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31화 (231/963)

231화. 갈등 (1)

묵룡부 내 거처로 들어온 연호정은 잠시 침상에 앉았다.

“…….”

삭막하기 짝이 없는 얼굴. 두 눈은 밤의 사막처럼 건조하고도 싸늘했다.

“……역시 그랬군.”

넘겨짚지 않으려 했다. 심증은 있었지만, 명확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진 절대 확신하지 않으려 했다.

이제는 확신해도 될 것 같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양천이 직접 한 말이니까.

‘사음교.’

광신삼교(狂信三敎).

새외 어딘가에 똬리를 튼 정체불명의 종교 집단들.

각기 사음교, 광혈교(狂血敎), 신화교(神火敎)로 불리며, 같은 신(神)을 모시되 제각기 숭배하는 방식이 다르다.

숭배하는 방식이 다르니 경전도, 교리도 다르다. 수많은 무공을 공유하고 있지만, 교도들의 기질과 성격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그들끼리는 같은 신을 모신다는 것 외에도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힘이다.

‘역시 그랬어. 그놈들이 일시에 발호하여 중원을 단숨에 피바다로 만든 것은, 뛰어난 전력(戰力) 외에 수십 년에 걸친 사전 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야.’

벽산연가는 강하다.

하지만 과거 연가는 허무하리만치 쉽게 멸문을 당했다. 이유인즉, 내부에서 정보를 전달해 주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세작이 바로 태경으로, 만일 그자가 없었다면 연가는 훨씬 더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일도 다르지 않다.

명가가 모용가와 합심하여 연가에 세작을 심었다면, 광신삼교는 묵룡부를 통해 중원 곳곳을 살피며 정세를 조율하려 했다. 그러다 충분히 공략할 만하다는 판단이 설 때, 번개처럼 치고 들어와 중원을 피바다로 만들 것이다.

현명하고도 음습하며, 대담하고도 흉악한 계략.

‘너희의 방법을 탓하지는 않겠다. 결국 세상은 먹느냐 먹히느냐니까. 도덕과 윤리 이전에, 패자에게 영광은 없어.’

연호정의 볼이 연신 씰룩거렸다.

치솟는 살기를 억누르는 그였다. 한가득했던 의혹이 한 방에 정리되자 속은 시원해졌지만, 그 이상의 살기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니 너희도 너무 억울해하지 말길 바란다. 이쪽이 더 독하게 난장을 피우더라도.’

아직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다짐했다. 어떤 비판과 비난을 감수하고라도 놈들을 물리치겠다고. 아니, 아예 발붙일 곳이 없도록 터전까지도 모조리 불살라 버리겠다고.

우우우웅.

미처 억누르지 못한 살기가 주작기를 건드렸다.

화르르륵.

심장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붉게 일렁이는 주작기가 심박수를 빠르게 올렸다. 체온이 상승하자, 화기(火氣)가 범람하는 강물처럼 혈도 곳곳을 누볐다.

“후우.”

연호정은 가벼운 심호흡과 함께 현무기를 끌어 올렸다.

치이익.

주작기가 투정을 부렸다. 너도 화가 나지 않냐며, 당장 놈들을 죽이러 가자며 비통에 찬 울음을 토해 냈다.

‘침착해라.’

연호정은 웃었다. 웃음으로 감정을 다스렸다.

‘지금 화내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 분노와 한(恨)은,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퍼부어도 늦지 않아.’

문득 흑색 양 가면의 무사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그놈.’

묵룡전에 모였던 수많은 수뇌부 중 유독 한 사람에게 눈이 갔다.

그는 바로 흑양이었다. 양천 휘하에서 활동하는 특수한 위치의 고수들, 십이지신의 일인으로 독특한 기질을 품고 있는 고수였다.

‘그때 마주쳤던 그놈들은 흑양 휘하의 부대였다. 삼교의 박투술인 부절박을 이용했으며, 강량을 몰아붙였던 특유의 차륜진은 본디 사음교의 진법을 개량한 것…….’

연호정의 미소에 서늘한 기운이 어렸다.

