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정면 돌파 (1)
티이이잉! 퍽!
허공을 가른 화살이 단숨에 철판을 꿰뚫었다.
묵비의 얼굴에 기쁨이 어렸다.
‘됐다.’
홍련궁의 장력이 제아무리 뛰어나도 내공을 제대로 싣지 않으면 철판을 뚫진 못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그녀는 화살에 극소량의 내공만을 담았을 뿐이었다.
과거였다면 튕겨 나왔을 화살이 철판을 뚫었다. 내공량을 줄인 대신, 내공의 운용 방식을 다르게 했기 때문이다.
‘정말 무도(武道)라는 건 무궁무진하구나.’
생각을 바꾼 것만으로도 화살의 위력이 달라졌다.
관일곡에서는 배우지 못한 무공 구현의 다양성이었다. 무수히 많은 전투와 각고의 노력, 깊은 고뇌가 합쳐져 만들어진 그녀만의 궁술이 비로소 개화하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아! 아버님 오셨어요.”
“그래.”
연위는 구멍이 난 철판을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기존에 담았던 내력의 절반. 그 정도 힘만으로 철판을 뚫어 냈구나. 너의 집중력과 내공 운용이 한 단계 성장했다는 뜻이다.”
묵비의 얼굴에 솔직한 기쁨이 어렸다. 자신도 알고는 있었지만, 연위가 그것을 직접 확인해 주니 안심이 되었다.
“아버님 덕분이에요. 제때 조언해 주지 않으셨으면 생각지 못했을 거예요.”
“조언이야 누구든 해 줄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지.”
연위가 그녀의 어깨를 두들겼다.
“너의 가장 큰 장점은 타고난 재능이 아니다. 어떤 말을 들어도 진지하게 고민할 줄 아는 자세다. 무도(武道)의 영역에서 고집을 부리지 않는 것처럼 대단한 재능은 없는 법이다.”
묵비의 얼굴이 붉어졌다.
연위는 칭찬과 비판이 명확했다. 하지만 더 무게를 싣는 쪽은 대개 비판이었다. 잘한 건 그걸로 끝이지만, 못한 건 실전에서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정도 칭찬이 나왔다는 건 그만큼 묵비의 자세가 인상 깊었다는 뜻이었다. 묵비 역시 그걸 알기에 유독 기뻐하는 것이다.
연위가 담담하게 물었다.
“알고 있느냐?”
“네?”
“이각 전, 호정이 맹을 나섰다.”
뜻밖에도 묵비의 표정은 평온했다.
“네. 아까 얘기하고 갔어요.”
물끄러미 묵비를 보던 연위가 재차 입을 열었다.
“서운하지는 않더냐?”
묵비가 고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그랬어요. 최고는 아닐지라도 나름대로 도움은 되는 줄 알았는데, 얼마나 미덥지 못하면 데려가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이런 얘기를 연위 앞에서 자연스럽게 털어놓는다. 묵비도 점점 연위를 대하기가 편해진 것이다.
“지금은 달리 생각한다는 뜻이냐?”
“네.”
묵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쌀쌀해진 날씨. 구름은 적당했다.
“생각해 보면 그 사람,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한 번도 저를 무시한 적이 없어요. 장난은 많이 쳤지만, 그조차도 명확한 선이 있었죠.”
“그랬구나.”
“겉으로는 막 대하는 것 같아도, 자기 사람이라 생각하면 절대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하더라고요.”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묵비는 착하지만, 어지간하면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그녀가 이런 말을 한다는 건 전적으로 아들을 믿는다는 뜻이었다.
“처음 세상에 나와서 만난 사람이 연 공자라서 다행이에요.”
“그렇구나.”
묵비가 홍련궁을 등에 걸었다.
“떠날 사람은 떠났고, 남은 사람은 남은 사람들만의 일을 시작해야죠.”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옳다. 호정이 없는 만큼, 이쪽의 싸움도 꽤 치열해질 거다.”
정쟁이 되었든 멸사군의 훈련이 되었든, 여러모로 고달파질 거란 말이었다.
그만큼 연호정이 드리운 그림자는 크고 짙었다. 어느새 그의 존재는 묵비는 물론 아버지인 연위, 군사인 제갈문호나 맹의 수뇌부들에게까지도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멸사군을 훈련하러 가느냐?”
“네. 경장 갑주도 전달해야 하니까요.”
“알았다.”
먼저 파군각을 나서려던 연위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저녁에 시간은 괜찮으냐?”
