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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01화 (201/963)

201화. 낭중지추(囊中之錐) (1)

가득상이 연호정을 힐끔거렸다.

연호정은 담담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셋째야.”

“말씀하십시오.”

“너무 자주 말해서 입이 닳을 것 같긴 한데…… 너 정말 대단하다.”

“새삼스럽게.”

“허어.”

가득상은 입맛을 다시며 주루 일 층 중앙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핏빛 무복을 입은 혈작문의 무사 십여 명이 쓰러져 있었다. 하나같이 마혈이 비수에 찍힌 상태로, 당장 의원에게 보이지 않으면 불구가 될 듯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앞에는 당상아가 서 있었다.

제갈아연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정말 대단하네.”

“음?”

“올 때는 정신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정말 굉장한 암기술이야.”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험은 다소 부족하지만, 사저는 언제 어느 때라도 목표물을 정확하게 맞힐 만큼 암기술에 통달해 있어. 암기란 동등한 수준의 고수에게도 위협적인 병기인 만큼, 저놈들 정도로는 사저의 상대가 안 되지.”

“그것도 그렇지만, 엄청나게 빠른데?”

제갈아연이 연호정을 보며 말했다.

“거의 화살에 비견될 만한 속도야.”

그녀가 말하는 화살은 여느 화살을 말하는 게 아니라, 묵비가 쏘는 화살을 뜻하는 것이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화살만큼은 아니야.”

“정말로? 내 눈에는 거의 비슷해 보이는데?”

“작정하고 쏘는 걸 못 봐서 그렇지. 물론 큰 격차는 아니지만.”

“헤에.”

제갈아연이 입을 헤 벌리며 당상아를 보았다. 사실 묵비나 당상아나, 사출(射出) 병기를 쓰는 능력이 너무도 출중해서 우위를 가리는 건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저 대단할 뿐이었다. 제갈아연에게는 없는 무(武)의 재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사람, 세상에는 참 천재가 많다.

가득상이 연호정에게 물었다.

“어떻게, 여기서 더 기다릴까?”

연호정은 대답 없이 혈작문의 무사들을 내려다보았다.

가득상의 고개가 서서히 패율에게로 돌아갔다.

“……요? 사숙?”

패율이 황당하다는 눈으로 가득상을 보았다.

“지금 내게 묻는 거냐?”

“그럼요. 제일 어른이신데요.”

제일 어른이지만 대장은 아니지.

패율이 연호정에게 전음을 날렸다.

[어쩔 거냐?]

[한 번 더 기다려야지요. 한 놈은 멀쩡히 보냈으니, 반나절도 안 돼서 진짜배기가 올 겁니다.]

패율이 입을 열었다.

“반나절만 더 기다린다.”

“아, 예.”

연호정의 예측은 이번에도 귀신처럼 들어맞았다.

콰앙!

시작은 혈작문도들과 똑같았다.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들이닥친 이들은 염마방(閻魔房)의 고수들이었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제법이군.’

상당한 수준이다. 제각기 다른 병장기를 쥐고 있지만, 절반 이상이 일류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숫자도 스무 명으로 꽤 많았으며, 살기 넘치는 안광을 뿜어내면서도 절제된 동작이 인상적이었다.

‘저 정도면 삼십육문의 끝자락에나마 걸칠 정도는 되겠어.’

연호정의 안목은 정확했다.

“염마방이군.”

가득상의 눈이 번뜩였다.

“삼십육문에 든 지 얼마 안 된 방파야. 음사방이 힘을 잃고 난 뒤 그 빈 자리를 차지했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음사방이라.’

멸사군의 군병들이 처음으로 실전을 겪은 대상이 바로 음사방이었다.

새삼 흑도의 힘이 약하다는 걸 실감했다. 역사 깊은 문파는 손가락에 꼽히며, 하루에도 수백 개의 문파가 스러지고 나타나길 반복한다.

‘역시 양천은 제대로 알고 있어.’

저런 조잡스러운 흑도를 규합하는 데에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과연 무엇인가.

바로 법도와 역사다. 철저한 규율과 법도를 정해 두고, 그것을 어기는 자는 이유를 불문하고 처벌한다.

잔혹하고 극단적이지만, 단기적으로 봤을 때는 확실한 효과를 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생활에 익숙해졌을 때부터 기나긴 역사를 쌓아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흑제성을 세울 수 있었던 방법이고, 흑제성이 틀을 잡기도 전에 양천이 쓴 방법이기도 했다.

