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33화 (233/963)

233화. 갈등 (3)

“뭐라?”

모용군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양천이 나를 보자고 했다고?”

“그, 그렇습니다.”

상상도 못 했던 전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양천이 직접 제게 만나자고 하다니? 하물며 그는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묵룡부의 주인이 아닌가.

자신이 아니라 세가의 장로가 왔다 한들 숨죽이고 있어야 마땅하거늘, 직접 보자고 연락이 와?

“실무조장에게선 따로 연락이 없었더냐?”

“없었습니다.”

“허!”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이건 양천에게 있어서 분명한 악수(惡手)다.

그간의 움직임으로도, 무림맹의 정보로도 묵룡부는 아직 세상에 나설 때가 아니었다.

한데 무림맹의 최고 수뇌부이자 봉공인 자신더러 보자고 해?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양천은 모르고 있다. 이미 우리에게 존재를 들켰다는 걸. 아니, 모른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맞아.’

탁자를 두들기는 모용군의 검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굳이? 무슨 의도로? 설마하니 양천씩이나 되는 자가 본인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모를 리는 없을 터인데?’

게다가 그의 곁에는 모사(謀士)도 있을 것이다.

묵룡부만 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서는 자금력은 물론 조직을 관리할 무수히 많은 인재도 필요한 법이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가 있어도 혼자서 그만한 조직을 꾸릴 순 없다.

순간 모용군의 눈이 번뜩였다.

‘설마 연호정 그놈이?’

잠시 의심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가능성은 작다. 이건 녀석에게도 악수(惡手)야. 묵룡부에 진심으로 투신할 생각이 아닌 바에야 굳이 이런 계략을 꾸밀 이유가 없어.’

연호정은 무서운 놈이지만, 적어도 자신의 무대는 잘 아는 놈이다.

선을 넘을 수도 있고, 상상하지 못한 술수로 자신을 당황케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놈은 싸움의 품격을 알았다.

진흙탕에서는 뒹굴지 않는 깔끔한 싸움. 그것이 녀석의 선이자 한계였고, 그래서 더 무서운 놈이었다.

‘설마하니, 이번 일로 내게 앙심을 품고?’

모용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무리 생각해도 녀석은 아니야.’

귀주상회의 상행조 일 때문에?

절대 그럴 리 없다. 그 일로 화가 났을 수는 있겠지만, 이런 식으로 대응할 필요는 전혀 없다.

만일 이번 일을 꾸민 게 정말 연호정이라면, 그건 너무나도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이유인즉, 이래 봤자 녀석에겐 아무 이득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사적인 복수심에 사로잡혀 임무는 물론 실무조까지도 위험에 빠트릴 짓을, 그 연호정이 할 리는 없잖은가.

“……일단은.”

모용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일단 기다린다. 실무조장에게 연락이 온 이후에 판단을 내려도 늦지 않아.”

반나절 후.

“가주님! 실무조장에게서 서신이 왔습니다!”

“이리 주게.”

황급히 서신을 펼친 모용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두절미하고 말하겠소. 양천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파악하지 못했소. 다만 예상키로 당신을 통해 본맹의 내부 사정을 들여다볼 생각인 것 같은데, 이 역시 확신하기 어렵소.

기본적인 정보 탈취는 끝났지만, 정보원 내부의 특급 기밀 사항이 있소. 분류하기까지 예상되는 소요 시간이 최소 보름, 최대 한 달이오. 그때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주시오.

마지막으로, 조언 하나 하리다. 어지간하면 양천을 만나지 마시오. 그는 우리 생각보다 더 뛰어난 자요. 자칫 함정에 빠지면 여러모로 골치 아플 테니, 제자리를 지키시오.

“음.”

모용군의 눈이 반짝였다.

‘기밀 정보라.’

아랫배가 후끈 달아올랐다.

‘역시 연호정 이놈 짓은 아니야.’

지금 이놈은 임무에 집중하고 있다. ‘기밀’ 운운했다면 그 말에 책임을 지겠다는 뜻, 그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라는 걸 확신했기에 서신에 적었을 것이다.