“네? 아, 네! 괜찮아요.”
“얼추 술시(戌時)쯤 되면 내 일도 끝날 게다. 시간 맞으면 같이 밥이나 먹자꾸나.”
묵비가 밝게 웃었다.
“네!”
* * *
무림맹을 나선 연호정 일행은 곧장 호북을 통과하여 귀주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양천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호남성의 성도 장사(長沙)였다.
최단거리로 가자면 호북으로 내려와 강을 건너, 곧장 호남으로 진입해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출맹한 그때부터 은밀한 이동을 고수했다.
당상아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연호정은 이렇게 대답했다.
“놈들은 무림맹을 예의주시하고 있어. 드나드는 사람까지 조사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만일 그렇다면, 본진으로 향하는 이들을 더더욱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거야.”
단순하면서도 타당한 이유였다. 다소 먼 길을 돌아가야 할 테지만 분명 필요한 일이었다.
연호정은 자신의 판단을 믿었고, 가득상과 제갈아연은 그의 말이 신뢰할 만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선배님.”
“말씀하시게.”
“선배님께서는 먼저 호남 서부에 진입해 주십시오.”
패율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 혼자?”
“의심을 줄이기 위함입니다.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계시면, 간격을 두고 돌아서 가겠습니다.”
“그게 의미가 있나?”
“물론입니다.”
“거참, 알았네.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하는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패율을 제외한 일행은 한 달 만에 호북의 서남쪽을 통과, 귀주성에 접어들었다.
작정하고 신법을 펼쳤다면 그보다 수일은 더 빠르게 도달했을 거리였다. 조심스럽게 이동하느라 시일이 늦어진 것이다.
그렇게 일행은 귀주성 최북단에 있는 조촐한 객잔에 들어섰다.
“후우, 이제 좀 살겠군.”
가득상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고생들 하셨소. 여기는 본방이 운영하는 객잔이니까 마음 놓고 쉬시면 되오.”
일행은 그간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뜨끈한 물로 수욕부터 했다. 한 가지 놀라운 건, 가득상이 가장 먼저 씻으러 갔다는 것이다.
제갈아연이 짓궂게 물었다.
“그러다 진짜 후개 자리에서 쫓겨나는 거 아니에요?”
“킁, 바라던 바요.”
적진에 직접 침투하려면 개방도라는 걸 들켜선 안 된다. 결국 가득상은 방규(幇規)를 어길 수밖에 없었다.
묵은 때를 전부 벗겨 내고, 딱 맞는 무복 위로 백포까지 걸치고 나온 가득상의 자태는 실로 놀라웠다.
제갈아연이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와아! 후개 맞아요?”
“그럼 누구겠수.”
“세상에, 이런 얼굴을 땟국물로 숨기고 다니다뇨? 평소에도 씻고 다녀요!”
“거지새끼가 물 아깝게 씻기는 왜 씻소?”
가득상은 투덜거렸지만, 실제로 그런 소리가 나올 만도 했다.
제법 큰 키에 탄탄한 체격은 물론이요, 오관이 뚜렷한 가득상의 외양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워낙 동안이기도 해서, 차려입은 외양만 보면 귀공자라 해도 손색이 없을 듯했다.
당상아는 연호정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후개도 적진에 들어가나요?”
“그래야지. 양측 소식을 빠르게 전해야 하니까. 사실 그런 걸 떠나서도, 저 양반처럼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도 찾기 힘들어.”
“그렇군요.”
“왜? 뭐 걸리는 거라도 있어?”
“결정적인 게 걸려요.”
연호정이 눈을 끔뻑였다.
“그게 뭔데?”
“외양과 말투의 괴리감이요.”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외양은 그야말로 귀공자나 다름이 없는데, 말투는 시정잡배도 혀를 내두를 만큼 경우가 없다. 이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였다.
가득상이 구슬픈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설마 말투도 바꿔야 해? 그건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줘.”
연호정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는 개성 강한 사람이 많으니까. 오히려 그런 면이 순박해 보일지도 모르는 거고.”
“헤헤, 연 공자는 날 이해해 줄 줄 알았어!”
“그래도 이왕이면 과묵하게 있기를 권장하겠소…….”
그렇게 모두 멀끔해진 일행은 식사까지 마치고 한 방에 모였다.
가득상이 입맛을 다셨다.
“확실히 귀주성은 습하네. 곧 겨울인데도 말이야.”
제갈아연이 그의 말을 받았다.
