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거짓된 왕 (2)
천성이란 타고난 품성을 뜻한다.
연호정은 분명 천성이 선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악한 품성을 타고났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는 강한 성품을 타고났다.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대쪽 같은 성품이다. 그의 천성은 그토록 강인하고 꼿꼿했다.
그러나 세상은 타고난 품성만으로 헤쳐 나가기에는 지나치게 거칠었다.
연호정은 그러한 세상살이를 겪으며, 유연해지는 법을 배웠다. 상대를 속이는 법, 속지 않는 법,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법, 나아가 비굴해지는 법도 익혔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있어서, 그는 언제나 강하고 뻣뻣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반드시 그래야 할 필요가 없다면 중요한 순간에도 비굴해지지 않는다.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능글맞게 굴지도 않다.
언제나처럼 강하고 떳떳하게.
잔수 따위 일절 쓰지 않는 당당한 정면 돌파다.
“양 부주라…….”
양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세 살배기 어린애라도 알 수 있을 만큼 심사가 불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처음이로구나. 이 나를 그따위 어쭙잖은 호칭으로 부르는 사람은.”
“그렇소?”
말투 한번 가관이다.
물끄러미 연호정을 보던 양천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성천십삼좌, 그 무적의 이름 아래 살아온 세월이 얼마이던가.
누구도 자신 앞에선 고개를 빳빳이 들지 못했다. 누구도 제 앞에서 거만을 떨지 못했고, 언감생심 속이려 들지도, 떠보려 들지도 못했다.
거의 생소함에 가까운 반응 앞에서, 놀랍게도 양천은 분노보다 흥미가 이는 것을 느꼈다.
“굳이 할 필요 없는 얘기인 듯하지만, 내가 누구인지 모르진 않겠지?”
“아니까 찾아온 것 아니겠소.”
“이 나를 알고도 말투가 그따위란 말이냐?”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글쎄? 설령 당신이 황제라도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찾아온 이상, 내 말투는 달라지지 않았을 거요.”
“뭐라?”
“나는 투왕 양천의 위상을 보고 찾아온 게 아니외다. 그의 능력과 미래를 보고 찾아왔소.”
“허!”
“사람이 사람을 배우러 온 자리외다. 응당 인생을 걸어도 될 만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고개를 조아리겠지만, 아직 양 부주께서는 이 사람에게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지 못했소.”
양천이 피식 웃었다.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지 못했다? 이건 또 재미있는 말이다.
강호 무림에서 무공은 곧 힘이요, 별호는 권력이다.
자신은 왕이었다. 무공만으로 무림 최정상 권력자임을 증명해 낸 입지전적인 인물인 것이다.
그런 자신에게 아직 증명을 못 했다니, 참으로 깜찍한 놈이 아닌가.
너무 의외였을까? 이번에도 양천은 분노보다 흥미가 더 동하는 것을 느꼈다.
“내가 네 녀석에게 따로 증명해야 한다는 뜻이렷다?”
“물론이오.”
“앞뒤가 바뀌었구나. 주군이 수하를 간택하는 경우는 많았어도, 수하가 주군을 간택하는 경우는 고금에 없었느니라.”
“있었소. 정녕 없다고 믿는다면, 최초의 경험이라 생각하시오.”
“크하하하!”
양천은 저도 모르게 대소를 터트렸다.
쿠구구궁!
묵룡전(墨龍殿)이 통째로 울리며 천장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이것은 일부러 내공을 방출한 것이 아니었다. 양천의 감정이 격해짐에 따라 지닌바 내공이 무의식적으로 뿜어져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이 정도다.
무의식중에 발출된 내공 기파만으로도 이 거대한 바위의 대전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절대적인 내공이다.
‘오랜만이다.’
웃음에 섞인 충격파만으로 전신이 삐걱거릴 정도.
하지만 그 경악스러운 힘을 앞에 두고, 연호정은 서서히 흥분되는 기분을 느꼈다.
‘오랜만이야. 이 정도 힘은.’
골수를 끓게 하고 내장을 익혀 버릴 것 같은 초월자의 힘.