‘그래서 연락이 늦었군.’

모용군은 다시 한번 서신을 읽어 내렸다.

‘시간을 끌어 달라?’

양천을 만나지 말라고 한 이유 역시 거기에 있을 것이다.

‘흐음…….’

모용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다 좋아. 좋은데…… 양천이 그리 뛰어나단 말이지?’

제자리를 지키란다.

정말이지 연호정이 아니었다면 당장 달려가 혓바닥을 뽑아 버렸을 한마디다.

곰곰이 생각하던 모용군이 일순 미소를 지었다.

“굳이 피할 필요가 있겠는가, 호정? 양천이 그리도 뛰어난 자라면, 이참에 만나서 그 기량을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물론 무공으로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무공으로 겨뤄 볼 만한 자가 아니었다.

‘양천 역시 한 조직의 수장. 당장 전쟁을 벌일 게 아니라면 대담 중에 손을 쓸 리가 없다.’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게다가 연호정이 생각보다 더 뛰어난 자라고 했으니, 나름의 품격을 아는 자일 것이다.

‘물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만반의 준비는 해야겠지만.’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양천에게 온 연락을 역추적해 보았는가?”

“물론입니다.”

“결과는?”

“최초 발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철저하게 숨기고 있는 모양입니다.”

“음, 역시.”

모용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대로 답신을 보내게. 장소와 시일은 내가 정하겠다고.”

* * *

“모용가주에게서 회답이 왔네.”

양천의 얼굴에 감탄이 일었다.

“장소와 시일은 자신이 정하겠다고 하더군.”

“그랬습니까?”

“그렇다네.”

“솔직히 한 방에 성공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는데…… 그 사람, 보통이 아니군요.”

“그러게나 말일세. 내 당대 모용가주가 문무겸전의 천재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 정도로 화끈한 배포를 보여줄 줄은 몰랐네.”

양천은 모용군의 결단에 크게 감탄한 모양이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모용군은 무림맹의 봉공이자 모용세가의 수장이다. 역추적도 안 되는 연락망으로 서신을 보내온 수상한 자와 위험을 무릅쓰고 만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심지어 발신자가 투왕 양천이었다. 이렇게까지 곧장 답변을 보낼 만한 상대가 아니란 말이다.

“과연 호남의 패왕이라 불린다더니, 그 명성이 거짓이 아니었구먼.”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양천 역시 당당하게 흑도를 표방한 인물이었다. 백도 무림인들을 샌님이라 비웃으며 혀를 차던 사람이니, 이 정도 화통함을 보여 준 모용군에게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역시.’

연호정이 차갑게 웃었다.

‘그럴 줄 알았다, 모용군.’

모용군이 연호정을 파악하고 있듯, 연호정 역시 모용군을 파악하고 있다.

‘자극하면 바로 튀어나올 줄 알았지.’

현재 모용군은 심리적으로 우위에 있다.

철두철미한 사람이라도 가장 방심하기 마련인 시기라는 것이다. 게다가 실무조를 다스리는 지휘권자의 위치라는 것도 모용군의 방심을 부추겼을 것이다.

연호정의 선택은 바로 ‘자극’이었다.

‘자칫 함정에 빠지면 여러모로 골치 아플 테니, 제자리를 지키시오.’

모용군이 잔뜩 날이 서 있었다면, 그 문구를 읽고도 쉽사리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걱정하지 마라, 모용군. 우리는 알아서 잘 빠져나갈 수 있으니까. 바로 당신 덕분에.’

연호정이 입을 열었다.

“분명 모용가주의 선택은 화통했습니다만, 그 역시 치밀한 자일 겁니다. 그쪽에서 장소를 정했다면, 아마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여 대비할 겁니다.”

“최악의 경우라?”

“부주님께서 직접 손을 쓰시는 경우이지요.”

양천이 피식 웃었다.

“어깨에 이고 있는 짐이 많은 수장끼리의 만남이야. 그런 자리에서 손을 쓴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이것이 바로 고수의 품격이다.

무공의 고수라서가 아니라, 그냥 사람 자체가 고수다. 양천도 그렇고 모용군도 그렇다.

