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부활의 시간 (3)
“……크르륵.”
청호의 입에서 피거품이 끓었다.
전신에 타박상과 자상, 열상은 물론 화상까지 입은 그의 모습은 차마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그러고도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는 것 자체가 기적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놀라운 투지였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는 그 투지를 높이 사 줄 만한 인정이 없었다.
“이만 죽어라.”
모용군이 소매를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퍼어어엉!
청호가 또 한 차례 피를 토하며 땅을 굴렀다.
무형의 장력, 격공장의 한 수였다. 이번 일격으로 청호의 내부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으리라.
“끈질긴 놈이군.”
모용군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무릎을 꿇은 광견이 있었다. 이를 악문 채 모용군을 올려다보고 있지만, 어떻게 해도 일어나기 힘든 모양이었다.
“개, 개새…….”
서걱.
광견의 목이 그대로 떨어져 나갔다.
모용군의 볼이 씰룩였다.
“버러지 같은 놈들.”
꽤 인상적인 무공의 소유자들이었다. 아니, 흑도에서 이 정도면 정말 대단하다 아니 말할 수 없겠다.
하지만 그래 봤자 흑도의 쓰레기들이다. 그런 놈들에게 시간을 이만큼이나 소모했다니, 자존심이 상했다.
‘나도 아직 멀었어.’
뇌정공과 무정천뢰식을 연성한 이후, 처음으로 치르는 제대로 된 실전이었다.
과연 뇌정지학은 강했다. 그 파괴적인 무공을 구현하는 자신의 깨달음 역시 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깨달음과 실제 무공을 구현하는 것에는 나름의 차이가 있었다.
지식이 많아도 활용을 못 하면 무용지물에 불과한 법. 그것은 무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잘 됐어. 보완할 부분도 찾았고.’
그때, 청호가 또다시 꿈틀거렸다.
모용군의 얼굴에 짜증이 일었다.
“이만 쓰러지거라.”
“쿨록! 우웨에엑!”
“너희 같은 잡종들 몸이나 베려고 세운 검날이 아니니라. 귀한 검에 더는 더러운 피가 묻지 않았으면 싶구나.”
콰앙!
주먹으로 땅을 후려친 청호가 거세게 포효했다.
“모용군!!”
퍼어어억!
청호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공간을 접듯 다가온 모용군이 어느새 그의 목에 검을 박아 넣은 것이다.
“천한 주둥이로 누굴 함부로 부르는 것이냐.”
“커컥!”
덜덜 떨던 청호가 그대로 축 늘어졌다. 이제야 죽은 것이다.
하지만 모용군의 분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오히려 검날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손등에 묻자, 그의 흉성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더러운.”
파바바바바박!
무시무시한 쾌검이 청호의 몸을 수십 번이나 갈랐다.
주르르르륵.
잘게 조각난 청호의 시신이 땅 여기저기에 흩어졌다.
“흥!”
검을 털어 낸 모용군이 코웃음을 쳤다.
“영광으로 알거라. 내 검에 조각나는 영광도 아무나 누리지 못하는 특혜이니라.”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납검한 모용군이 서쪽을 바라보았다.
와아아아.
저쪽의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게다가 점점 더 서쪽으로 이동하며 싸우는 건지, 조금 전보다 소리가 한참이나 멀어졌다.
“……쓸모없는 놈들.”
세워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조직의 전투 부대 몇도 끝장내지 못하고 있다.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투성이다. 심지어 서쪽에 대기시킨 본가의 병력은 퇴로를 봉쇄하기 위해 선별한 무사들이었다. 나름대로 실력이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내 이번 일이 끝나면, 가문을 통째로 뒤집어엎으리라.”
그렇다고 남은 전력을 이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모용군은 혀를 차며 땅을 박찼다. 아니, 박차려고 했다.
‘……?!’
모용군의 표정이 돌변했다.
‘……뭐지?’
파지직.
단전에서 올라온 뇌기가 단숨에 머리까지 치솟는 기분이었다.
우우웅! 우우우웅!