“내가고수도 자칫 잘못하면 풍토병을 앓는다고 하더군요. 습도가 높고 초목이 우거져서 벌레도 많대요.”
“벌레는 배고플 때 일용할 양식으로 그만인데.”
“웩.”
“이거 왜 이래? 그럼 굶어 죽어? 벌레라도 씹으면서 버텨야지. 안 그렇소, 당 소저?”
당상아가 어색한 얼굴로 말했다.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어서…….”
“으잉?”
가득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 소저도 독공(毒功)을 익혔잖소? 독공 수련할 때 안 자셔 봤나? 세상에 독충(毒蟲)이 그리 많은데.”
“독공을 배운다고 벌레를 먹진 않아요. 물론 벌레에 별 거부감이 없긴 한데…….”
“허허, 그렇소?”
당상아가 헛기침을 했다. 그녀 역시 낯 가리는 성품은 아니었지만, 가득상의 무지막지한 친화력에는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 슬슬 정리나 해 봅시다.”
손뼉을 쳐서 주의를 환기한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미리들 들었겠지만, 이제부터 우리는 무종문(武宗門) 소속이오.”
무종문은 과거 백여 년 전 멸문했다고 알려진 신비 문파였다.
놀랍게도, 그들의 무공은 구대문파와 비교해도 크게 모자라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스스로를 무종문 출신이라고 밝힌 무인 중 약자는 단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의 무공이 일관적이지 않다는 평가 또한 따라붙곤 했다.
소림사면 소림사 나름의, 화산파면 화산파 나름의 무공 특성이 있듯이 문파별로 추구하는 무공의 흐름이 있기 마련인데, 무종문에는 그런 게 없었다. 마치 여러 종파의 달인들이 모여 문파를 만든 것처럼, 그들의 무공은 다양한 깊이를 자랑했다.
그러나 백여 년 전, 모종의 이유로 멸문의 길을 걸은 이후로 무종문의 이름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게 되었다.
“세인들의 기억에서도 잊혔고, 무공의 종류도 워낙 여러 가지이니 우리가 각자 다른 무공을 써도 의심하진 않을 거요.”
세 남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호정이 가득상을 가리켰다.
“다만 호칭에는 주의를 기울이는 게 좋소. 이제부터 이 무리의 대사형은 후개가 맡으시오.”
“그거 굳이 내가 맡아야 하오?”
“나이가 제일 많잖소.”
“그럼 패율 대협은?”
“선배님은 사숙이오.”
“나 동안인데, 막내는 어떻소?”
“다음으로 넘어갑시다.”
“쳇.”
연호정이 당상아를 보았다.
“당상아 군병이 둘째요. 이유는 동일하오.”
“네.”
“그리고 내가 셋째. 넷째는 아연이오.”
제갈아연이 발끈했다.
“야, 왜 내가 막내냐? 내가 너보다 한 살 더 많잖아! 이게 친구 먹어 주니까 누님도 몰라보고.”
“나는 이 중 가장 많이 움직여야 할 사람이다. 게다가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내 무공이 셋 중 가장 깊다는 것도 알 수 있어. 셋째까지는 그럴 수 있어도, 막내라고 소개하면 이질감이 들겠지.”
“끄응.”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불만스러운 건 어쩔 수 없는지 제갈아연의 입이 댓 발은 튀어나왔다.
연호정의 눈이 진지한 빛을 발했다.
“지금까지의 정보로 유추해 볼 때, 양천은 호남성 장사에 있을 확률이 높소. 하지만 그가 지금까지 휘어잡은 흑도의 규모를 생각할 때, 호남성 전체에 그의 눈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할 거요.”
가득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방 제자들의 보고도 비슷하오. 호남성으로 들어서는 순간 눈길이 따라붙을 거요.”
“그렇다고 산길이나 물길을 타고 이동하진 않겠소.”
“당당하게 관도로 가야 의심을 안 할 테니까?”
“그렇소.”
연호정이 당상아에게 말했다.
“즉, 호남성으로 진입하자마자 당신 능력이 필요하다.”
“네? 제 능력이요?”
그러고 보니 이번 임무에서 자신의 역할에 관해 듣지 못했다.
당상아는 당황했다. 그 당연한 걸 지금까지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연호정이 서늘하게 웃었다.
불길하기 짝이 없는 미소. 가득상은 ‘저거 또 시작이네.’라며 혀를 찼고, 제갈아연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흑도의 눈이 우리 쪽으로 몰리면, 그 즉시 암기로 쏴 죽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