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제왕의 귀환 (3)
모용군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이 시점에서, 하필 점창의 장로인 패율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었다.
‘네 녀석, 설마?’
그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몽의는 이전, 모용군이 살수와 함께 연호정에게 보냈던 점창의 고수였다.
물론 출신이 점창일 뿐 파문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인물이었다. 그는 장문인을 죽였고, 점창 최고의 비전이라는 사일검법(射日劍法)을 훔쳐 달아난 희대의 패륜아였다.
문제는 그가 모용군의 밑으로 들어오기 전, 명가 소속으로 음지에서 일했다는 것이다.
명가는 무림공적으로 선포되어 관련자들 전원이 처벌을 받았다. 지금도 맹의 뇌옥에는 명가의 무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즉, 모용군은 처벌받아 마땅한 자를 몰래 빼돌려 자신의 수하로 삼은 것이다.
모용군만 그런 짓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는 결코 소문이 나선 안 될 일로, 만일 대외적으로 알려진다면 모용군만이 아니라 관련자 전원이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따위로 나오겠다는 거냐?’
몽의에 관해 아무런 걱정을 하지 않았던 이유.
그것은 연호정과의 거래로 그 일을 마무리 지었기 때문이었다. 연호정이나 자신이나 상대를 물 먹이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르지만, 한번 지나간 일은 절대 다시 끄집어내지 않았다.
말하자면 그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그 규칙을 깨는 순간, 그때부터는 진짜 진흙탕 싸움으로 변하고야 마는 것이다.
“몽의라…….”
“그렇소, 몽의.”
모용군은 패율의 눈빛을 보았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이글거리고 있었지만, 그 화려한 불꽃을 얼음장처럼 차가운 이성으로 유지하고 있었다.
‘의외로군.’
자세히는 아니지만, 패율에 대해서도 이미 조사해 두었다. 이번 임무의 일원이니 당연했다.
‘전형적인 전투광. 다혈질적인 성격에 머리 쓰는 걸 싫어하는 호걸이라고 들었거늘.’
말하자면 연의(演義)에 나오는 장비 익덕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보고로는 분명 그렇게 전해 들었다.
‘하기야, 연호정 그놈이 어떤 놈인데 아무나 자기 휘하로 넣었겠나.’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패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모용군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말인가?”
“몽의 그놈, 본산에서 파문한 제자라는 건 알고 있소?”
“그 또한 알고 있네.”
“그놈은 본산 최고의 비기를 훔친 것도 모자라 장문인을 죽이고 달아나기까지 했소.”
“해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가?”
뻔뻔하기 그지없다.
패율은 솟구치는 살기를 애써 억눌렀다.
“구파일방과 육대세가는 백도를 걷는 명문이오. 그에 대해 알았다면, 적어도 본산에는 알려 줬어야 했소.”
모용군이 차갑게 웃었다.
“미안하지만 당시에는 그가 파문되었음을 알지 못했네. 뒤늦게야 사정을 들었을 뿐.”
“뭐라?”
“설령 알았다 한들, 제 놈이 먼저 찾아온 것을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패율의 목이 붉게 달아올랐다.
“정말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요?”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네.”
“당신이 몽의를 시켜……!”
“그리고 한마디 하겠네.”
파직!
모용군의 벼락과도 같은 안광에 공기가 한순간 뜨거워졌다.
“나는 자네에게 추궁을 받을 이유가 없다네. 게다가 이 자리는 공적인 자리야. 내 인내심이 제법 깊긴 하네만, 한낱 실무조의 조원 따위가 기어오르는 것을 계속 두고만 볼 거라고 생각하진 말게나.”
쓸데없는 말로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본론부터 꺼내라.
가만히 모용군을 노려보던 패율이 씹어뱉듯 말했다.
“연 조장의 정보부장 취임은 이틀 후요. 정보 탈취를 위한 시간은 열흘에서 보름. 그 안에 묵룡부를 잘 달궈 놓으라는 전언(傳言)이오.”
“그게 전부인가?”
“…….”
“알겠네. 이만 가 보게.”
자리에서 일어난 패율이 입을 열었다.
