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고향으로 (8)
“…….”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당관은 무서운 눈으로 당상아를 보았다.
반면 당상아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아버지가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는데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잠시 후, 당관이 입을 열었다.
“허락할 수 없다.”
“…….”
“모용가주에겐 내가 잘 말해 놓을 테니 이만 거처로 가서 쉬거라.”
“전 갈 거예요.”
당관이 버럭 소리쳤다.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간다는 게야!”
“사지(死地)죠. 투왕 양천까지 얽혀 있으니, 자칫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고요.”
“알고 있는데도 그따위 소리가 나온단 말이냐?!”
“제가 선택한 길입니다.”
“멋지게 죽는 길 따위는 어디에도 없다. 이만 돌아가라. 이번 임무에 널 함께 보낼 순 없다.”
“이미 실무조 좌장인 연 군장이 작전 명령서에 제 이름을 올렸어요.”
“그따위 종잇장 따위 찢어 버리면 그만이다.”
“설령 태워 버리신다 해도 전 갈 겁니다.”
푸스스스.
당관의 몸에서 독기가 일렁였다. 솟구치는 분노에 독공이 제멋대로 개방된 것이다.
“내 손으로 직접 꽁꽁 묶어 가둬 두길 바라느냐?”
당상아가 당관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거죠?”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정말 궁금해서요.”
“당가의 혈족이 가주의 허가도 없이 제멋대로 움직인다? 내 딸이 아니었다면 당장 뇌옥에 갇혀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딸이었나요, 제가?”
“뭐라?”
당상아는 작정한 듯 말을 쏟아 냈다.
“아버지께 제가 언제부터 딸이었나요? 조부님께서 절 직접 가르치셨던 때부터요? 아니면 가인들이 양선보다 저를 더 높이 평가했을 때부터였나요?”
“……!”
“그도 아니면, 쓸데없이 재능을 타고나 버린 계륵 같은 딸내미를 모용세가로 보내야겠다고 다짐했을 때부터였나요?”
당관의 콧잔등이 파르르 떨렸다.
생각지도 못했던 딸의 반항이다. 그는 당황했고, 동시에 분노했다.
당관이 재차 입을 열려 할 때, 당상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는 그저 가문을 떠나면 되는 거 아니었나요?”
“……!”
“아버지께서 바라신 게 그거였잖아요. 눈엣가시인 제가 후계자인 양선의 걸림돌이 되지 않는 것.”
설마하니 이런 문제를 면전에서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
당황한 당관이 우물쭈물한 사이, 당상아가 폭탄 발언을 던졌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버지를 이해해요. 가문의 법도와 역사라는 게 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까지 참고 살았어요.”
“…….”
“하지만 가문 밖, 제 인생을 찾아가겠다는 열망조차 억압하려 드신다면 그때는 당씨 성을 버릴 수밖에요.”
“뭐, 뭐라고?!”
당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네가 정녕 미친 게냐!”
당씨 성을 버린다? 이것은 곧 가문과 연을 끊어 버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문파로 치면 파문(破門)이다. 중원의 정서상 목숨을 끊겠다는 말보다 더 무서운 말인 것이다.
당관은 정말이지 지금 이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는 그렇게 유순했던 딸이, 왜 갑자기 과격해진 것인가?
당상아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럼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게 대체 뭐죠? 양선을 방해하지도 말고, 네 뜻대로 살지도 마라. 넌 사람이 아니라 인형일 뿐이다, 이건가요?”
“이놈! 지금 애비와 싸워 보자는 것이냐!”
“아버지께서 보시는 전 뭔가요? 딸인가요, 아니면 그저 재산의 일부인가요?”
“……!”
“말이 나온 김에 이 얘기도 하죠. 저 역시 작정하고 온 거니까요.”
당상아가 눈을 감았다.
“절 딸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저의 선택을 존중해 주세요. 하지만 언제든 처분할 수 있는 물건이라 생각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절 죽이세요.”
당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성씨를 버리겠다는 말도 모자라 죽여 달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는 딸의 입에서 저런 극단적인 말이 튀어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부르르르.
스멀스멀 새어 나오던 독기가 주춤했다.