시종 무뚝뚝하던 흑양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네가 사음의 주구인 걸 아는데, 임무가 중하다 한들 어찌 너를 잡지 않고 가겠느냐.’

스르르륵.

현무기가 주작기를 완전하게 잠재웠다.

재차 심호흡을 한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정을 다스렸으니, 이제는 해야 할 일을 할 차례였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보부장님.”

묘한 목소리였다.

나이가 제법 있는 듯하면서도 왠지 생각보다는 젊을 것 같은 음성.

“누구신지?”

“십이지신의 환사입니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쿠구구궁!

문이 열리고 환사가 들어왔다.

환사가 고개를 숙였다.

“정보부장님을 뵙습니다.”

연호정 역시 짧게 인사했다.

“오늘부로 정보부장이 된 정이오. 환사 선배를 뵙소.”

환사가 고개를 더욱 깊이 숙였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희 십이지신은 묵룡부 산하 사대조직(四大組織)의 수장보다 서열이 낮습니다.”

묵룡부의 사대조직이란 말 그대로 네 개의 주요 조직을 뜻한다.

정보를 다루는 정보부(情報部), 부내 감찰은 물론 흑도 무림의 정세를 파악, 실질적인 대응까지 계획하는 감찰부(監察部), 부내 모든 무력 조직을 총괄하는 용아원(龍牙院), 그리고 묵룡부의 자금 관리를 담당하는 용각원(龍角院)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공석이면 몰라도 사석에서까지 그럴 순 없소. 그러나 내 나름의 위치가 있으니, 이 이상 고개를 숙이진 않으리다.”

상당히 시원시원하게 나온다.

상대가 먼저 이렇게 나와 주는데 환사라고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해서, 어쩐 일로 오셨소?”

환사의 눈이 반짝였다.

“부주님께서 직접 부장님의 일을 도우라 명하셨습니다. 자잘한 심부름은 모두 제게 맡기시면 됩니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정말 그래도 되겠소?”

“물론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부주님의 명령인 만큼,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그 말인즉, 양천의 명령이 아니었으면 절대 오지 않았을 거란 뜻이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당분간은 나 혼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오. 나중에 때 되면 부를 테니, 이만 들어가 쉬시오.”

“오늘은 쉬시는 겁니까?”

“아니오. 정보원에 들러 부의 내정과 그간의 사정을 전부 파악해 볼 생각이오.”

“그럼 같이 가시지요. 보좌토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십시다.”

안 그래도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이럴 때는 업무에 집중하는 게 최고다.

그렇게 두 사람은 거처에서 나와 정보원으로 향했다.

침묵을 참기 어려웠음일까? 환사가 입을 열었다.

“화원과 다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원숭이 말이오?”

“……그렇습니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주변에서 자꾸만 물어보는군.”

“한 식구가 되었으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지요.”

“걱정하지 마시오. 한번 지나간 일은 훌훌 털어 버리는 성격이니까.”

거짓말이다. 실제로 별문제 없을 것 같으면 금방 기억에서 지워 버리지만, 그게 아니면 절대 잊지 않는 사람이 연호정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으니까.

“화원에게는 따로 말해 두었습니다. 더는 말썽 피우지 말라고.”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셨소이다.”

“무슨 뜻입니까?”

“그이 성격을 보니, 남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것 같던데 말이오. 오히려 선배의 그 경고 때문에 언제 한번 깨물어 볼까, 하며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거요.”

환사의 눈이 반짝였다.

‘눈치가 빠르군.’

마찰을 빚은 상대의 성격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란 무척이나 어렵다.

하지만 이 비범한 청년은 그게 가능한 모양이었다.

‘부주님께서 괜히 눈여겨보신 게 아니다, 이 말인가.’

환사가 말했다.

“화원이 정말 앙심을 품고 있다면, 그건 스스로 명을 단축하는 짓일 뿐입니다.”

“그렇구려.”

“십이지신의 일원으로서 그녀를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선배가 대신 사과할 일은 아닌 것 같소. 게다가 그 일은 일단락되지 않았소? 굳이 다시 꺼낼 주제는 아니외다.”