아버지인 연위를 볼 때도, 모용군이나 당관을 볼 때도 지닌 힘의 농도와 무리(武理)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와는 차원이 다른 양천의 힘을 대하니, 놀라움보다도 익숙함과 흥분이 느껴졌다.
‘그래, 그곳에 있었다.’
문득 연호정은 눈이 부시는 것을 느꼈다.
‘나 역시 그곳에 있었어.’
사신무의 모든 신기(神技)를 완성하고, 무한에 가깝도록 불어난 홍천기를 기반으로 풍뢰(風雷)를 부르는 도끼와 강철 쇠사슬을 휘두르던 흑도의 제왕.
천하를 상대로 일장 박투를 벌였던 무림 최강의 승부사는 바로 저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 아니, 저보다 한 계단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자신 있게 천하제일이라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천하 최강을 논할 때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위대한 그 이름.
흑도대종사(黑道大宗師), 흑암(黑暗)의 제왕이라 불리던 과거가 전신의 감각을 일깨웠다.
‘한데.’
실재했던 과거의 환상에 잠시 취했던 연호정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이건 뭐지?’
양천의 압도적인 기파.
그러나 연호정은 그 무적의 기파 속에 드리워진 한 줄기 그림자를 느꼈다.
그것은 설명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무언가였다.
돌돌 말린 먼지 뭉치가 끼어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적어도 양천 정도의 초고수가 털지도 않고 품고 다닐 잔해는 아니었다.
‘뭔가가 달라. 그러고 보니, 양천의 힘이 이 정도였던가?’
연호정은 내심 의아함을 떨치지 못했다.
‘분명 대단하긴 하지만, 내 기억에 이것보다는 훨씬 더…….’
이윽고 양천이 웃음을 거두었다.
“수하로서, 모실 만한 가치가 있는 주군인지를 살펴보겠다? 그거참 재미있군.”
“그렇소?”
“차라리 저 백도 문파의 우두머리가 찾아와 그런 말을 했다면 일장(一掌)에 머리통을 부숴 버렸을 것이다.”
위협적인 언사였다. 물론 연호정의 표정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 단단함이 마음에 들었는지, 양천의 얼굴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많이 봐줘도 이립이 채 되지 않은 듯하구나.”
“생각보다 더 젊소.”
“기질을 보아하니 천성이 강하고 호방하거늘, 그 무심하기 이를 데 없는 눈빛에 소인배의 성급함은 없구나. 지닌바 무공의 연원은 모르겠지만, 이미 일가를 이루어 자신만의 유파를 창설해도 무방할 경지로다.”
“…….”
“마음에 든다, 네놈.”
극찬이다. 그 이상이 없을 정도의 칭찬이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랬구나.”
“……?”
“너희가 호남에 진입하고 난 이후의 정보를 받아 보았다. 출발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귀주 쪽에서 들어온 것 같더군.”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역시나 정보력 하나는 일품이다. 아직 모든 흑도를 규합한 것이 아닌데도 이 정도, 과연 흑도의 정보력은 당대 무림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행 중 하나는 북쪽에서 온 것 같은데, 정확한 진입로는 불명이더군. 미리 호남의 분위기를 살펴볼 생각이었던 듯싶은데.”
패율을 말하는 것이다. 일부러 보내 놓고 우회한 보람이 있었다.
양천이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지. 호남으로 진입하는 무림인 중 의심스럽다고 판단되는 자들은 하나도 놓치지 말라 했거늘, 정작 네놈들이 우리 쪽 정보원을 죽였다고 들었다.”
“그렇소.”
“흑도의 무력은 수준 이하지만, 정보력과 침투 능력만큼은 최고라 할 만하다. 애초에 결이 달라.”
“그런 것 같더이다.”
“말하자면, 너는 누구도 알아채기 힘든 흑도 정보원의 눈을 모조리 찾아 없애 버린 격이다.”
양천의 눈이 형형해졌다.
“너였다. 일행인 암기의 고수가 아니라, 네 눈이 날카로웠던 것이야. 그래서 무종의 대표로 홀로 날 찾아온 것이겠지.”
날카로운 안목이었다.