당상아가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호흡이 격해진 아버지의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다.
“이만 일어날게요.”
“넌 물건이 아니다.”
“……?”
“난 한 번도 널 물건이라 생각한 적 없다. 너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내 딸이다.”
당상아의 눈이 흔들렸다.
당관이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탕마군은 수가 많아. 군장인 모용우 역시 희대의 천재다. 그래서 아무 말 안 했던 것이다. 경험 삼아 조직에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으니까.”
“…….”
“하지만 이번에는 달라. 까딱 잘못하면 목숨이 날아가는 위험한 임무다! 게다가 그 망할 애송이의 휘하로 들어가다니, 절대로 허가할 수 없다!”
“이번에도 여쭤보고 싶네요.”
“……?”
“진심으로 제 목숨을 걱정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제가 연 군장에게 인질로 잡히는 상황을 우려하시는 건가요?”
순간 당관의 눈이 흔들렸다.
당상아가 한숨을 쉬었다.
“만날 웃고만 다닌다고 제가 모를 줄 아셨나요? 모용가주님과 아버지께서, 연가를 위시한 반대 당파와 알력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걸.”
“……!”
“무엇이 아버지의 진심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저예요. 저는 누군가의 인질이 되고 싶지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을 방해받고 싶지도 않아요.”
“그것은…….”
당관의 입에서 다소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그리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다.”
“알아요. 그래서 절 건드리는 사람은 이유를 불문하고 박살을 내 버릴 생각입니다.”
“……!!”
당상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올게요.”
그 말을 끝으로 당상아가 거처를 나섰다.
딸이 앉았던 자리를 한참이나 노려보던 당관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게 무슨.’
설마 자신이 딸의 반항 아닌 반항 앞에 이렇게까지 당황할 줄은 몰랐다.
호통 한 번이면 뜻을 꺾을 줄 알았다. 실제로 대화 초반에는 당황은 했을지언정 우물쭈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딸의 청천벽력 같은 말에는 당관도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성씨를 버리겠다니? 차라리 죽이라니?
순하디순하던 딸이 이토록 독하게 나올 줄 뉘라서 상상했겠는가.
순간 당관은 아버지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나는 가족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 아마 역대 가주들 대부분이 그랬을 것이다. 하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너무도 늦게 깨달았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네가 가풍(家風)에 잡아먹혀 끝내는 가법의 꼭두각시가 되어 버린 가주들과는 달랐으면 한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아버지와도 다릅니다.’
‘틀렸다. 내 자식 중 너만큼 날 닮은 녀석이 없다. 그래서 걱정이다.’
쾅!
탁자를 후려친 당관의 주먹에서 녹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 * *
“한잔 마셔 보게.”
연호정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어떤가? 괜찮은가?”
“좋소.”
“목소리에 진심이 담기지 않았군.”
“원래 차 맛 같은 건 잘 모르오. 그냥 나쁘지 않으면 다 좋은 거지.”
“허허허.”
“그래서, 이제 출정해야 하는 사람은 왜 불렀소?”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별거 있겠나? 이번 임무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바가 아닌데, 떠나는 실무조 좌장에게 차 한 잔은 대접해 줘야지.”
“갑자기 차 맛이 씁쓸해지는군.”
“왜? 나는 자네 걱정하면 안 되나?”
“날 걱정씩이나 해 주는 분이었소?”
“걱정해야지. 이번만큼은.”
모용군이 품에서 고이 접힌 서신을 꺼내 건넸다.
연호정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이건 뭐요?”
“후개에게는 이미 전해 줬네만, 자네에게도 따로 주는 걸세. 써먹기 좋은 방파나 조직들을 정리한 자료야. 그리 많지는 않으니, 상황에 따라 적절히 골라 보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써먹기 좋은 방파라? 어중간한 놈들이겠군.”
모용군이 흡족하게 웃었다.
“역시 자네와는 대화가 되는구먼. 후개에게는 일일이 설명해 줘야 했지.”
“후개도 똑똑한 사람이오. 다만 워낙 당신을 의심하는 터라.”