“그렇군요.”

“그렇소.”

처음에도 그렇지만 무척이나 시원시원한 자다.

환사는 조금이지만 상대가 마음에 들었다.

‘하긴, 부주님께서 능력만 출중한 애송이한테 이런 중책을 맡기셨을 리 없지. 다 그만한 배포와 안목까지 갖추었으니 일임하셨을 것이다.’

묵룡부의 수뇌부 대부분이 이번 신임 정보부장을 고까운 시선으로 보고 있다. 아마 부주님께서 갈등을 만들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지 않으셨다면, 그중 서너 명은 진작 시비를 걸고 들어왔을 것이다.

환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신임 정보부장을 열렬히 환영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썩 좋게 보지도 않았다. 솔직히 부주님께서 지나치게 싸고도시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아직 더 지켜봐야겠지만…… 부주님의 총애를 받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연호정은 자신을 보는 환사의 눈빛이 조금이지만 부드러워졌음을 알아차렸다.

‘과연 만만치 않군.’

양천이 환사를 보낸 이유는 명확하다.

아직 기반이 없는 자신에게 힘을 실어 줌과 동시에, 심복인 십이지신을 붙여 줄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자라는 걸 묵룡부 전체에 알리겠다는 의도다.

나아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감시역이기도 할 것이다. 양천은 자신의 안목을 철저하게 믿지만, 동시에 세상일엔 변수가 많다는 것 역시 알고 있는 늙은 생강이었다.

‘미안하지만, 당신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보는 환사의 눈빛이 바뀌었다는 것은 곧 자신을 향한 경계가 옅어졌다는 것.

‘좋은 선물을 해 줬어.’

양천은 환사를 이용했지만, 연호정 역시 환사를 이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를 이용하여 폭죽을 터트릴 날은 그리 멀지 않았다.

“여기입니다.”

“크군.”

바위문의 크기는 실로 엄청났다. 묵룡전의 대문보다 세 배는 더 컸다.

쿠구구궁.

문이 열리자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거대한 동혈이 나타났다.

연호정의 눈이 반짝였다.

‘슬슬 시작해 볼까.’

* * *

“가주님!”

“무슨 일이신가?”

“실무조장에게서 서신이 왔습니다.”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이리 주게.”

놀랍게도 서신은 스무 장이 넘었다.

게다가 장마다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는데, 글자의 크기가 새끼손가락의 손톱보다도 작았다.

파라라락.

서신을 한 장, 한 장 찬찬히 읽어 내려 가던 모용군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벌써 이만큼이나 빼돌렸단 말인가?”

뭉치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서신이 전부 묵룡부 내의 극비 정보였다.

자금 운용 상황, 정보원의 활동 반경, 병력 배치는 물론 주요 수뇌부의 성격과 무공 경지까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야말로 천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든 보물이었다. 이 서신을 무사히 받은 것만으로도 이번 임무는 성공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대단하군.’

모용군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틀 전에 정보부장으로 취임했다고 들었거늘, 그 짧은 새에 이 많은 정보를 빼냈단 말인가?’

워낙에 일 잘하는 놈이라 달리 더 감탄할 것도 없을 줄 알았건만, 이런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정보를 죄다 짚어 가며 알맹이만 쏙쏙 뽑아낸 것도 모자라, 그 모든 내용을 이틀 만에 전달하는 대담함.

가히 걸물은 걸물이라 하겠다.

“실무조는?”

“현재 실무조장만 묵룡부에 들어갔습니다. 나머지는 장원에 거하고 있으며, 아마 며칠 내로 그들까지 부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겠지.”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이 정도로 만족할 놈이 아니야. 분명 더 뽑아 올 정보가 있을 것이다.”

한번 일에 착수하면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해내는 게 연호정이었다. 분명 이보다 더 큰 건수를 잡아 올 것이다.

“다만 이것을 먼저 보냈다는 것은, 나 역시 슬슬 준비를 하라는 뜻이겠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놈이 날 잡으러 오도록 부채질을 시작해야겠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