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10화 (210/963)

210화. 거짓된 왕 (4)

“부주님.”

양천이 감았던 눈을 떴다.

어딘지 모르게 흐릿해 보이는 눈이다. 그 눈은 짙은 피로와 혼란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알 수 있었다. 주군의 눈은 피로와 혼란으로 가득하되, 그 안에 깃든 욕망은 반나절 전보다 훨씬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는 것을.

타오르는 야망의 불꽃이 온몸을 집어삼킬 것만 같다.

이 묵룡부조차도.

“무슨 일이냐, 백서(白鼠).”

백서. 양천 휘하 최고의 충신들이라는 십이지신(十二支神)의 좌장.

노인, 백서가 고개를 조아렸다.

“귀빈 측에서 당분간 머무를 외부 거처를 요구했습니다. 부주님께서 허가를 내리셨다기에 괜찮은 장원으로 인도 중입니다만…….”

진짜 그렇게 해도 되겠느냐는 말이었다.

양천의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다 들어주도록 하라.”

“……!”

백서의 눈에 기광이 떠올랐다.

원하는 게 있다면 다 들어주라고? 그 정도란 말인가?

“애초에 무리한 부탁은 하지도 않을 놈이며, 혹 무리한 부탁을 한다면 필시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니 웬만한 요구는 즉시 들어주도록 하라.”

“……부주님의 명을 받듭니다.”

재차 고개를 숙인 백서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물러났다.

그때, 양천이 물었다.

“물어보지 않는가?”

“……?”

“어찌하여 무종문의 후예를, 정확히는 정이라는 놈을 그리 우대해 주는지 묻지 않는가?”

다시 몸을 돌린 백서가 공손하게 허리를 접었다.

“부주님께서는 저의 주군이십니다. 수하는 주군의 판단에 의문을 표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런가?”

“그렇습니다.”

양천이 미소를 지었다.

흡족함과는 거리가 있는 미소였다.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지는 미소, 그러나 백서를 향한 근본적인 호감은 분명히 묻어났다.

“백서.”

“예, 부주님.”

“힘없는 자가 부르짖는 정의는 공허할 뿐이라네. 그렇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면, 힘없는 자가 부르짖은 야망에 혹한 자는 어떤 사람인가?”

“…….”

“그 말에 가슴이 뛰어 버린 힘 있는 자는, 어리석은 것일까?”

“부주님.”

백서가 고개를 들어 양천을 직시했다.

평소의 백서가 보여 주지 않던 또 다른 진지함이었다. 그래서일까? 그 모습은 무례하다기보단 오히려 당당해 보였다.

“부주님께서 어떤 길을 가시든, 부주님께서는 능히 천하를 거머쥘 자격이 있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

“뜻대로 하십시오. 저를 위시한 십이지신, 나아가 흑도의 문파들은 단순히 부주님의 무공을 보고 고개를 조아린 것이 아닙니다.”

양천의 눈이 빛났다.

“무공 때문이 아니다?”

“흑도의 생존 본능은, 어떤 의미로 난세를 살아가는 민초의 그것과 같습니다. 힘은 없지만, 그렇다고 지혜까지 없진 않지요.”

“내게 뭔가를 바라고 있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저희는 부주님께서 더 높은 곳으로 오르실 자격이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런 부주님을 모시고 있기에 저희의 삶도 더 나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

“부주님께서 걸으시는 길이 곧 천하이며, 부주님을 따르는 저희 모두의 희망도 그 길 위에 있습니다.”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네.”

“괜한 말로 부주님의 심기를 흐트러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네. 이만 나가 보게.”

“예.”

그렇게 백서가 물러났다.

현암문을 바라보던 양천의 얼굴에 일순 조소가 어렸다.

“모두의 염원이 이 어깨에 달렸다? 듣기에는 좋은 소리로구나.”

그는 연호정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네 녀석이 참으로 감당키 힘든 말을 입에 담는구나.’

‘감당키 힘들다고 생각한다면, 더는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을 것 같소.’

‘무슨 자신감이냐? 너 역시 홀로 천하를 거머쥘 힘이 없어 날 찾아온 게 아니더냐? 그만한 능력이 있었다면 굳이 그런 난장까지 치며 이쪽의 접근을 기다리지도 않았을 터.’

‘그렇소.’

‘네 재능과 배포는 대단히 뛰어나다. 그러나 드넓은 천하에 너와 같은 이가 어디 한둘이랴? 결국 너 역시, 조금 뛰어난 능력에 도취되어 천하에 눈을 돌린 오만한 놈이었구나.’

