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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222화 (222/963)

222화. 뒤흔들다 (2)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양천의 눈이 빛났다.

‘웃어?’

놀랍게도 양천은 연호정의 웃음에서 그의 진심을 읽어 낼 수 없었다.

굳이 세상 경험이 많지 않더라도, 양천 정도의 경지를 쌓고 나면 사람의 본질을 한눈에 파악하는 것쯤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리고 실제로 양천은 연호정이란 청년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고 자신했다.

‘극한의 패도(覇道). 자신만의 확고한 선이 있지만, 필요하다면 어떤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는 놈.’

그것이 양천이 본 연호정이었다. 실제로 연호정의 성격과 비슷하기도 했다.

하지만 왜일까? 분명 본질은 읽었는데, 지금 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신(神)이 아닌 이상 어찌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겠느냐마는,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철저하게 숨길 줄 아는 놈은 또 처음이었다.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부주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내가 어찌 생각하는지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의미가 있소이다.”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무슨 의미? 만일 그 일을 벌인 게 정녕 네놈이라면, 내가 어떻게 나올지를 알고 싶은 것이냐?”

“아니오.”

“하면?”

연호정의 표정이 대번에 심드렁해졌다.

“전에 말했듯, 나는 부주가 멀리 보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소이다. 그리고 멀리 보는 사람인 만큼, 주관이 확실했으면 하오.”

“호오?”

“그래서 궁금한 것이오. 이런 질문이 무슨 가치가 있는지.”

양천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간 네가 보여 주던 당당한 모습과는 다르구나. 논점에서 벗어난 말로 주제를 흐리려 하진 않았으면 싶다만.”

“주제를 흐리려는 게 아니외다.”

“하면?”

“내 대답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소. 양 부주가 의심스럽다 생각한다면, 더 조사하고 파헤쳐서 진실이 무엇인지를 거머쥐면 그뿐이오.”

“……!”

“도달한 진실에 내 이름이 있다면, 그때 가서 날 잡아 두고 요리하면 그만 아니오? 하나, 내 대답 여하에 따라 반응이 달라질 거라면 자신이 없다는 뜻. 그러니 그런 질문을 던지는 건 진정 무의미하오.”

대표적으로 모용군을 들 수 있다.

물론 모용군도 가끔 찌르고 들어올 때가 있지만, 어지간하면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캐묻지는 않는다. 대개는 홀로 알아보고 계획한 후, 이놈을 요리할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해 말을 던진다.

상대가 빠져나갈 여지를 두지 않는 철두철미함을 미덕으로 삼는 것이다. 비록 그 잘난 능력을 권력을 얻기 위해서만 쓰는 탓에 높은 평가를 받진 못하지만, 적어도 그의 그릇은 작지 않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다시 말하겠소. 내 대답은 의미가 없소. 중요한 것은 부주의 능력과 결단이오.”

“…….”

“따라서 논제에서 벗어난 말이 아니오. 그럴 수가 없지. 부주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내 주둥이가 뱉은 모든 말의 중심에는 양 부주가 있소이다.”

양천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네 녀석, 아주 나를 가르치려고 작정을 했구나.”

“군자는 어린애의 투정에서도 배울 점을 찾는 법이오. 부끄러워하지 마시구려.”

“하하하!”

재차 광소를 터트리던 양천이 일순 웃음을 뚝 그치고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귀철검문의 후계자, 네가 빼돌렸느냐?”

똑같은 질문이었다.

놀랍게도, 이번만큼은 연호정 역시 순순히 대답했다.

“아니오.”

양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네가 아니다?”

“그렇소.”

“믿어도 되겠느냐?”

“판단은 부주의 몫이오.”

“묘한 대답이구나. 보통 그런 말은, 자신이 저지른 짓을 감추기 위해 애를 쓰는 자가 최후의 발악을 할 때나 뱉는 말이다.”

연호정의 얼굴에도 양천과 비슷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알겠소. 그만 가르치려 들 테니, 믿고 싶은 대로 믿으시오.”

“고집을 부리시겠다?”

