었다.
퍼퍼퍼펑!
“커헉!”
신음성과 함께 날아간 패율이 담벼락에 부딪혔다.
푸스스스.
금이 간 담벼락에서 돌가루가 튀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안색은 다소 창백했지만, 고통스러운 기색 따위는 엿보이지 않았다.
“제가 이겼군요.”
“쿨럭!”
패율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다리에 힘이 빠져서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엄청난 무공이라니.’
작정하고 내친 무공이었다면 거기서 끝났을 리가 없다. 연호정의 무공은 지극히 실전적이면서도 파괴력이 넘치니까.
마지막에 힘을 회수하지 않았다면, 패율은 갈비뼈가 다 으스러지고 오장육부 또한 뭉개졌을 것이며, 핏덩이가 된 그의 몸은 담벼락을 부수고 삼 장은 더 날아갔을 것이다.
패율의 얼굴이 벌게졌다.
‘봐주지 않았으면 죽었다는 건가.’
사람들은 애써 쉬쉬했지만,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연호정이야말로 당대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라는 것을.
패율은 비로소 그 말을 실감했다. 연호정을 인정하는 이들은 그의 재능과 이룬 경지를 보았지만, 패율은 지금의 비무로 그의 실전 능력과 능수능란한 전술을 보았다.
‘이놈은 대체 어디서 이런 수법을?!’
그가 떨리는 눈으로 연호정을 올려다보았다.
연호정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상당한 내외상을 입은 와중에 무리해서 공력을 운용한 탓에 내상이 한층 더 깊어진 것이다.
“굉장하시군요, 선배님.”
“콜록! 쿨럭!”
“솔직히, 초반 세 합 이내에 끝날 줄 알았습니다. 엄청나게 방심하고 계시길래요.”
“……그렇게 보였나?”
“그렇습니다.”
주르륵.
연호정이 코피를 흘렸다. 무리한 공력 운용과 연이은 가속으로 코의 점막이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가 흘러내리는 피를 닦으며 말했다.
“근래 들어 생각이 많으셨습니까? 본래 실력을 다 보여 주지도 못하신 듯합니다만.”
패율의 눈이 흔들렸다.
“검 끝은 흔들리고, 움직임은 반 박자 늦습니다. 제 무공에 대응하는 수법들은 하나같이 실전적인데, 몸이 그걸 못 따라오고 있어요.”
“…….”
“굳이 기습하지 않아도 어떻게든 이길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느닷없이 벌어진 승부를 멍하니 지켜보던 척강이 퍼뜩 놀라서 입을 열었다.
“구, 군장님! 아무리 그래도 기습이라니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실전을 원하신다고 하셨잖냐. 그렇다고 무림맹 소속원들끼리 진짜 죽일 수는 없으니, 재빨리 제압해 버릴 수밖에.”
“하, 하지만!”
그때, 패율이 말했다.
“변명의 여지가 없군.”
연호정과 척강이 패율을 보았다.
이제 힘이 좀 돌아온 듯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패율이 말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나의 패배다.”
“하지만 사숙님!”
“기습이든 정정당당한 승부든, 죽으면 그걸로 끝이야.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
패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싸우기 전의 위험천만한 분위기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다 낫지도 않은 몸으로 그 정도라. 과연 다르긴 다르군.”
“선배님의 무공도 대단했습니다. 점창의 비전은 몇 번 꺼내지도 않으셨잖습니까.”
“자네가 꺼내지 못하게 만든 것 아닌가.”
연호정이 희미하게 웃었다.
날카로운 안목이었다. 패배하긴 했지만, 무공에 대한 감각이 엄청나게 뛰어난 사람이었다.
패율이 눈을 감았다.
갑자기 극심한 피로가 밀려왔다.
“자네와 싸우게 되면, 몇 날 며칠 동안 피 터지게 치고받을 줄 알았거늘.”
“그렇습니까.”
패율이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졌네.”
“좋은 승부였습니다.”
“말했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고.”
“그러셨지요.”
“자네 휘하로 들어가도록 하겠네.”
척강이 깜짝 놀라서 패율을 보았다.
연호정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많이 위험할 텐데 괜찮겠습니까?”
“위험해 봤자 자네 주먹보다 위험할까 싶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축하드립니다. 까마득히 어린 후배 밑으로 들어오시게 된 것.”
패율의 얼굴이 구겨진 화선지처럼 변했다.
“축하하네. 점창파 장로를 수하로 부리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