“공적인 전언은 이게 전부요. 그리고 이 말도 전해 달라 하더이다.”
“말씀하시게.”
“그대로 전하겠소. ‘먼저 선을 넘은 건 당신이니, 이는 선전 포고와도 같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당신의 배짱은 잘 보았으니, 이제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잘 지켜보도록 하라.’”
“…….”
“전언은 이것으로 끝이오.”
패율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가 버렸다. 더 있다가는 진짜로 검을 뽑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홀로 남게 된 모용군이 창가를 바라보았다.
“선을 넘었다?”
모용군의 입꼬리가 꿈틀거렸다.
“자네, 너무 말랑말랑하게 사는 거 아닌가? 이 정도로 선을 넘었다고 하면 안 되지.”
귀주상회의 상행조를 몰살하고 자신의 치부를 세상에서 지워 버린 행위.
도덕과 윤리를 운운하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이치 따위는 눈곱만큼도 모르는 바보들이라면, 그것을 두고 당장 들고일어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떼를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연호정은 아니었다. 화를 낼 거라곤 생각했지만, 이깟 일로 선을 넘었느니 마느니 할 줄은 몰랐다.
“어울리지도 않는 가면을 쓰진 말게나, 호정. 자네는 이보다 백 배는 더 지독해질 수 있는 사람 아니던가.”
모용군이 연호정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놈은 필요하다면 도덕과 윤리를 잠시 뒤로 제쳐 둘 만큼의 융통성이 있었다.
그래서 놈이 대단하고, 또한 위험한 것이다. 정작 중요한 순간에 무도(無道)한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사람은 드넓은 천하에서 채 한 줌도 안 되기 때문이다.
“다만…….”
모용군이 씁쓸하게 웃었다.
“눈치 하난 참으로 빠르군. 일련의 과정만 보고도 내가 왜 이리 움직였는지를 꿰뚫어 본 것 같은데.”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이는 곧, 자신이 직접 호남으로 온 이유를 짐작했다는 뜻이었다.
‘내가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모르겠지. 그러나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를 알았으니, 어떤 식으로든 대응해 올 것이다.’
일순 모용군의 얼굴이 강렬한 살기로 물들었다.
“……자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정말 이곳에서 묻어 버릴 수도 있다네.”
아마 이 이상 자신을 자극하진 않을 것이다. 자신 역시 놈을 더 자극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선전 포고 운운하며 제 놈 역시 화려하게 날뛰어 보겠다고 했으니, 필시 날카로운 비수를 갈아 놓을 작정이리라.
‘귀주상회를 건드리지는 못하겠지.’
놈은 귀주상회의 상행조가 다 죽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모용군은 확신했다. 연호정이 그 부분을 끄집어내 흔들지는 않을 거라고.
진상은 실무조 모르게 지휘권자가 어루만진 작품이지만, 어쨌든 그 일에 휩싸인 것은 실무조 전원이다. 무림맹을 위해서든 연가를 위해서든, 연호정은 결코 그 일을 끄집어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무연.”
“예, 가주님.”
“언 정주에게 말해 놓게. 묵룡부의 정보부에서 본가를 들쑤실 수도 있다고. 미리 대비해 놓으라고 전하게나.”
“명을 받듭니다.”
* * *
독한 백주 한 잔에 목구멍이 통째로 활활 타는 것 같았다.
‘모용군.’
차가운 눈으로 잔을 노려보는 연호정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살벌했다.
가득상과 당상아는 괜스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렇게까지 섬뜩한 얼굴을 한 연호정을 처음 본 것이다.
재차 잔을 채우고 그대로 비우니 목덜미가 빨갛게 변했다. 내공으로 주기(酒氣)를 억누르지 않는 것이다.
‘똥줄이 타는 건 알겠다만, 이번에는 좀 과했어.’
이번 한 수로 자신의 치부를 없앤 것도 모자라, 귀주상회와의 거래에서 우위에 설 작정일는지도 모른다.
과한 추측이다? 전혀. 모용군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당신이 힘을 불리는 것까지야 막지 않겠지만, 이따위로 놀면 안 되지.’