기운을 자의로 발출한 것도 아닌데 제멋대로 흘러나온다.
마치 뇌정공 자체가 겁을 집어먹은 것 같았다. 동시에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어떻게든 몸 전체를 둘러싸려는 것 같기도 했다.
‘대체……?’
불길하기 짝이 없는 기운 하나가 저 멀리 남쪽에서부터 다가오고 있었다.
문제는 그 기운의 크기였다.
‘이럴 수가.’
모용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힘이?!’
화아아아악.
늦가을의 차가운 공기를 밀어 내는 열풍이 있었다.
그야말로 용암이 따로 없었다. 시야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졌는데도 풍겨 오는 압박감이 실로 엄청났다.
나아가, 무수히 많은 고수가 함께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다. 기운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지지도, 하나로 뭉쳐서 군기(軍氣)를 형성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다.
이 절대적인 기운은, 천하의 모용군조차도 차마 걸음을 옮기지 못했을 정도로 압도적인 기운은 단 한 사람이 풍기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호남성에, 이 정도로 거대한 힘을 사방으로 발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양천?”
훅!
한껏 달아올랐던 열풍이 이내 싸늘하게 식었다.
‘…….’
모용군의 목덜미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잠시 후.
부아아아아앙!
대기가 찢어지는 듯하다.
마침내 그 거대한 기운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데 그 속도가 벼락처럼 빨랐다.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이토록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공기가 비명을 지르는 게 들릴 정도였다.
마침내 세상에 발을 디딘 절대자의 질주다.
도망? 그런 것은 의미가 없었다. 백 리라도 떨어졌다면 또 모를까, 상대가 이미 이쪽의 기운을 포착한 이상 이 정도 거리에서의 도주는 의미가 없었다.
그런 사람이었다.
무림의 절대자라 불리는 자들은, 강호 최강의 명성을 자랑하는 성천십삼좌에 속한 고수의 힘은 그렇게나 대단한 것이었다.
콰콰콰쾅!
대체 무슨 신법을, 얼마나 대단한 힘으로, 어떤 식으로 운용해서 펼치고 있는 것일까.
판자만 남은 폐가들이 마구 부서졌다. 소리의 속도조차 돌파한 괴물의 질주가 무형의 충격파를 발산하며 천지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파지지지지지직!
모용군의 몸을 보호하던 뇌기가 강렬한 충격파로 인해 바스러지듯 뒤로 밀려났다.
콰드득.
모용군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두 발이 땅에 일 장이 넘는 길이의 고랑을 만들어 냈다.
‘이런!’
뼈마디가 욱신거린다.
뇌정공을 전력으로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어디 한 군데가 부러져도 틀림없이 부러졌을 것이다.
‘공격을 가한 것도 아니요, 고작 전력을 다해 움직인 것만으로도 이 정도 힘을 자아낸다…….’
한 차례 심호흡으로 긴장을 가라앉힌 모용군이 전방을 주시했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모용가주인가?”
낮게 깔린 음색을 듣자니 청신경이 마구 뒤틀리는 것 같았다.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중심을 잡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분노로 타오르는 절대자의 힘, 흑도 최강의 무적자가 발하는 전력에 모용군은 필사적으로 내공을 끌어 올렸다.
“과연.”
양천이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십 조각으로 흩어진 청호의 시신, 목이 달아난 광견의 시신, 그리고 상반신이 통째로 날아간 수룡의 시신에 차례로 눈길이 머문다.
양천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어렸다.
“그 정도 무력을 손에 넣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거늘. 과연 대단하네. 십이지신 셋을 보낼 것이 아니라 자축(子丑), 둘 중 하나를 보냈으면 더 나았을 뻔했어.”
그 두 사람의 무공은 십이지신 중에서도 차원을 달리한다는 뜻이리라.
이 또한 고급 정보라면 고급 정보다. 그만한 정보를 흔쾌히 던져 주니, 상대방으로서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나 모용군은 양천의 말을 귀담아듣지 못했다.
‘정말이지.’
왠지 웃음이 나올 것 같다.