‘다만 그걸 그자가 떠올린 건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득상의 눈에 의아함이 어렸다.

“셋째가 하게?”

“막내에게 맡기기에는 좀 그렇고, 그렇다고 사저만 고생하게 둘 순 없으니까요.”

가득상은 측은한 눈으로 염마방도들을 보았다. 분명 적인데도 왠지 모르게 불쌍했다.

패율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어지간하면 피는 뿌리지 마라.”

“알겠습니다.”

파악!

이 층에서 단숨에 일 층으로 내려온 연호정이 당상아 앞에 섰다.

이미 비수 한 자루를 꺼내 들고 있던 당상아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렸다.

“사제?”

“저놈들은 제가 처리하지요. 고생하셨습니다. 이만 올라가서 쉬십시오.”

“아, 그럴까?”

당상아는 괜스레 연호정의 눈치를 보며 이 층으로 올라갔다.

염마방 무리의 좌장, 호극이 눈을 빛냈다.

“너희냐?”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다.”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군. 네놈들, 우리가 누군지는 알고 있는 거냐?”

“알아야 하나?”

“뭐라?”

“쓸데없는 기 싸움은 관두고 얘기나 해 봐. 왜 우릴 미행했어?”

호극이 주춤했다.

“미행했다고? 누가 누굴?”

“귀 청소 안 할래? 우리가 호남으로 진입하자마자 너희 흑도 놈들이 우릴 미행했잖아. 그거 거슬려서 다 죽이니까 이 핏덩이들이 찾아온 거 아냐.”

순간 호극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죽였다고?”

“그럼 살려서 보낼까?”

오만함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였다.

꽤 자극적인 언사였지만, 호극은 연호정의 말을 책잡지 못했다.

‘미행을 했다? 누가? 설마 혈작에서 그랬을 리는 없고…….’

호극은 불현듯 깨달았다.

‘그분 쪽이다!’

그렇다.

짧은 시간, 흑도의 세력을 절반 가까이 통합하여 어느새 거대한 세력을 형성한 무신의 거처.

스스로를 당당하게 흑도라 표방한, 그러면서도 흑도의 어떤 고수와도 격을 달리하는 무림 최강의 투사 쪽에서 보낸 정보원들일 것이다.

호극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반면 연호정은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갑자기 겁이라도 먹었나?”

“다, 다 죽였다고 했더냐?!”

“그래.”

호극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너! 혈작문에서 온 놈! 이리 나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핏빛 무복을 입은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호극의 두 눈이 호랑이처럼 매서워졌다.

“네놈들, 우리 몰래 부(府)와 선을 대고 있었던 거냐?!”

“예에?!”

“똑바로 대답하지 못해!”

“죄, 죄송합니다! 저는 잘…….”

하기야 문파의 수뇌부도 아닌데 그런 걸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호극은 이미 염마방 휘하의 혈작문이 부(府)와 따로 선을 대고 있었을 거라 확신했다.

“이런 개새끼들이!”

퍼어억!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호극이 내리친 낭아봉에 혈작문도의 머리통이 산산이 조각나 버렸다. 과격하기 짝이 없는 살수였다.

호극이 씩씩거렸다.

“이것들이 오냐오냐해 주니까 감히 본방을 무시하고 멋대로 움직여?”

“이봐.”

호극이 연호정을 돌아보았다.

“부가 뭐냐?”

“……?!”

“설마 투왕이 주인으로 있는 곳이냐?”

“……네놈.”

번쩍!

염마방도들의 두 눈에서 엄청난 살기가 쏟아졌다.

연호정은 꽤 놀랐다. 휘몰아치는 살기가 보검처럼 예리했던 것이다.

“감히 그분의 별호를 함부로 입에 담다니, 어지간히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에서 용암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이 층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가득상의 눈이 깊어졌다.

‘대단하군.’

지독한 살기를 가리키는 게 아니었다. 진짜 대단한 것은, 별호 한번 불렀다고 저토록 독한 살기를 뿜도록 만든 양천의 존재감이었다.

‘저 살기는 두려움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 양천을 향한 놈들의 충성심은 진짜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행에게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호남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정보원이 따라붙은 것부터가 굉장한 일이었다.

‘호남성 자체가 이미 양천의 제국이나 마찬가지야. 흑도의 엄청난 정보력을 사방에 뿌려 두고, 수상하다 싶은 놈들을 하나하나 전부 조사하고 있어.’

