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낭중지추(囊中之錐) (2)
“뭐라고?”
“그것이…….”
환사(幻蛇)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염마방의 주축 고수가 괴멸하고, 염마방주가 패배했답니다.”
패배했다? 이건 또 묘한 보고였다.
염마방은 자신이 직접 삼십육문의 마지막 자리에 앉힌 방파였다. 방파의 전력이야 하품이 나올 수준이었지만, 적어도 놈들의 정신력과 충성심만큼은 진짜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작정하고 키워 볼 생각으로 영입한 문파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아직은 어중이떠중이에 불과할 뿐이다.
염마방이 멸문한 것도 아니고, 고작 방주가 패배한 걸로 보고를 해?
‘뭔가가 있군.’
양천은 똑똑한 사람이었다. 시간 아깝게 그따위 보고를 뭐 하러 올리냐는 말보다, 왜 이런 보고를 하는지부터를 고민할 줄 아는 사람인 것이다.
“염마방의 전력은 삼십육문 중 최하다. 방주 놈도 별 볼 일이 없었지. 놈을 이길 만한 무인은 호남성에서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분명 그렇습니다만,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달랐습니다.”
“설명하라.”
“그것이…….”
환사는 우물쭈물했다.
양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이 왜 이러는가.’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는 이 중 십이지신(十二支神)이라 불리는 열둘은 흑도 최강이라 해도 과장이 아닌 고수들이었다.
그 무력만큼이나 배포도 좋고, 일 처리 능력도 뛰어나다. 한데 환사의 저 얼굴은 뭔가?
“설명이 어려우냐?”
“아, 아닙니다! 다만, 이번 일은 제가 전달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사가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제법 두툼한 서신이었다.
“하여 사실 관계만 명확하게 적어 왔습니다. 부디 수고를 끼치게 한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환사는 얼핏 어수룩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생각이 깊고 신중하다. 그런 면에서 양천이 아끼는 수하였다.
우우웅.
두둥실 떠오른 서신이 양천의 손에 잡혔다.
“잠시 대기하도록.”
“예.”
촤르륵.
양천이 서신을 펼쳤다.
서신은 상당한 장문이었다. 그간 꽤 많은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흥미로운 얼굴로 서신을 읽던 양천.
이내 그의 눈빛이 점점 진지해졌다.
“사실인가?”
“사실 관계만 명확히 적어 왔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은 모두 뺀 내용입니다. 온전히 부주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양천의 얼굴에 흥미가 일었다.
“무종문(武宗門)이라고?”
지금에 와서는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문파였다.
그러나 양천의 뇌리에는 무종문이 존재했다. 잊기 어려울 만큼 독특한 특성을 지닌 문파였기 때문이다.
무종문은 각 무예의 달인들이 모여 만든 문파라고 하였다.
소문은 그랬지만 실상은 아무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무종문 출신 고수들의 무공이 하나같이 뛰어난 데다가, 그 종류와 기원이 전부 달랐다는 것이다.
‘분명 백 년 전에 멸문했다고 들었거늘.’
물론 어떻게 멸문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무종문이라는 단체는 그야말로 의혹과 신비로 가득한 집단이었다.
그리고 지금 주목할 만한 점은.
“암기라…….”
양천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거 정말 공교롭군.’
현재 그에게는 독과 암기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자가 필요했다.
사천당가급의 기술은 바라지 않는다. 물론 그만한 절공이 있다면 좋겠지만, 당대 무림에서 당가만큼 독과 암기에 정통한 문파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그저 당가를 제외, 무림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뛰어난 암기술의 고수면 족했다.
“눈치도 빠르군.”
“그렇습니다.”
흑도의 밀정(密偵)과 정보원들은 백도 측의 실력자들과는 근본부터가 다르다.
역사적으로 흑도는 강함보다 은밀함을, 실력보다는 생존을 추구했다. 당연히 백도와는 발전 방향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양천이 최초로 흑도의 실력에 놀란 것도 그 부분이었다. 어느 정도 무공을 완성했던 때조차 흑도 무리가 자신을 살펴보고 있는 줄 몰랐기 때문이다.
‘즉, 그놈들은 어지간히 뛰어난 고수들도 알아차리기 힘든 흑도의 정보원들을 곧장 알아채고 죽였다는 소리.’
양천의 두 눈에 강한 욕심이 일었다.
‘갖고 싶군.’
뛰어난 암기술. 극도로 예민한 안목.
나아가 흑도 방파 앞에서 자신 있게 투왕과 만나고 싶다고 외친 그 배포까지.