‘능력과 야망은 별개라오.’

‘별개지. 그러나 야망을 품은 무수히 많은 이 중 진정 꿈을 이루는 자는 한 줌에 불과해.’

냉정한 일갈에 위축이 될 법도 한데, 오히려 차갑게 웃던 놈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말을 돌리시는구려. 내 질문은 양 부주의 꿈이 중원에 국한되어 있는지, 아니면 새외까지 뻗어 있는지였소.’

‘대답할 가치가 없다. 이유인즉, 그것은 지금 당장 논의할 만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야. 제집 앞마당도 다스리지 못한 자가 어찌 마을을 일구겠는고?’

‘틀렸소.’

‘뭐라?’

‘양 부주께서는 본인이 닥친 현실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정작 바라봐야 할 곳은 닿지 않는 곳이라며 외면하고 있소.’

정말이지 새파랗게 어린놈한테 저런 말을 듣게 될 줄을 몰랐다.

절로 굳어 버린 얼굴로 설명을 요구하는 제게, 연호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더랬다.

‘중원은 마음만 먹는다고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앞마당이 아니외다. 신선제왕이라도 목숨을 걸지 않고선 그중 십분지 일도 얻기 힘든 난공불락의 요새와도 같소.’

‘……!’

‘그러나 중원을 넘어 새외까지 야망의 소쿠리 안에 담는 것은 배포의 문제요, 자세의 문제외다. 양 부주께서는 중원을 삼키려 들 생각에 급급할 뿐, 그 너머까지 눈을 돌리진 못했소.’

‘너는 모른다.’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는 듯해, 양천은 괜스레 입 안이 썼다.

‘진정 너는 모를 것이다. 새외가 어떠한 곳인지.’

‘……!’

‘놀란 얼굴이군. 왜? 내 말이 의심스러우냐?’

‘……아니오.’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면을 품고 있다. 성자(聖者)라 불린 자가 뒤로는 악행을 일삼는 악당일 수도 있고, 천하의 마두 소리를 듣는 자가 알고 보면 그저 누명을 썼을 뿐인 경우도 허다하지.’

‘…….’

‘알고서도 당하는 것이 강호요, 세상이거늘 새외까지 넘보겠다? 그것은 오만이다. 욕망에 사로잡혀 현실을 보지 못하는 애송이의 욕심에 불과해.’

‘중원도 같소.’

‘뭐?’

‘중원도 똑같다고 했소. 내 감히 단언컨대, 양 부주께 자금이 얼마나 많든 흑도의 전력을 얼마나 키우든, 백도 정파를 잡아먹기는 힘들 거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고양이가 힘을 얻으면 꾀를 쓸 생각은 하지 않고 섣불리 발톱부터 세우려 들지. 흑도도 같소. 양 부주의 능력을 떠나, 흑도 무림인들은 그렇게 분명 그렇게 행동할 거요. 이유를 아시오?’

‘……?!’

‘양 부주께서 흑도인들에게 어설픈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오.’

‘……!!’

‘천하로 눈을 돌리기 전에, 내 것으로 삼을 무기의 본질부터 파악했어야 했소. 그래서 여쭤본 것이오. 부주께서 품은 야망의 끝이 어디인지를.’

‘…….’

‘안타깝구려. 부주께서는 내게 주군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했소.’

‘증명치 못했다……. 허허, 이 내가 자네의 주군으로 어울리지 않는단 말이지?’

‘그러나.’

‘……?’

‘군신지간이란 능력과 야망의 증명만으로 맺어지는 것은 아닌바, 솔직한 심정을 말하리다. 첫인상에 불과하지만, 난 양 부주가 마음에 드오.’

‘……!’

‘닷새 후, 묵룡부의 조직 체제 개편을 위한 보고서를 완성하겠소. 그때 다시 봅시다.’

‘조직 체제 개편이라…… 생각해 둔 바가 있다는 게냐?’

‘나는 준비도 없이 전장에 나서는 바보가 아니오.’

‘만일 내가 그 보고서만 날름 삼키고 널 내친다면?’

‘내 목숨값이라고 생각하겠소.’

‘허허허!’

연호정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귓가를 울렸다.

양천의 눈이 깊어졌다.

“어설픈 희망이라.”

희망에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 타인에게 희망을 주는 행위가 어설퍼서는 안 될 이유다.

섣불리 남발하다 보면 반드시 파탄이 나게 되니까.

“허허.”

양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 양천이, 이립에도 이르지 못한 핏덩이에게 천하인(天下人)의 자세를 배우게 될 줄이야.”

