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와신상담(臥薪嘗膽) (2)
강량의 뒤를 쫓으며 연호정은 생각했다.
‘그건 분명 귀영신보(鬼影神步)였다.’
피풍의로 전신을 둘러싼 외양.
키가 제법 크고 덩치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보행은 산뜻했으며, 산뜻한 보행과는 달리 기도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했다.
연호정은 한순간에 그 모든 것을 파악해 낼 수 있었다.
무종지벽을 돌파하고, 사신기(四神氣)가 전부 정식의 경지에 진입했다. 그의 오감은 한번 포착한 이의 모든 것을 읽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진기(眞氣)를 읽진 못했다.’
거리가 워낙 떨어져 있었고 탁 트인 곳인 데다가 사람도 많았다.
연호정이 제아무리 강해도, 그 먼 거리에서 움직이는 사람의 진기 특성까지 알아내긴 힘들다.
다만 그 움직임. 흑제성 오대신장 중 하나이자 철혈의 승부사로 이름 높았던 강량 특유의 귀영신보는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평범(平凡) 속의 비범(非凡).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독특한 박자감. 강량도 싸움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그 박자감을 자유자재로 운용할 수 있었다.’
즉, 지금의 강량은 귀영신보를 대성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역사가 바뀌었다 한들 깨달음의 깊이까지 달라지긴 어려울 테니까.
‘너냐?’
몰아치는 바람을 헤치고 나아가는 연호정의 두 눈에 격동이 어렸다.
‘정말 너냐?!’
귀철검문이 멸문한 것은 묵룡부 때문이다. 즉, 양천이 시킨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녀석이라면 그럴 수 있어.’
연호정은 강량을 떠올렸다.
경험과 연륜이 쌓여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게 되었지만, 천성이 용맹하고 한번 마음먹은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뤄 내는 집요한 남자의 눈빛을.
‘녀석이라면,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라도 적진을 둘러보러 왔을 것이다.’
적진도 어지간해야 둘러볼 배짱이 생기는 법이다. 묵룡부, 아니 투왕 양천이 개입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지간한 무인은 찾아올 엄두도 못 낼 것이다.
하지만 강량이라면 가능하다. 강량은 원래 그런 놈이었다. 상대가 강자건 약자건, 한번 점찍은 적은 자기 목숨이 날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잡아 죽이는 놈이었다.
‘정말 너라면…….’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까.
강량과는 과거에도 우연히 만났다. 힘으로 그를 굴복시킨 후 손을 잡긴 했으나, 운명이란 놈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절대 함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시기, 그 당시의 환경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살려 두지도 않았을 놈.
그런 강량을, 이렇게 또 우연히 만나게 되는가.
‘……!’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저 멀리, 피풍의를 걸친 흑의인이 한참 동안 악록산을 주시하는 게 보였다.
그리고 전신 가득 강렬한 살기를 뿜는 것까지.
연호정의 표정이 돌변했다.
‘귀왕진기(鬼王眞氣)!’
살기에 묻어 나오는 특유의 살벌한 기운.
그가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수준이 낮고, 연마도 덜 되었으며, 심동이 격해 지나치게 거칠어 보이지만.
‘분명 귀왕진기다!’
흑도 무림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극상승의 내공심법이다. 귀철검문의 문주와 후계자를 제외하면 전반부조차 전수하지 않는 비밀스러운 신공이었다.
‘너구나!’
정말 강량이었다.
벅찬 마음에 저도 모르게 발이 먼저 나갈 뻔했다. 연호정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애써 억눌렀다.
스륵.
이내 마음을 다스린 그가 청룡기를 끌어 올렸다.
극한까지 뽑아내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정제하여 무형(無形)으로 뽑아낸 음(陰)의 청룡기다.
우우우웅.
사방으로 퍼진 청룡기가 근방의 인기척을 모조리 훑고 지나갔다. 주변에 사람이 많은 만큼, 청룡기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기척이 포착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없군.’
하지만 없다.
수상한 자가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청룡기에 걸린 이 중, 수상쩍은 내공을 익히거나 은밀한 힘을 숨긴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안심해도 되는가?’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그럴 리가.’
모용군은 철두철미한 자다.
느닷없이 호남성으로 왔는데, 그것이 순수한 의도일 리는 없다. 모용군은 분명 이번 임무 외, 뭔가 술책을 부리기 위해 세상에 나온 것이다.
‘모용군은 어지간해서는 홀로 움직이지 않아. 하지만 후개에게 듣기로, 수하를 데리고 오지 않았다고 했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은신에 능한 호위를 데려왔겠지.’