성격은 달라질 수 있어도, 지닌바 능력까지 달라지진 않는다. 양천의 안목은 여전히 그 무공만큼이나 예리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내가 바로 일행의 중심이며, 무종문의 대표요.”
“네가 무종문의 누구이기에?”
“그것은 우리 사이가 더 편해지면 알려 드리겠소.”
양천의 눈이 처음으로 날카로워졌다.
“이 옷, 저 옷으로 몸뚱이 다 가려 놓은 주제에 나더러 믿으라 하는 것이냐?”
“그건 양 부주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오?”
“뭐라?”
연호정의 두 눈에 의미심장한 빛이 감돌았다.
“내 보기에, 당신도 꽤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는 것 같소.”
“……!”
“계절이 계절인지라 날이 쌀쌀해지긴 했소만, 양 부주 정도의 무공이라면 그런 거추장스러운 털옷 따위는 필요치 않아 보이는데.”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아시겠소? 나는 양 부주께도 선뜻 남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으리란 걸 확신하면서도 여기까지 왔소.”
“…….”
“양 부주가 무림에서 손에 꼽히는 고수라서? 그럴 리가. 그랬다면 내 말투가 이렇게 딱딱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애초에 당신이 아니라 소림의 권신(拳神)을 찾아갔겠지.”
순간 양천의 기파가 거칠게 일렁였다.
소림의 권신이란 곧 성천십삼좌의 일인이자 신선제왕의 일신(一神)을 뜻한다.
우위를 따지는 게 힘든 성천십삼좌에서도 최강이라는 이름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받는 사람.
바로 권신 무허대사였다.
“앞서 말했듯, 나는 양 부주의 무명과 실력만을 보고 온 게 아니오.”
“…….”
“양 부주께서 정녕 천하를 도모할 만한 그릇인지를 살펴보러 온 것이오.”
칼날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연호정을 노려보던 양천이 일순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패는 다 까지 말고 서로를 설득해 보자, 이것이냐?”
“설득은 양 부주께서만 하시면 되오. 나는 선택했으니까.”
따를 만한 사람이면 따른다. 따를 그릇이 안 되면 떠난다.
확고함을 넘어 어떠한 신념마저 느껴지는 발언이었다.
언제나 진리는 단순한 법이다. 그래서 양천은 복잡하게 말을 꼬는 사람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 연호정은 양천의 취향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이 되어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가만히 연호정을 살피던 양천이 입을 열었다.
“버겁구나.”
뜬금없는 말이었다. 연호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날카롭기 그지없던 양천의 눈빛이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참으로 버겁다. 이 부족한 사람에게 뒤늦게나마 햇살이 드리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본디 권좌에 앉은 자에게는 알아서 인재가 굴러 들어오는 것인지.”
간접적인 칭찬이다. 지금의 자신에게 큰 운이 들어왔다는 것은, 그만큼 연호정을 인정한다는 뜻과도 같았다.
양천이 웃으며 물었다.
“단순한 것을 좋아하느냐?”
“단순해지기까지가 어려운 법이오.”
“하하하! 네 말이 실로 옳다. 실로 옳아. 하면, 내가 네 녀석에게 어떤 식으로 증명하면 되겠느냐?”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의외로군.”
“무엇이?”
“더 많은 걸 물어볼 줄 알았소. 일행에 대해서도, 내 목적에 대해서도.”
양천이 답지 않게 익살맞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단순한 걸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 부분은, 일단 서로를 충분히 인정한 후에 논해 보자꾸나.”
됐다!
그 순간 연호정은 확신했다. 양천이 더 이상 다른 일행에게 흥미를 두지 않을 것임을.
양천의 흥미를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거면 됐다.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함께 온 일행의 거취가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연호정은 자신할 수 있었다.
양천이 자신을 믿어 줄 것임을. 자신만 손에 넣는다면, 함께 온 일행에게는 일절 눈을 돌리지 않을 것임을.
“당신이 내게 주군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당신의 꿈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를 말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호오?”
“장황하게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것 같으니, 분명한 대답을 요하는 질문으로 우리의 미래를 결정지어 봅시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양 부주께서 그리는 천하는 어디까지 속해 있소?”
“……?”
“중원에서 끝이오? 아니면…… 새외까지 뻗어 있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