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50화 (250/963)

250화. 부활의 시간 (6)

“그랬군.”

모용군이 쓴웃음을 지었다.

“무림맹주 선거에 관여하기 위함이라…… 역시 그랬었어.”

놀랍게도 양천은 모용군의 질문에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그런 양천을 보며, 모용군은 더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제 거리낄 게 없는 것이다.’

묵룡부는 아직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조직이었다.

인제 와서는 그것도 다 헛짓이 되어 버렸지만, 적어도 수습이 아예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양천 역시 더 조심스레 접근해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양천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극도로 분노했고, 진실을 원했다. 그래서 그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걸 감수하고 직접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섬뜩한 사실을 증명했다.

‘내가 죽을 수도 있다.’

그 피하기 힘든 현실을 깨우친 순간, 모용군은 등허리가 축축해지는 것을 느꼈다.

평생 최고가 되기 위해 달려왔고, 실제로 최고의 자리가 눈앞에 있는 판국이었다. 이런저런 장애물은 많지만, 그것들을 격파할 만한 수를 착착 쌓아 두고 있었다.

한데 그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참으로 대담하고도 위험한 수법이오. 말 그대로 도박이나 다를 바 없는 수법을 쓰시려 했소이다.”

“이제 말해 보라.”

양천이 턱을 치켜들었다.

“왜 본부를 공격했지? 정황상 본부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한데, 어디까지 알고 있지? 우리를 건드려서 무엇을 얻고자 했나? 설마하니, 모용세가 따위가 본부를 감당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본가의 힘은 육대세가 중 제일을 논하오. 하지만 내가 조사한 묵룡부의 힘 중 절반만 사실이더라도, 본가가 묵룡부를 감당키는 힘들 것이오.”

양천의 눈이 번뜩였다.

모용군은 지금 ‘내가 조사한 묵룡부’라고 말했다. 그것은 곧, 묵룡부의 존재를 무림맹에선 모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건드렸다? 왜지?”

모용군은 순간 저도 모르게 연호정의 존재를 말할 뻔했다.

‘약아빠진 놈.’

그는 내심 연호정에게 이를 갈았다.

지금 여기서 연호정의 정체를 말하는 것은 악수 중에서도 최악의 악수다. 연호정은 단기간에 양천의 신임을 얻었고, 나아가 묵룡부의 중추 자리를 꿰찬 쾌거를 이루었다.

즉, 양천을 완벽하게 속인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제 와 진실을 밝혀 봤자 양천이 고맙다고 하겠는가? 오히려 분노가 폭발한 그는 자신부터 죽이고 모용세가를 친 이후, 무림맹에까지 선전 포고를 감행할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라면 그럴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적의 힘이라도 깎아 둬야 하니까.

‘이번 일이 무림맹의 임무였다는 건 절대 알려 줘선 안 돼.’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지만,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정보부장을 죽이고 묵룡부의 입구를 폭파한 것을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두어야 한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놈은 여기까지 내다본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서운 놈.’

모용군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부주와 비슷한 의도외다.”

“나와 비슷한 의도라?”

“그렇소.”

“설명하라.”

“부주 대신 정보부장을 보냈잖소? 얘기를 나눠 보니, 보통 살벌한 놈이 아니더군.”

양천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만 정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만만한 표정, 그러면서도 신중하고 예리한 안목을 지닌 잠룡의 얼굴이.

“……해서?”

“하지만 부주가 아끼는 사람인지는 몰랐소.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도 상관은 없었지만.”

“뭐?”

“부주는 약속을 어겼소. 성천십삼좌의 이름 앞에선 모용가주라는 직책도 빛이 바래게 마련이지만, 나 또한 한 가문의 주인이자 무림맹의 봉공이외다. 불쾌할 수밖에.”

양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고작 그따위 이유로 본부의 정보부장을 죽였나?”

“불 난 집에 기름을 부은 건 그놈이었소.”

“……?!”

“그자, 뛰어난 인재인 건 분명하지만 아직 어리긴 하더군. 주둥이 관리가 잘 안 되더이다. 양 집단의 수장끼리 만나는 자리에 연락도 없이 나타났으면 마땅히 사죄부터 하는 것이 도리이거늘, 도리어 도발을 해?”

모용군의 눈이 차가워졌다.

실제로 연호정을 떠올리니, 부글부글 끓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나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칼을 뽑았을 것이오.”

양천이 눈을 감았다.

‘이놈아.’

모용군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기야 까딱 잘못하면 본인이 죽을 수도 있는 자리에서 거짓을 꾸미진 않을 것이다.

실제로, 모용군의 말을 들으니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리 섬세한 놈이 어찌 그런 실수를 했더냐.’

정은 나름의 정치를 아는 놈이었다. 하지만 성향 자체가 부드러움보다는 강함에 치중되어 있었다. 모용군의 말마따나 충분히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 정은 그 한 번의 실수로 아까운 목숨을 잃은 것이리라.

‘그리 허무하게 갈 것이었다면, 차라리 내 곁으로 오지를 말 것을.’

번쩍!

양천이 눈을 떴다.

예리하기 짝이 없는 눈빛에 모용군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맛봐야 했다.

“본부의 입구에 폭격을 가한 것 역시 화가 나서 그런 것이다?”

“그럴 리가. 말했잖소? 부주와 비슷한 이유라고.”

“뭐라?”

모용군이 차갑게 웃었다.

“어떻게 나오는지 보고 싶었소이다.”

“……?!”

“설마하니 부주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지만 말이오.”

양천이 헛웃음을 지었다.

