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와신상담(臥薪嘗膽) (6)
“그래서 놓쳤다?”
“……죄송합니다.”
무연은 어지간해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건 주군인 모용군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고개를 숙였다. 이번만큼은 송구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뜻이리라.
모용군이 피식 웃었다.
“아닐세. 그놈이 얼마나 머리가 좋은 놈인지, 자네에게 미리 일러 두었어야 했어. 잘못이라면 내 잘못이지, 자네 잘못은 아닐세.”
마음이 더 불편해질 뿐인 말이었다. 그게 진심이라는 걸 알기에 더더욱.
“한 가지 알아 두게. 그놈은 절대 내게 위해를 가할 수 없네.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예.”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무조건 명령대로만 움직이면 되네.”
“알겠습니다.”
“고생했네. 자네도 좀 쉬는 게 좋겠어.”
스르륵.
무연이 말없이 사라졌다.
기가 막힌 신법이었다. 빤히 보고 있었음에도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진다. 신법이 아니라 도술(道術), 혹은 술법(術法)을 연상케 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그놈 참, 그런 잔머리를 굴려야 했을 정도로 다급했단 말인가?”
무연을 용서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무연은 연호정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맹이 아닌 가문에 있다가, 이번 일을 기점으로 따라나선 그였다.
게다가 무연의 존재로 인해 연호정이 얼마나 다급해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상대의 정체가 무엇인지, 연호정이 왜 그리 다급하게 굴었는지까지도 알아 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괜찮은 수확이었다.
그때, 창가로 전서구 한 마리가 날아왔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전서구를 받아 든 그가 다리에 매인 서신을 풀었다.
“음, 빠르군.”
모용군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어렸다.
“다른 건 몰라도, 호남성에서만큼은 개방보다 우리가 낫지.”
묵룡부는 참으로 간이 큰 놈들이다.
하기야 신선제왕의 일인이 주인으로 있는 곳이니, 육대세가의 일익이 자리한 곳에 똬리를 튼 것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다만, 그에 대한 준비는 보다 철저히 해야만 했다.
모용세가가 작정하면 얼마나 흉포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지독해질 수 있는지 묵룡부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모용군은 미리 적어 두었던 서신을 고이 접어 전서구의 다리에 매달았다.
파라라락!
재차 전서구를 날린 모용군은 차를 홀짝였다.
“차 맛 좋군.”
이제 준비는 다 됐다. 다시 답신만 받으면, 모든 준비는 끝이다.
“힘내게, 연 군장. 자네가 제대로 날뛰어 줘야 내 면이 설 것이네.”
* * *
나흘 후.
“후우, 다 됐다.”
“고생했다.”
“고생은 무슨. 너야말로 고생 많았지.”
“그럼 내가 고생한 걸로 치지.”
제갈아연이 피식 웃었다.
“그래, 네가 고생 다 했다.”
장난처럼 말했지만, 그것은 제갈아연의 진심이기도 했다.
‘이 녀석은 대체 뭘까.’
지금껏 수도 없이 생각해 봤지만, 정말이지 연호정이 가진 능력의 끝이 어디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약관을 갓 넘긴 나이로 무종지벽을 돌파했다? 그야말로 천하가 놀랄 일이지만, 희대의 재능을 타고났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상식을 벗어난 재능이나, 고래로 그런 천재들이 종종 있었으니까.
하지만 연호정이 대단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제갈아연은 연호정의 진짜 무서움이 무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녀석, 정말 왕의 재목을 타고나기라도 한 것일까?’
묵룡부의 조직 개편도를 만들면서, 제갈아연은 연호정의 안목에 몇 번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오류를 집어내는데, 그중 대부분이 아차 하면 놓칠 만큼 빈틈을 찾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조직도를 구상하는 건 전략이나 전술을 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전략의 귀재라는 제갈세가의 후인인 자신이 연호정보다 더 뛰어나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드러난 결과는 전혀 달랐다.
“대체 넌 정체가 뭐야?”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아직도 그 소리냐?”