‘건방지긴 하지만, 오히려 그 건방짐이 좋아.’
정확히 말하자면, 이건 건방짐과는 거리가 멀다.
서신의 내용을 한 번 더 살핀 양천은 이들 중 맨손 권박으로 염마방의 주축 고수를 쓰러트렸다는 청년을 상상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트려 버렸다……. 손속이 잔혹하군. 하지만 실력이 정말 좋아. 이제 약관에 이른 나이로 그 많은 적을 압도했단 말이지.”
어린 나이에 높은 무공을 연성했으니 건방져질 만도 하다.
그러나 서신에 적힌 상세한 내용을 몇 번이나 읽어 본 결과, 이놈에게는 뭔가 다른 게 있음이 느껴졌다.
‘이놈은 거리낌이 없어.’
투왕의 존재를 알고 있다면, 이쪽 상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뜻이다.
즉, 나름의 정보력을 갖추었다는 것. 그렇다면 성천십삼좌의 무력에 대해서도 모를 수가 없다.
제아무리 혈기 넘치는 젊은이라도, 투왕과 만나고 싶다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을 수 있는 자는 흑도와 백도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들다.
‘서신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어. 그러나 내 짐작이 옳다면…….’
양천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상당히 흥분한 것이다.
“이놈, 권박을 쓴다고?”
“그렇습니다.”
“실전 능력도 탁월하고 무공의 근본 실력도 좋군. 이 정도 실력이면, 백도 놈들이 그렇게 찬양하는 일룡삼봉(一龍三鳳)에 비해 모자람이 없겠어.”
흑도의 정보원들을 꿰뚫어 보는 안목에 극상승의 암기술을 구사하는 여아(女兒).
약관의 나이로 백도 최고의 후기지수급 무공을 지닌 것은 물론, 당당히 투왕을 만나고 싶다 외친 배포.
“날 만나고 싶다? 좋지. 만나게 해 줘야지.”
양천의 안광에 심상치 않은 빛이 감돌았다.
“다만, 놈들이 정말 무종문의 후예라면 말이지.”
* * *
“뭐, 뭐라고?!”
“목소리 죽이시지요.”
가득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당상아와 제갈아연은 근처에 없었다. 옆에는 패율만 있을 뿐이었다.
가득상이 인상을 썼다.
“하면, 당 소저를 데리고 온 이유가 양천이 암기의 고수를 원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소?”
“그렇습니다.”
연호정은 여전히 그를 대사형처럼 대했지만, 가득상은 달랐다. 장단을 맞춰 줄 정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패율이 물었다.
“그 양반이 왜 암기술의 고수를 원한다는 거냐?”
물론 과거에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걸 떠나, 연호정 역시 양천의 위치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효율의 문제 때문입니다.”
“효율?”
“그렇습니다.”
“자세하게 설명해 보거라.”
“흑도는 백도와 성장 배경이 다릅니다. 그건 알고 계시지요?”
모르겠는데……?
패율이 가득상을 힐끔거렸다.
가득상은 못마땅한 얼굴로, 하지만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설명했다.
“백도, 즉 정파는 민중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도덕적 이상향입니다.”
“도덕적 이상향이라?”
“백도 최고의 가치는 협(俠)과 정의(正義)입니다. 약자의 편에서 악(惡)을 허물어트리고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이념이 집약된, 말하자면 인간 대다수가 바라는 평화의 세상을 추구하지요.”
패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백도, 정도라는 길만 표방했을 뿐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들으니 확실히 이해가 갔다.
“그렇지. 그래서 인의예지(仁義禮智)도 중시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흑도는 다릅니다. 흑도란 곧, 도덕적 이상향으로 날아오르지 못한 염원의 잔해라고 볼 수 있죠.”
“그것 참 머리 아픈 말이군. 염원의 잔해라니?”
연호정이 가득상의 말을 받았다.
“백도가 민중의 이상향이라면, 흑도는 민중의 현실입니다.”
“현실이라…….”
“훔치고, 죽이고, 능욕하고, 억압합니다. 그것은 짐승의 세계와 다르지 않아요. 인간 역시 대자연을 이루고 있는 하나의 종(種)이라는 관점에서, 흑도는 인간의 본성, 짐승의 본능을 극대화한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흐음.”
독특한 설명이었다.
누구도 백도와 흑도를 이런 식으로 설명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흥미로웠고, 신기하게도 이해가 쏙쏙 된다.
“그래서 두 길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습니다. 민중의 염원으로 곧게 뻗어 나간 백도에는 힘이면 힘, 격식이면 격식, 법도면 법도 등 명확한 체계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흑도는 다르지.”