“무공으로는 못 이겨도, 고집으로는 양 부주를 이길 수 있을 거요.”

“크하핫!”

이제야 진심이 가득 담긴 호탕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양천이 흡족한 듯 말했다.

“너를 믿는다.”

한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다. 의심할 거라면 애초에 믿지도 않는다.

양천은 그런 사람이었다. 아무 죄 없는 문파를 멸문시키고 흑도를 규합하는 과정에서 양민들에게까지 피해를 주었지만, 개인의 매력도 출중한 사람이었다.

사람은 언제나 양면성을 안고 살아가는 법이다.

강량에게 양천은 부모를 죽인 철천지원수지만, 그의 수하들에게 양천은 흑도의 희망일 것이다.

그래서 연호정은, 그런 양천을 속이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하기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지. 나를 주군으로 삼을 작정으로 온 놈이 쓸데없는 일로 거래를 망치려 들 필요는 없을 테니.”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세작일지도 모르지.”

상대의 의심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한마디였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천하 어떤 멍청이가 너 같은 인재를 세작으로 쓴단 말이냐.”

상식적으로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를 간과하고 있었다.

세작도 자원이 가능하다는 것.

“그 부분은 되었다. 한번 떠보겠답시고 물었더니, 되로 주고 말로 받았군.”

“기분은 좋아 보이는 것 같소.”

“좋지. 이미 거래는 구 할 이상 성사되었느니라. 남은 것은 확인뿐이야.”

“가장 긴장해야 할 순간이기도 하오.”

“네 녀석도 긴장이라는 걸 하느냐?”

“필요할 때는.”

미소 가득하던 양천의 얼굴에 언뜻 진지함이 드리워졌다.

“기실, 진정 묻고 싶은 것은 이것 말고도 꽤 많다. 뭐, 그거야 차차 물어보면 그만이다만.”

“…….”

“거래 성사가 코앞이니, 한번 물어나 보자꾸나.”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네 녀석이 원하는 지위가 무엇이냐? 본부에서 무슨 일을 하고 싶지?”

연호정의 안광이 벼락처럼 튀었다.

숨길 수 없는, 숨길 필요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는 이 얘기가 나오기만을 진심으로 고대하고 있었다.

“네 무공을 보면 당장 십이지신급의 수뇌부 자리에 앉혀도 이상하지 않다. 하나, 제아무리 나라 한들 그런 파격적인 인사 조치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느니라.”

“이해하오.”

“네 지혜와 조직 개편도를 보면 군사(軍師)로서의 재능도 출중해 보인다. 본부에는 정식으로 군사란 직책이 없으니, 네가 그 자리를 차지해도 크게 이상하지는 않겠다만.”

“문제는 휘하 병력이 따르냐, 마느냐겠지.”

“그렇다.”

만일 연호정이 군사 자리에 앉게 된다면, 그에게는 묵룡부의 전력 전체를 좌우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긴다.

군사라는 직책이 그렇다. 상황에 따라서는 부주조차도 군사의 말에 따라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권력이다.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지위이며, 한 조직의 병력을 넘어 운명을 좌우할 만한 위치라 할 수 있다.

물론 양천 역시 진심으로 연호정을 군사에 앉힐 생각은 없었다. 워낙에 뛰어난 인재라 탐이 나긴 하지만, 그 정도의 정치적 부담을 감수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턱없이 낮은 직책을 줄 수도 없다. 능력에 비해 낮은 직책은 필연코 업무의 효율성을 떨어트리는 법이야.”

양천이 은근하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만히 양천을 주시하던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어중간한 자리를 노리고 온 건 아니오.”

“그랬겠지.”

“그렇다고 주변 눈치나 봐 가면서 일하고 싶지도 않소이다.”

“네 성격에 잘도 눈치를 보겠다.”

“분명히 말하겠소. 나는 묵룡부의 수뇌부급으로 올라가길 원하오.”

“음.”

“부담스러운 인사라는 것은 알고 있소. 그리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것이 묵룡부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소.”