“아니, 진짜 궁금해서 그래. 무공이야 그렇다 쳐도, 이런 부분은 어지간한 석학들도 생각지 못하는 부분이라고.”
“어릴 때 한량 짓 하고 다니면서, 이런저런 공부도 많이 해 뒀다.”
“뭘 어떻게 공부했길래 못하는 게 없냐고.”
제갈아연이 어이없어할 만도 하다.
실제로 연호정은 이런 방면에서 제대로 공부해 본 적은 없었다. 다만 그에게는, 하루하루 치열하게 머리를 굴려도 살아남기 힘든 전장에서 승리의 깃발을 휘날린 경험이 있었다.
흑제성이라는 거대 단체를 세웠으며, 그곳에서 인선을 배치하고 조직을 창설하는 데에 직접 참여한 사람이 그였다.
머리로 배운 게 아니라 현장에서 조직의 허(虛)와 실(實)을 들여다본 경험이 무려 십 년이 넘는다. 당연히 제갈아연보다 뛰어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 정도면 봐 줄 만하군.”
“봐 줄 만하다니?”
제갈아연이 드물게 정색했다.
“이거, 정말 양천에게 줄 거야?”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나는 이거 위험하다고 생각해.”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적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런 방법은 어지간하면 써먹고 싶지 않아. 대신, 적과 거래할 때는 어설픈 걸 내밀어선 안 된다는 확신은 있어.”
“휴우.”
“걱정하지 마. 제아무리 조직도가 탄탄해도, 그 조직을 이루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제갈아연이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만든 거 아니야. 묵룡부의 미래를 생각해서.”
“그렇지. 하지만 이걸 넘겨준다 한들 당장은 이렇게 꾸리지 못해. 각 분야의 전문가라 할 수 있는 인재들이 적으니까.”
“차라리 이걸 무림맹에…….”
“안 돼.”
연호정은 단호하게 일축했다.
“무림맹은 연합체야. 겉으로는 표를 내지 않지만, 각자의 이해관계가 뚜렷하지. 그런 곳에 이런 조직도는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서로 권력을 쥐기 위해 아수라장이 될 조직도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모용군을 봐. 말은 하지 않지만, 그의 당원들 역시 모용군을 내세워 최고가 되려는 것일 뿐 실제로 모용군을 당 대표로 세운 게 아니야.”
제갈아연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럼 흑도는 다르다는 거야?”
“적어도 지금은.”
“왜 그렇게 생각해?”
“흑도는 악랄해. 그중 진짜 악랄한 놈들은 최소한의 규칙도 없이 싸우지. 하지만 흑도에는 백도가 갖지 못한 장점이 하나 있어.”
“그게 뭔데?”
“억압받은 세월이 길었다는 것.”
제갈아연이 눈을 크게 떴다.
“그게 왜 장점이야?”
“장점이지. 하나로 모였을 때, 그들이 품고 있는 한(恨)이 얼마만큼의 열정과 희망으로 뒤바뀔지를 생각한다면.”
순간 제갈아연은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연호정이 씁쓸하게 웃었다.
“세상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나?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지만, 반대로 탁해진 물이 언제고 맑아질 수도 있어. 백도도, 흑도도 그와 같아.”
“…….”
“그래서 난, 흑도가 이렇게 시궁창이 되어 버린 데에는 백도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해.”
“백도의 책임도 있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내 생각이다. 너무 신경 쓰지 마라.”
제갈아연이 피식 웃었다.
“신경 안 쓰거든? 그냥 멋있는 말 같아서 줄줄 외워 두려고 하는 거다.”
“웃기고 있네.”
“그래서, 양천한테는 언제 갈 거야? 내일이었나?”
“그래.”
제갈아연의 얼굴에 짙은 피로가 드리워졌다. 의자에 늘어지게 앉은 그녀가 툴툴거렸다.
“그럼 오늘은 그냥 쉬어도 되는 거지? 할 일도 없는데.”
“그래. 좀 쉬어.”
“……어째 너는 할 일이 남았다는 말처럼 들리네?”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무늬만이라도 조장은 조장인데, 하루 일 없다고 마냥 쉬고 있을 순 없잖아?”