그것은 비단 모용군이라서가 아니었다. 고관대작들이 호위무사를 대동하듯, 강호에서 위치가 높은 이들은 하나같이 호위를 대동한다.
다만 드러내고 다니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
‘만약 정말 은신에 능한 호위를 데리고 왔다면, 내 표정 변화를 눈치채 놓고도 딸려 보내지 않았을 리가 없어.’
입맛이 썼다.
청룡기의 기감에도 걸리지 않는 자라니? 이 정도면 업계 최고 수준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엄청난 자를 데리고 왔군.’
그때였다.
스르륵.
강량으로 추정되는 흑의인이 움직였다.
파아앙.
뛰는 건 아니지만 속도가 상당하다.
어느새 동부 숲 쪽으로 향하는 흑의인을 보며, 연호정은 기가 차는 것을 느꼈다.
‘저, 저 자식이!’
바보 아닌가, 저거?
귀철검문의 후계자를 놓쳤다면, 당연히 묵룡부에서도 그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것이다.
한데도 저 바보 같은 보행은 뭔가?
누가 봐도 고급스러운 무리(武理)가 묻어나는 보법이었다. 묵룡부가 있는 악록산을 노려보며 살기를 뿜던 자가, 고급의 보법을 써서 휙 하니 떠나고 있다.
뉘라서 의심을 안 하겠는가?
스르르륵.
순간 연호정은 움찔했다.
‘있었군, 역시.’
청룡기에 수상한 자가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그건 자신을 향한 시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묵룡부의 앞마당이고, 당연히 헤아릴 수 없는 정보원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다.
그리고 그 정보원들의 눈이, 일제히 강량에게 향하는 게 느껴졌다.
시선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나머지 연호정마저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였다. 역시나 흑도의 정보원은 백도 측과 차원을 달리한다는 게 새삼 실감 났다.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멍청한 놈!’
경동하는 마음을 다잡지 못한 것인지, 귀영신보를 본격적으로 펼치고 있었다.
눈썰미 좋은 사람이면 저 보법이 귀철검문의 무공이라는 걸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곧장 강량의 뒤를 쫓으려던 연호정은 순간 움찔했다.
‘…….’
빌어먹을.
‘분명 붙었어.’
시선이나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연호정은 확신했다. 모용군의 눈이 지금 자신을 보고 있음을.
이유인즉, 자신이라도 똑같이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기랄. 찾아서 죽여 버릴 수도 없고.’
찾는다고 찾아질 놈 같지도 않았다.
‘일단 내 요구를 들어줄…… 헉!’
잠시 멈칫한 새에 강량으로 추정되는 흑의인이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연호정은 마음이 급해지는 걸 느꼈다.
저 숲은 누가 봐도 위험했다. 사방이 둘러싸인 데다가 흐르는 물소리로 보면 계곡도 있다는 건데, 저런 곳으로 무턱대고 들어갔다간 포위당하기 제격이었다.
아니, 포위 이전에 함정을 치고 있을 확률이 극도로 높았다.
그렇다고 전음(傳音)을 보낼 수는 없었다. 저 얼치기 같은 행동을 봤을 때, 자칫 잘못하면 자신까지 얽힐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강량을 구하자고 임무를 죽 쑬 순 없다.
하지만 임무를 달성하자고 강량이 죽는 꼴을 볼 수도 없다.
스륵.
강량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연호정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어떻게 하지. 그냥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인연은 여기서 끝인가? 과거로 돌아온 지금, 다시 마주친 강량과의 운명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혈향 한 줌으로 끝나 버리는 것인가?
그때였다.
스스스.
현무기가 꿈틀거렸고, 동시에 주작기가 솟구쳤다.
‘살기?!’
살기다. 그것도 대단히 음험하고 뾰족한 살기였다.
그리고 그 살기는, 강량이 들어간 숲에서부터 풍겨 나오고 있었다.
연호정은 눈을 감았다.
‘……빌어먹을 자식 같으니라고.’
우우우웅.
“이봐.”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청룡기가 육신을 극도로 안정시켜 주었다.
흑도와 부딪치며 주로 청룡기를 썼다. 당분간은 청룡기와 실전 박투술로 승부를 봐야 한다.
“내 말 듣고 있다는 거 안다.”
연호정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모용가주가 날 감시하라고 보냈겠지만, 이곳은 묵룡부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흑도의 정보원이야.”
통할지, 통하지 않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 한다.
이러고도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면…… 그때는 어쩔 수 없다.