양천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이 자신감 넘치는 녀석은 자신의 권력이 아닌 묵룡부의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그래. 하면 어찌하면 좋겠느냐?”

“어중간한 건 싫고, 낮은 자리는 애초에 고려 사항이 아니오. 그렇다면 남는 건 수뇌부 자리인데, 그 자리에 앉으면 부주의 부담도 커질 것이고, 나 역시 쓸데없는 정쟁 따위에 심력을 소모해야 할 것이오.”

연호정의 눈이 번쩍였다.

“그렇다면, 내가 그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공(功)을 세워 돌아오면 되지 않소?”

양천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공을 세워 돌아온다?”

“그렇소.”

“거래 품목으로 조직 개편도까지 들고 왔으면서, 거기서 하나를 더 해 오겠다?”

“나 자신을 증명하는 것뿐이오. 거래가 성사되면 묵룡부 역시 내가 뼈를 묻어야 할 곳이 되는바, 부에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겠지.”

묵룡부의 성장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저지르겠다.

양천으로선 그야말로 짜릿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대사였다.

“하면, 어떤 공(功)을 세워 올 생각이냐?”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현재 묵룡부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소.”

“…….”

“어떻게 얻었는지는 모르겠소만, 놀랍게도 묵룡부의 자금력은 굉장하오. 장담할 순 없지만, 적어도 백도 무림맹보다 뒤처지지는 않는 것 같더군.”

“그렇다.”

“병력의 질적 문제가 있기는 한데, 이것은 애초에 단기간에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외다. 짧아도 오 년, 길면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는 문제요.”

“그 또한 그렇지.”

턱에서 손을 뗀 연호정이 웃으며 말했다.

“자금은 충분하고, 병력은 당장의 해결이 불가능한 문제고.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오.”

“……?”

“백도 무림으로 향하는 이득을 빼 오는 것.”

“……!”

“자금이야 부족하지 않지만, 향후 적이 될 자들에게 들어갈 자금을 뽑아 오는 건 분명 유의미한 공격이 될 것이오.”

양천의 눈이 흔들렸다.

“설마 무림맹을 건드리겠다는 것이냐?”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지나친 악수요. 충분한 준비가 될 때까지,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는 게 좋소.”

“물론 그렇지. 그렇다면 무림맹 모르게 그들에게 들어갈 자금을 끊어 놓겠다는 뜻인데, 그게 가능하겠느냐?”

무림맹의 눈은 중원 각지에 뻗어 있다.

이쪽에서 아무리 은밀하게 일을 처리한다고 한들 무림맹의 눈을 피하기란 힘들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곧장 전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가능하오. 적어도 호남성에서는.”

“……!!”

“호남과 강서는 상업이 발달한 내륙 지역인 만큼 무림맹과 연수한 상회나 전장도 많소. 나는 그것을 하나하나 끊어 내, 종국에는 호남성을 묵룡부의 세상으로 만들어 보겠소.”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적어도 무늬만 왕인 지금보다는 나을 거라고 보오만.”

“허어.”

양천이 혀를 내둘렀다.

“무림맹에 들키지 않고 그런 일을 저지르는 게 가능하다고 보느냐?”

“그러니 거래가 성사되어도 당장은 내게 직책을 주지 마시오. 철저하게 단독으로 움직일 테니까. 혹여 발각되어도 묵룡부와는 연이 없어야 하지 않겠소?”

“공(功)을 세우겠다는 말이 그럼……!”

“그렇소.”

연호정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면 목숨은 걸어야지.”

“허허허.”

“하나 따먹고 오겠소. 그때 내게 직책을 주시오. 그 이후엔 호남을 정리하겠소.”

그때, 회랑에서 백서가 나왔다.

“부주님.”

“어떻더냐?”

“십전(十全)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십전이라 함은 아무런 결함 없이 완벽하다는 뜻이었다. 즉, 흑도의 머리 좋은 이들 모두가 조직도에서 허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양천이 웃으며 연호정을 보았다.

“환영하네.”

연호정이 무릎을 꿇었다.

“무종문의 후계자 정(定)이 부주님께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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