그리고 연호정 역시, 얼마 전까지는 그러했다.

“바로 답변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시게.”

“그럼 이만.”

“정보부장.”

“예, 부주님.”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네. 이런 식의 접근은 생각지도 못했어.”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만큼 위험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더 안전한 방법을 고안해 내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허허, 이 사람아. 큰돈을 따려거든 도박을 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자네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내가 거부했을 것이네.”

“송구할 따름입니다.”

“자네가 본부로 들어와서 다행이야. 실로 고맙구먼.”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 고마움은 훗날 부주님께서 천하를 제패하시게 될 때, 그때 받도록 하겠습니다.”

“크하하하! 좋네, 좋아.”

한참이나 웃음을 터트리던 양천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한데 자네 사형제들 말일세. 그들은 언제 본부로 들일 생각인가?”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시기상조라 생각합니다. 저 하나만으로도 부내 수뇌부들이 동요하고 있는데, 제 사람들까지 급하게 데려오면 분위기가 더더욱 나빠질 겁니다.”

“그 부분이 걸린다면 내가 알아서 처리해 줌세.”

“아닙니다. 이 문제는 전적으로 제가 헤쳐 나가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함께 치고받으며 크겠습니다. 부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양천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자네 고집을 어찌 막겠는가? 알았네. 자네 뜻대로 하시게나.”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하면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묵룡전을 나온 연호정은 곧장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정보 추출은 끝났다. 이제 이걸 안고 맹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돼.’

연호정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다.

‘모용군. 미끼가 되어 줘야겠다.’

보름이라는 시간, 그리고 실무조를 외부에 둔 것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까지도.

“살기가 강하구려.”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거처 앞, 한 사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흑양이었다.

“정보부장을 뵙소. 흑양이오.”

물끄러미 흑양을 보던 연호정이 이내 고개를 숙였다.

“흑양 선배를 뵙소.”

“선배라…….”

흑양이 미소를 지었다. 의미를 알기 힘든 웃음이었다.

“대우해 줘서 고맙소.”

“아니오. 한데 어인 일로 오셨소?”

“별일 없소. 그저 신임 정보부장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미안하지만 공무에 사감을 배제하는 사람인지라.”

“그렇소?”

“그렇소.”

흑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 한 잔만 얻어 마실 수 있겠소?”

“…….”

“일이 바쁘다면 나중에 오겠소.”

“아니오. 들어갑시다.”

연호정이 무표정한 얼굴로 문을 열었다.

표정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사음교.’

내공을 발산하지 않아도 감각이 저절로 예민해졌다.

그리고 그 예민한 감각이 흑양의 기도를 읽었다.

‘사음교!’

쿠구구궁!

문이 열렸다.

“들어가십시다.”

“고맙소.”

그렇게 두 사람이 연호정의 거처로 들어갔다.

연호정이 의자에 앉았다.

“미안하지만 차는 없소.”

“그렇소? 그거 아쉽군.”

“어차피 차나 얻어 마시려고 온 건 아닌 것 같소이다.”

흑양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렇지.”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아오셨소?”

스르르르.

무형의 현무기가 집무실 전체를 더듬었다.

‘없군.’

이곳을 살피는 감시자는 없었다. 다행이었다.

웃으며 연호정을 보던 흑양의 표정이 서서히 싸늘하게 굳어졌다.

“왜 그랬소이까?”

“무슨 말이오?”

“다 아시잖소.”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십이지신은 사람 떠보는 걸 좋아하는 족속들이오? 화원이라는 년도 그러더니만, 당신도 똑같군.”

“…….”

“빙빙 돌리지 말고 확실하게 말씀하시오. 예까지 찾아오신 이유가 뭐요?”

흑양의 눈이 살쾡이처럼 변했다.

“당신이잖소. 흑양대와 흑장을 묻어 버린 것.”

“…….”

“아니오?”

투명한 안광으로 흑양을 보던 연호정.

일순 그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맞다.”

“……!!”

“내가 다 쓸어 버렸다. 그래서 어쩌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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