‘선택을 내렸으니, 책임도 져야지.’
번쩍!
연호정이 눈을 부릅떴다.
“나는 지금부터 네 주군이 있는 위치를 흑도 정보원 모두에게 무차별로 알릴 것이다. 물론 나라는 걸 알아선 안 되니 전음(傳音)으로 쏴 댈 거야.”
숨어서 연호정을 지켜보던 무연은 내심 깜짝 놀랐다.
연호정이 말을 이었다.
“이 정보를 네 주군에게 알릴지, 네 주군의 명령대로 날 따라다닐지는 알아서 결정하도록 해. 미리 말해 두지만, 모용세가 측 사람이 왔다는 걸 알면 묵룡부 측에서도 만만치 않은 전력을 보낼 거다.”
“……!!”
“판단은 알아서 하도록.”
파삭!
말이 끝나는 순간, 연호정이 질풍처럼 움직였다.
* * *
쩌어어엉! 퍼억!
묵직한 대검이 흑색 양 가면을 쓴 무사의 머리통을 세로로 쪼개 버렸다.
강력하고 패도적인 일검이었다. 단순하고 정직하지만, 워낙에 빨라서 검력(劍力) 자체가 강했다.
파라라락!
흑양대(黑羊隊) 삼십여 명이 순식간에 강량의 주변을 에워쌌다.
치고 들어가는가 싶으면 진을 형성하고, 진을 형성하는가 싶으면 어느새 공격이 들어온다.
단순하면서도 무척이나 효과적인 전술이었다. 서로가 손발이 맞지 않으면 절대 쓸 수 없는, 대(對) 무림인용 진법이라 할 수 있겠다.
“후욱.”
주위를 둘러보는 강량의 눈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강하다!’
전투가 벌어진 후, 죽인 적의 숫자는 아홉이었다.
그 아홉을 죽이는 데에 귀왕진기를 삼 할 이상 소진했다.
‘이놈들, 강해!’
이 정도면 검문 내 최고 정예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파아아앙!
사방에서 장력이 쏟아졌다. 숨을 고르는 그 찰나의 틈을 노린 것이다.
‘빌어먹을!’
강량의 몸이 회전했다.
퍼퍼퍼퍼펑!
원형을 그린 참격(斬擊)에 흑양대의 장력이 모조리 흩어졌다.
생각보다 그리 강하지 않은 장력이었다. 하지만 장력의 숫자가 이십이 넘었다. 강량은 검병을 쥔 손바닥이 찢어질 듯 욱신거리는 걸 느꼈다.
‘개 같은!’
흑양대는 절대 흥분해서 날뛰지 않았다.
철저하고 집요했다. 나아가 상대의 박자감을 흐트러트리는 데에 능하여, 힘을 모은다 싶은 순간에 공격이 들어왔다.
그 공격이 얼마나 치밀하고 정교했는지, 벌써 호흡이 흐트러지려고 했다.
호흡이 흐트러지면 내력 운용이 매끄럽지 않게 되고, 내력 운용이 매끄럽지 않으면 무공 본연의 위력이 살아나지 않는다.
더 섬뜩한 것은, 대장인 흑장은 팔짱을 낀 채 관전만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강량이 외쳤다.
“이 새끼들아! 똑바로 덤벼!”
파아아악!
맹수처럼 좌측으로 돌진한 강량이 대검을 내리쳤다.
쩌어어엉!
확실히 강량의 무공은 대단했다.
일검을 내리치는데 대기가 불타오르는 듯했다. 그 일검을 막기 위해 흑양대원 넷이서 힘을 모아야 했다.
파라라라락!
강량의 몸이 일순 폭풍처럼 주변을 휩쓸었다.
쩌저저정! 퍼억! 퍼어억!
귀영신보에 이은 귀영검식(鬼影劍式)이었다. 상당한 내공 소모를 감수하고 펼치는 살기 넘치는 기예에 흑양대 세 명의 목숨이 또 날아갔다.
“콜록! 허억. 허억.”
동시에 강량의 호흡도 더 거칠어졌다.
우우우우웅!
귀왕진기가 끓는 물처럼 단전을 마구 흔들었다.
‘빌어먹을!’
힘으로 진법을 뒤흔들고 셋을 더 죽였다.
그런데도 흑양대는 여전했다. 그 불길하기 짝이 없는 가면을 쓴 채 똑같은 자세로 자신을 노리는데, 종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살벌함이 발목을 잡아채는 듯했다.
강량은 이를 악물었다.
뚫고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