‘성천의 고수들 하나하나가 신선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하더니만, 이건 뭐 괴물이라는 말이 무색하구만.’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배짱 하나는 대단하다는 걸 알겠네. 이 나를 앞에 두고 그리 웃는 자, 지금껏 본 적이 없었어.”
웃으며 양천을 보던 모용군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모용세가의 수장, 모용군이외다. 투왕 양 선배를 뵙소.”
웃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부르르르르.
모용군의 몸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겁을 먹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상대의 힘에, 성천십삼좌의 힘에 진심으로 감동하고 있었다.
‘음.’
양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는 놈이로군.’
모용군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양천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겠네만, 더는 웃지 말게나. 내 기분이 썩 좋지 못하네.”
“그렇소?”
“문답무용으로 손을 쓰지 않는 것은, 아직 내 이성이 분노를 다독이고 있기 때문이지. 하나 얼굴 가죽부터 벗기고 시작해도 나로선 손해가 아니야.”
담담한 목소리에 감당 못 할 난폭함이 느껴졌다.
진심이다. 까딱 잘못했다간 양천은 진심으로 모용군의 얼굴 가죽을 벗기려 들 것이다.
당연히 그 작업은 찰나지간 이뤄질 것이다. 모용군은 그 손길을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을 것이다.
모용군이 미소를 거두었다.
“실례했소. 선배를 화나게 하고자 했던 건 아니외다.”
“꽤 저자세로 나오는군.”
“투왕 앞에서 자존심을 내세울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니외다.”
양천의 눈이 빛났다.
‘묘한 놈이로군.’
당당하다.
그 당당함은, 어떤 의미로는 정보부장의 그것과도 유사했다.
다만 정보부장은 되레 호통을 치며 자신을 가르쳤고, 모용군은 당당하게 고개를 숙였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정보부장.’
양천이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밤하늘, 휘영청 뜬 보름달에 두 눈이 시려 왔다.
양천이 눈을 감았다.
“설명하라.”
“무엇을 말이오?”
“본부의 입구를 왜 폭파시켰는지, 그 의미가 일전을 결하고자 함인지 혹은 관심 좀 가져 달라는 치기 어린 머저리의 실수인지, 그리고…….”
번쩍!
양천의 눈이 다시 뜨였다.
마주하지 않았음에도 모용군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양천의 두 눈은, 세상 어떤 맹수의 눈빛보다도 사납고 흉흉했다.
“어찌하여 정보부장을 죽였는지.”
끝 간 데 모르고 퍼져 나가는 분노가 어둠마저 집어삼키는 듯했다.
푸스스스스.
양천에게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청호의 살점 조각이 그대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광견의 시신도, 수룡의 시신도 마찬가지였다.
작정하고 내공을 발산한 것도 아니고, 그저 흉성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외물을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진짜 괴물이군.’
모용군은 양천의 재앙 같은 힘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것이 정녕 사람이 다룰 수 있는 힘이란 말인가.’
뇌정공과 무정천뢰식을 연마하며, 조만간 성천십삼좌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틀렸다. 틀려도 단단히 틀렸다.
성천십삼좌는 고작 더 강하고 신묘한 무공을 익힌다고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다른 무인들과는 근본적으로 뭔가가 다른 이들이 바로 성천십삼좌였다.
‘그래서 더더욱 도달하고 싶구나.’
그때, 양천이 재차 입을 열었다.
“내 분명히 말하는데, 되지도 않는 거짓말이나 수작질을 할 생각일랑 일찌감치 접는 게 좋을 걸세. 내 비록 분노로 가슴이 터질 것 같지만, 거짓과 참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미련하진 않다네.”
양천이 고개를 내려 모용군과 시선을 마주했다.
번쩍! 번쩍!
뇌정공을 익힌 모용군의 뇌기보다도 몇 배는 더 위협적인 안광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말해 보게. 내 부하를 왜 죽였지?”
“그 전에, 나도 하나 물읍시다.”
“……?”
“천하의 투왕께서 어찌 나를 보자고 한 것이오? 그것부터 말씀해 보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