가득상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위험하겠는데.’

호남성의 크기, 그리고 각지로 파견한 흑도 정보원들의 숫자.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금액이 소모되는 일이었다. 양천은 그 어마어마한 돈과 인적 자원을 거침없이 풀어 버린 것이다.

아직 양천이 무엇을 목표로 움직이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서운 인물이라는 건 확실했다.

‘제길, 우리 정말 중심부로 치고 들어가도 되는 거요?’

가득상의 눈이 연호정에게로 향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어찌 되었든,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너희 역시 투왕이라는 자와 선을 대고 있는 모양인데.”

“……허!”

“잘 됐어. 안 그래도 만나 보고 싶었거든.”

연호정이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안내해라. 그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지,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겠다.”

호극의 인내심이 뚝 끊어졌다.

“개지랄 그만 떨고 뒈져라, 애새끼야!”

부우우웅!

공기를 찢어발기며 내리꽂히는 낭아봉의 위압감은 실로 대단했다. 사람 머리통은 말할 것도 없고, 바위조차 일격에 쪼갤 만한 힘이 느껴졌다.

연호정은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쿠웅!

살기로 범벅이 되었던 호극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힘이 제법인데?”

연호정은 왼손 하나로 낭아봉을 막았다.

힘도 힘이지만, 낭아봉 특유의 날카로운 돌출부를 맨손으로 잡았는데도 긁힌 상처 하나가 없었다.

“이놈!”

경악성 비슷한 기합과 함께 낭아봉을 빼내려던 호극은 또 한 번 놀랐다.

부르르르.

양손으로 쥔 낭아봉이 희미하게 떨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 당겼는데도, 낭아봉이 상대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실로 무시무시한 악력이었다.

“네가 이 병신 같은 무리의 책임자인 것 같으니, 개박살은 내지 않겠다.”

연호정의 발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퍼억!

“커억!”

발끝이 복부 한가운데를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비틀거리던 호극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속이 뒤집히는 고통에 기절도 못 할 지경이었다.

염마방도들이 경악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연호정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얌전히 물러날 거 아니지? 어여 와. 후딱 치우게.”

츠츠츠츠!

염마방도들이 재차 살기를 뿜었다.

덜덜 떨던 호극이 입을 열었다. 절대 덤비지 말라고, 일단 뒤로 물러나라고 외치고 싶었다.

“……!!”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는 것조차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죽여!”

“팔다리를 전부 뽑아 버려라!”

염마방도들이 일제히 연호정에게 달려들었다.

호극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 돼!’

퍼억! 빠각! 우두두둑! 쾅!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방도들이 우수수 쓰러졌다.

콰드득! 찌이익!

뼈마디가 부러지고 연골이 뜯겨 나갔다. 피부가 찢어지고 고관절이 돌아가 버렸다.

자비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흉악한 수법들이었다. 단 일격이면 충분할 것을, 일부러 서너 번의 추가 공격으로 온몸의 뼈마디를 작살낸다.

호극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미, 미친놈!’

흑도에 몸담은 놈 중 잔혹하지 않은 놈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저건 완전히 정도를 벗어났다.

다 나아도 평생 장애가 남을 부위만 골라서 부숴 버린다. 그 정도야 독하다고 악명이 자자한 놈들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지만, 문제는 저놈의 눈빛이었다.

하얗게 웃으며 방도들을 쓰러트린 연호정의 얼굴은 그야말로 귀신이 따로 없었다.

표정은 그러한데, 눈빛은 또 냉정하기 짝이 없었다. 결코 파괴에 미친 광인의 눈빛이 아닌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괴리감과 능수능란한 파괴 능력이 보는 이로 하여금 살벌한 공포심을 느끼게 했다.

“쿨럭! 커헉! 그, 그만해, 이 미친놈아!”

퍼어억!

마지막 방도 하나의 흉골을 부수며 문밖으로 날려 버린 연호정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호극의 손이 덜덜 떨렸다.

만족스러운 듯 웃으며 천장을 올려다보는 연호정의 모습에서는 개운함마저 느껴졌다.

“그래, 이거지.”

고향으로 돌아온 이 기분.

온몸에 진흙을 묻혀 가며 싸우는, 다시는 반항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찍어 누르는 순백(純白)의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

“참으로 오랜만이야.”

흑도 무림에 강림한 흑도대종사.

벽산연가의 장자가 아닌, 흑암제 연호정의 화려한 귀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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