“그렇습니다. 흑도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멀리 보지 않고 눈앞의 생존만을 중시합니다. 오늘 하루 생존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지요. 그들의 세상은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안전하게 힘을 비축할 시간도 없습니다.”
“왜?”
“법도가 무너졌으니까요.”
패율의 눈이 빛났다.
“그렇군. 운 좋게 천고의 절학을 얻었다 해도, 그걸 수련하다가 도둑놈에게 칼 맞아 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렇습니다.”
“참으로 여유가 없는 것들이로군. 그 또한 법도가 무너졌기 때문인가?”
연호정의 얼굴에 씁쓸함이 어렸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세상이 공평하고 정의로워져야 한다고. 그 말을 반대로 해석하면, 아직도 세상은 불공평하고 정의롭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
“정치가 추구하는 이상은 언제나 그랬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실패했지요.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상과 현실의 괴리만 커졌을 뿐.”
“그건 좀…… 슬픈 얘기군.”
“그래도 이상을 추구해야 하지요. 하늘에 닿을 수 없다고 손을 뻗지 않으면, 모두가 땅 밑을 전전하는 짐승이 될 뿐입니다. 최소한의 규칙이 무너져 버리는 것이지요.”
“음.”
연호정이 눈을 빛냈다.
“다시 흑도로 돌아와서, 결국 그들은 힘으로는 결코 백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요.”
“최소한의 규칙이 없으니 힘도 못 키우는 것이로군.”
“예. 그리고 양천도 그걸 알고 있을 겁니다. 흑도의 정보력과 생존 능력은 굉장하지만, 진정 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선 실질적인 힘이 필요합니다.”
순간 패율이 탄식을 터트렸다.
“아! 그래서 암기를?!”
“그렇습니다.”
연호정이 주먹을 들어 올렸다.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어린애일지라도 독과 암기를 쥐여 주면 고수를 죽일 수 있습니다. 양천이 생각이 있다면 흑도의 고질적인 문제를 뿌리부터 고치려 들겠지만, 문제는 시간입니다.”
“흑도를 완전히 무장시키기 전까지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무림 최고의 살상력을 지닌 독과 암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로군.”
“그렇습니다.”
패율이 입맛을 다셨다.
“자네가 당문의 여식을 데려온 이유를 알겠군.”
“…….”
가득상이 무서운 눈으로 연호정을 노려보았다.
“연 공자.”
이번만큼은 연호정도 그를 대사형처럼 대할 수 없었다.
“말씀하시오.”
“당신은 내 친구요. 그리고 나는, 당신이 과격한 판단은 내려도 틀린 판단을 내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소.”
“…….”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했소. 당 소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왔잖소. 그저 당신이 필요하니 와 달라는 말 한마디로 연관도 없는 사람을 끌어들인 격이오.”
“그게 어쨌다는 것이오?”
“뭐, 뭐라고?”
연호정의 눈이 차가워졌다.
“따지고 들자면 할 말은 많지만, 지금은 한마디만 하겠소.”
“…….”
“규칙 없이 싸우는 놈들을 상대하려면 이쪽 역시 도덕은 잠시 내려놔야 하오.”
가득상이 버럭 소리쳤다.
“그건 놈들과 맞붙었을 때의 문제요! 당신은 당 소저에게 미리 설명해 줄 수 있었음에도……!”
“만약 그녀가 오지 않겠다고 하면?”
“그때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지!”
“그럴 수 없소.”
“왜!!”
“실패하면 안 되니까.”
분노 가득한 눈으로 연호정을 보던 가득상이 몸을 홱 돌려 나가 버렸다.
패율이 헛기침을 했다.
“저 녀석, 은근히 성깔이 있었군.”
“좋은 사람입니다.”
“으응?”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씁쓸함과 고집이 섞인 묘한 미소였다.
“익살과 거친 인상 속에 가려진 후개의 저 정의로움과 담백함이야말로 백도의 표상입니다.”
“…….”
“그래서 저는 후개가 좋습니다. 후개야말로 이 세상에 없어선 안 될 진짜 협사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협사 놈이 실무조의 대장인 자네에게 실망한 것 같네만. 임무에 지장이 가면 어찌하나?”
“지장은 없습니다.”
“자신하나?”
“예.”
“어째서?”
연호정이 눈을 감았다.
“그래도 후개는 절 이해해 주리라 믿으니까요.”
이틀 후.
전신을 흑색 피풍의로 감싼 일곱 고수가 연호정 일행이 장악해 버린 염마방에 나타났다.
“무종문의 후예를 자처하는 놈들이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