“의심해야 할 때와 믿어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아는 것. 그것도 능력일세.”
“말은 좋소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자넨 참 대단한 친구야. 머리도 똑똑하고 안목도 좋은데다가 감도 뛰어나지.”
연호정이 서신을 받아 품 안에 갈무리했다.
“어쨌든 잘 받겠소.”
모용군은 여전히 웃는 낯으로, 보다 더 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심하게.”
“물론이오.”
“이번 임무, 사실 간단하다고 생각하면 한없이 간단해질 수도 있는 문제라네. 하지만 저쪽에 투왕이 존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특급으로 분류될 가치가 생겼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가 기억하는 양천은 보통 대단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를 누르고 흑제성을 세운 이후 훨씬 더 발전하긴 했지만, 양천을 상대로 승리했을 때는 운도 좋았다.
하지만 양천의 무서움은 무공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내 따로 보고받기로, 양천은…….”
“선 없는 싸움을 하는 자요?”
“어떻게 알았나?”
연호정은 모른 척 잡아뗐다.
“계속 의심하고 있었소. 양천이란 자, 중원에 알려진 게 그리 많지 않은 자요. 그런데도 흑도로 분류되었고, 투왕이라는 별호까지 얻었잖소?”
“그렇지.”
“사나운 범을 때려잡는 것보다 쥐새끼를 길들이는 게 훨씬 더 어려운 법이오. 한데 양천은 그걸 해냈소.”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자신이 당관에게 했던 말과 비슷한 말이었다. 확실히 이놈은 자신과 같은 부류라는 생각이 들었다.
“맞네. 그래서 더 무섭네.”
“만일 양천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그 길을 개척했다면, 그건 더 이상하오. 그 출중한 능력을 지금까지 숨겨 왔다는 소리니까.”
“그래서 의심하고 있었군.”
“그렇소.”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양천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도 분명 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확신은 금물이야. 괜히 그 부분을 파고든다고 무리했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걸세.”
“알고 있소.”
“하긴, 자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두 사람이 동시에 차로 목을 축였다.
모용군이 재차 입을 열었다.
“사실 말이 지휘권자지, 실무조야말로 이번 임무의 핵심이라네. 내용을 일일이 주고받고 싶어도 거리가 거리인 만큼, 실무조장인 자네의 판단이 임무의 승패를 가를 걸세.”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당신도 함께했으면 좋았을 텐데.”
모용군이 손사래를 쳤다.
“그런 말 마시게. 차라리 적의 수장을 때려잡으라면 모를까, 이런 복잡한 싸움에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네.”
“왜? 최고 권력자가 되고자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한 싸움도 마다하지 않으시는 분이.”
훈훈했던 분위기를 단숨에 얼어붙게 할 만한 발언이었다.
모용군은 넉살 좋게 받아쳤다.
“내 말이 그 말이네. 그 머리 아픈 싸움을 하는 와중에 이런 임무에까지 신경을 쏟고 싶진 않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잠시 휴전이나 합시다.”
“그거야 진즉에 하지 않았나?”
“알잖소? 그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모용군의 미소가 깊어졌다.
“왜? 자네가 없는 틈을 타서 뭔가 기이한 수작이라도 부릴성싶은가?”
“예전이었다면 걱정 안 했을 텐데, 최근의 당신을 보면 왠지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서 말이오.”
정말 무서운 놈이야.
마음과는 달리 모용군은 어깨를 으쓱이며 딴청을 피웠다.
“싸움도 상대가 있어야 성립이 되는 것이지. 그 부분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임무에나 집중하시게.”
“분명히 말하겠소.”
연호정의 눈빛이 일순간 차가워졌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어떠한 공격도 마시오.”
모용군의 얼굴에도 서리가 내렸다.
“그거야 내 마음이지.”
두 사람은 한참이나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연호정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잘 마셨소.”
“입에 맞았다니 다행이군.”
모용군 역시 표정을 풀었다.
“양천이 휘어잡은 영역에 진입하면 곧장 연락하게. 알겠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양천은 세를 불리고 있다네.”
“알겠소.”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그럼.”
모용군 역시 마주 포권을 취했다.
“무운을 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