“그러지 말고 나랑 술이나 한잔할래?”
“임무 중인 거 잊으신 건 아니죠, 군사님?”
“개뿔.”
“쉬어라.”
그 말을 끝으로 연호정이 방에서 나섰다.
제갈아연은 웃으며 문을 바라보았다.
“참, 어쩌다 너랑 이렇게 얽히게 되었는지. 진짜 묘한 인연이다, 그렇지?”
밖으로 나온 연호정은 가득상과 패율이 하는 일을 둘러보았다.
가득상은 매일같이 담벼락을 마주하고 방도들이 주는 정보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정보들을 토대로 현재 장사의 분위기와 악록산, 나아가 호남성 전체의 분위기를 정리해 알려 주었다.
반면 패율은 하루하루가 수련의 연속이었다. 일전에 연호정에게 보여 주었던 검술을 단련하는데, 그 짧은 새에 숙련도가 놀랍도록 상승했다.
그리고 당상아.
‘…….’
연호정은 품에 든 얇고 긴 원통을 만지작거렸다.
길이는 한 자가 조금 안 되고, 두께도 손가락 한 마디가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백 단위의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 버릴 만한 암기들이 내장되어 있었다. 우모침의 일종으로, 머리카락처럼 얇은 침에 극독이 묻어 있었다.
물론 연호정이 가져온 원통에는 암기가 없었다. 이미 한 번 격발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연호정은 결심했다.
‘괜스레 숨길 이유는 없겠지. 보여 주자.’
지금껏 당상아에게 보여 주지 않은 까닭은 그녀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녀는 경험이 적었다. 이런 임무도 처음이었다.
그렇다면 필시 이 물건의 출처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이고, 중요한 순간에 실수를 저지를 확률이 높아질 것이다.
‘그래도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는 노릇.’
차라리 보여 주고, 조금이라도 더 많은 조사를 하는 게 이득이었다. 그는 그렇게 판단했다.
연호정이 당상아의 거처로 향하려던 때였다.
끼이이익!
대문이 거칠게 열렸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장원에 들어온 사람은 바로 화원이었다.
‘뭐야?’
후욱.
화원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기파가 흘러나왔다.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냐?”
화원은 대답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연호정이 인상을 찡그렸다.
“할 말 있으면 빨리 해. 그 전에 꼴 보기 싫은 눈깔부터 접고.”
“너냐?”
“평소에 화술이 대단하다는 평가를 듣지 않나? 상대로 하여금 궁금증을 유발케 하는 거,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군.”
제법 능글맞은 대처였다. 하지만 화원은 장난할 기분이 아닌 듯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원숭이 주제에 왜 자꾸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츠츠츠츠.
화원의 뒤를 따라온 원각의 몸에서는 솔직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덜컹!
화원의 심상치 않은 기도에 원각의 살기까지 더해지자 일행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가득상과 패율, 제갈아연과 당상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원이 으르렁거렸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을 시, 너희 모두 이 자리에서…….”
“나 역시 마지막으로 말한다.”
연호정의 눈이 유리알처럼 투명해졌다.
훅.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기파가 단숨에 장원 전체를 장악했다. 녹청빛 푸르른 위엄, 청룡기의 발현이었다.
화원의 두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지금 당장 살기를 거두지 않으면, 날뛸 자리도 모르고 난장 치는 저 벌레 놈의 모가지부터 뽑고 네년을 단죄하겠다.”
“……!”
“싫은가? 좋아.”
우우우웅!
연호정의 동공이 일순 시퍼렇게 물들었다.
“안 그래도 기분 개 같은데, 잘 걸렸다 싶군.”
화원이 외쳤다.
“네놈들이 설마 귀철……!”
순간 그녀는 연호정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훅! 퍼어억!
“크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원각이 쓰러졌다. 깜짝 놀란 화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우두둑!
연호정이 원각의 가슴을 밟은 채 화원을 보았다.
나른한 듯, 혹은 무심한 듯.
필설로 형용키 힘든 광기 어린 안광에 화원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연호정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지 않겠나? 일단 이놈 목부터 뽑아야겠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