자신과 관계없는 일이다?
그렇다. 어떻게 생각하면 욕만 잔뜩 먹이고 끝내도 될 일이다. 모용군에게 이용당한 거나 마찬가지지만, 그로 인해 이쪽이 실질적으로 피해를 본 건 전혀 없었다.
그냥 이대로 묻어도 괜찮다. 그래도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그러나 연호정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 이유는, 이번에 모용군이 저지른 일이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고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귀주상회? 처음은 그 정도지만, 나중에는 무림맹을 넘어 이 싸움과 관계없는 양민들까지 끌어들일 것이다.
아니, 이미 끌어들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실행조로 꾸민 그림자 무사들은 필시 가족이 있을 것이고, 그 가족이 모용세가의 인질로 잡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중원 전체의 운명을 건 싸움도 아니요, 그저 자신의 사익을 위해 사람을 죽인 것도 모자라 양민까지 건드린 셈이다.
연호정은 그런 모용군을 용서할 수 없었다.
‘짐승도 사냥은 할지언정 꽃을 짓밟지는 않는 법이다. 당신은 지금 아무 상관도 없는 꽃밭까지 뒤집은 셈이야.’
차라리 잘 됐다고 할까.
멸사군에 집중한 이후로 모용군을 향한 긴장이 다소 느슨해진 감이 있었다.
모용군은 이번 한 수로 본인이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 인간인지를 새삼 일깨워 주었다.
‘인간 연호정이 아닌, 흑도의 제왕 흑암제의 싸움을 보여 주마.’
이제 더는 물렁하게 대하지 않을 것이다. 연호정은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때, 가득상이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커허험! 거 사람 참, 안주도 없이.”
“…….”
“인상 좀 피쇼. 이거 뭐 살벌해서 살 수가 있나. 자꾸 오줌 나오려고 해.”
연호정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오.”
“아니오. 미안할 것까지는 없고.”
가득상이 입맛을 다셨다.
“이번에는 그 씹새가 좀 심하긴 했지.”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렸다. 아마 모용군을 두고 저리 말하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상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당장 잡아 죽일 수도 없는 노릇 아니겠소. 그 새끼가 한 짓은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임무 중이외다. 뒤통수를 갈기고 싶어도 당장은 힘들 거요.”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지 마라.
가득상의 말은 그런 뜻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연호정 역시 동감하고 있었다.
“미안하오. 괜히 신경 쓰게 했소이다.”
“괜찮다니까. 아닌 말로, 나도 처음 그 얘기 들었을 땐 꼭지가 뒤집히는 줄 알았수다. 내가 낼 화까지 댁이 다 내 줘서 오히려 고맙소.”
연호정의 얼굴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내 잘못이오. 그 인간이 수작을 부릴 줄은 알았지만, 이번만큼은 운명 공동체라 할 수 있으니 선을 넘진 않을 거라 생각했거든.”
“선을 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싶었던 거지.”
“그래, 그 말이 맞소.”
가득상이 한숨을 쉬었다.
“안타깝지만 어쩌겠소?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사전에 알았어도 막기는 힘들었을 거요.”
맞는 말이었다. 애초에 이쪽에서 다룰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 미친놈이 또 그런 짓을 벌이지 못하도록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 버리는 것뿐이외다.”
“그렇군.”
“힘내시구려. 임무가 아직 끝나지 않았잖소. 마지막이니만큼, 더 긴장합시다.”
“후개의 말이 옳소.”
그때였다.
“으아아아! 드디어 도착했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푸스스스.
연호정의 몸에서 일순 강렬한 주향이 풍겨 나왔다. 청룡기로 주독을 모조리 증발시켜 버린 것이다.
일행이 방을 나서 마당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대문을 열고 들어온 두 남녀가 있었다. 한 명은 제갈아연이었고, 다른 한 명은 피풍의로 얼굴까지 가린 건장한 청년이었다.
스르륵.
이내 청년이 얼굴을 드러냈다.
다소 피폐해진 얼굴. 표정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강량.”
“……은공을 뵙소.”
연호정이 턱짓으로 객당을 가리켰다.
“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