그는 묵룡전을 나서기 전, 연호정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보고서의 완성을 위해 이것저것 필요한 게 생길 수도 있소. 필요한 게 있다면 즉시 요구할 테니, 수하들에게 잘 설명해 주시길.’

참으로 당돌한 놈이 아닌가.

흥미로운 일행이라 생각해 주시하고 있었거늘, 알고 보니 그쪽에서 먼저 자신을 주시하고 있었다.

만나서 가치를 판단하려 했거늘, 반대로 상대에게 이쪽의 그릇을 평가당했다.

그야말로 범상치 않은 놈이었다. 그놈은 자신을 이용해 천하를 손에 넣겠다고 당당하게 외친 것도 모자라, 함께하고 싶다면 마음가짐부터 고쳐먹으라 호통까지 치고 나갔다.

세상에 이런 놈이 또 있을까.

‘문제는.’

양천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놈의 그 오만에 가까운 당당함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버렸다는 것이지.’

선을 넘을 수 있느냐?

놈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선을 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선이라는 게 없었다.

천하제일을 논하는 절대고수인 자신조차 장기의 말로 여길 정도로.

‘처음이군.’

처음이었다. 명령에 복종할 줄만 아는 인형이 아닌, 주군과 나란히 말을 몰 줄 아는 인재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상대의 나이와 경험이 아닌, 실력과 이상만으로 혹하게 되는 인재를 만난 것은.

양천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나에게도 네놈에게도,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닷새가 되겠구나.”

* * *

묵룡부가 자리한 악록산(岳麓山)은 호남성의 성도 장사(長沙)와 지척이었다.

연호정 일행은 장사에 제법 큼직한 장원을 얻었다. 물론 비용과 생활 편의 전반에 관한 건 전부 묵룡부에서 부담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요?”

가득상의 물음에 연호정은 이렇게 답했다.

“그냥 사기 좀 쳤을 뿐이오.”

기가 막히는 대답이었다. 제갈아연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투왕을 상대로 사기를 쳐? 그런 게 먹혀들 만한 사람이야?”

“그 양반은 사람 아니냐.”

“아무리 그래도.”

“원래 자기는 절대 안 당할 거라고 믿는 자를 속이는 게 훨씬 쉬워. 마음의 부담만 걷어 내면, 그 정도 위인 속이는 것쯤이야 그리 어렵지 않아.”

패율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장강 물도 팔아먹을 놈.”

당상아는 혼이 나간 얼굴로 말했다.

“셋째는 대체 못 하는 게 뭐야?”

모두가 당상아를 보며 눈을 끔뻑였다.

당상아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 저도 모르게 그만…… 너무 몰입했나 봐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솔직히 이 정도로 좋은 결과가 나올 줄은 몰랐소. 양천 그 양반, 생각보다 인재난이 심각했던 모양이외다.”

가득상이 물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우리는 편해진 거야?”

“그렇소. 양천은 내게 집중하고 있소. 다른 분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신경도 쓰지 않을 거요. 나만 잘 다루면 알아서 딸려 올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거 좋군.”

가득상의 눈이 반짝였다.

왜 연호정이 홀로 가서 담판을 지었는지 알 것 같았다. 양천의 주의를 본인에게 온전히 집중시키고, 남은 네 명이서 이곳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풀어 가기를 원해서였던 것이다.

제갈아연이 연호정의 어깨를 두들겼다.

“고생했다야.”

“이 정도로 뭘.”

“어쨌든, 이제부터 시작이란 말이네?”

“그런 셈이지.”

“근데 뭐 알아낸 건 없어? 양천과 독대하면서 말이야.”

순간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새외라.’

새외에 관해서는 일부러 언급했다. 상대가 그쪽과 관련이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양천은 이렇게 말했다.

‘진정 너는 모를 것이다. 새외가 어떠한 곳인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부분을 물고 늘어져 더 알아내고 싶었지만, 결국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임무 전체를 망칠 수도 있으니까.

양천도 바보는 아니다. 지금은 자신의 말에 홀려 넋이 나갔지만, 조금만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곧장 의심의 시선이 날아올 것이다.

‘천천히 하자. 아직 시간은 많아.’

연호정이 나직이 심호흡했다.

“더 알아봐야지. 아직은 이렇다 저렇다 말하긴 어려워.”

“흠.”

그때였다.

가득상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연호정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방도의 전음이오?”

“그, 그렇소.”

“무슨 소식이기에 그리 놀라는 거요?”

가득상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말했다.

“……지휘권자께서 지척에 계신다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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