“고작 나의 반응을 살펴보고자 본부 입구를 폭파했다? 지금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것이냐?”

“그게 아니었다면 굳이 묵룡부를 건드릴 필요가 있소이까? 아닌 말로 묵룡부를 박살 낼 생각이었다면, 더 은밀히 준비해서 일시에 모조리 생매장해 버렸을 것이오.”

이번에는 양천이 뜨끔할 차례였다.

‘이놈, 진심이군.’

정말이지 배포 하나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양천을 앞에 두고 본부를 생매장했을 거란 소리를 거리낌 없이 하다니.’

그는 백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만일 우리의 존재를 알았다면, 굳이 모용세가 측 병력을 따로 빼서 입구만 폭파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분명 백서는 그리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엔 양천도 동감했다. 제대로 건드릴 생각이었다면 작정하고 치고 들어왔을 것이고, 그러지 않을 거라면 아예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즉, 무림맹은 묵룡부의 존재를 모를 확률이 높다. 동시에 모용군은 묵룡부에 뭔가 바라는 게 있다.

생각해 보면, 자신 역시 바로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이 자리에 온 것 아니던가.

모용군이 입맛을 다셨다.

“어린 남아들이 괜스레 여아들에게 심한 장난을 치는 것은 관심을 바라기 때문이오. 좀 쑥스러운 비유이기는 하지만, 내가 한 짓도 그와 비슷하오.”

“…….”

“그리고 나는 지금, 그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소이다. 부주께서 직접 찾아와 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이오.”

“어떤 이유에서건 본부를 건드린 것은 좌시할 수 없다. 게다가 본부의 정보부장과 십이지신의 셋을 죽였어.”

양천의 얼굴에 살기가 어렸다.

“자, 이제 내가 자네를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에 대해 말해 보게나.”

순간 모용군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됐어.’

죽이지 않아야 할 이유?

지금 상황에서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다. 양천이 진정 화가 났다면 진즉 공격을 감행했을 것이다.

즉, 양천은 지금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무사히 살아 돌아갈 기회, 거래를 시작해도 된다는 것을 확정 짓는 한마디였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전화위복의 한 수가 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모용군이 침착하게 말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부주 휘하의 부하들이 죽은 만큼 본가의 무사들도 많은 수가 죽었소이다.”

“비교가 안 되지. 자네가 죽인 내 부하들은 본부에서도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인재들이야. 그에 비해 자네가 잃은 것은 고작 졸(卒)에 불과해.”

“그렇다면 무게 추를 좀 맞추면 되지 않겠소?”

“무게 추라?”

“양쪽 모두 잃은 것이 있다면, 감정싸움은 이쯤에서 끝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오. 오히려 이 싸움으로 인해 우리의 관계가 더 돈독해질 수 있다고 보는데, 부주의 생각은 어떻소이까?”

양천의 눈이 빛났다.

“그 말은?”

“그렇소. 본래 하고자 했던 거래에 응하겠소이다.”

“……!”

“내년에 치러질 맹주 선거, 그 선거에 개입하시오. 그리하여 내 맹주가 된다면, 뒤에서 묵룡부를 제대로 밀어 드리리다.”

양천이 차갑게 웃었다.

“무게 추를 맞춘다더니, 오히려 우리더러 한 번의 손해를 더 감수하라는 것 아닌가.”

“애초에 부주께서 선거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무리수였소. 도박이란 말이오. 그러나 나는 스스로 그 도박판에 올라, 목숨이라는 판돈을 걸겠다고 말하고 있소.”

“……!”

“부주께서 잃은 부하들의 목숨, 그것을 내 목숨으로 대신하리다. 그리고 내 목숨은,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묵룡부에 엄청난 도움이 될 수도 있지.”

“…….”

“물론 그것만은 아니오. 거래라는 것은 확실해야 하는 법, 이 거래에 응하신다고 하면…….”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미안하구나.’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다.

‘충격이 크겠지만, 이 또한 너의 성장에 밑거름이 될 수 있을 터. 이 한 번의 희생을 감수한다면 내 훗날 너를 크게 쓸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리 마음먹었다.

“……내 딸내미를 부주께 보내리다.”

순간 양천은 깜짝 놀랐다.

“딸을 보내겠다?”

“물론, 내 딸을 잡것처럼 다뤄서는 아니 될 것이오. 비록 아직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지만, 제법 꾀를 부릴 줄 아는 아이외다.”

“……!”

“다루는 방식에 따라 묵룡부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오. 부디 잘 다독여 주시오.”

양천의 눈가가 씰룩거렸다.

사음교 측에서 보낸 흑양이 배신자라는 게 밝혀졌다. 그런 그에게, 거래 상대가 사람을 보내겠다는 것은 여러모로 믿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다만, 혈육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딸을 인질로 보내 자네의 생(生)을 얻겠다?”

모용군이 경쾌한 어조로 말했다.

“이 정도 파격적인 수는 둘 줄 아는 사람이라고 봐 줬으면 좋겠소. 또한, 내 딸내미의 목숨이라면 무게 추의 균형을 맞추는 데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겠소이까?”

모용군의 두 눈의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욕망, 야심, 흥분으로 가득한 그의 두 눈은 천하의 양천조차도 마주하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 어찌하시겠소? 이 한 번의 거래로 그간 잃은 것을 만회하시겠소? 아니면 나를 죽이고 무림맹과의 일전을 준비하시겠소?”

* * *

“푸하아아아!”

호북성 중앙, 장강을 건너자마자 가득상이 깊은숨을 토해 냈다.

“와, 공기부터가 다르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추적자의 존재는 잊어도 괜찮을 것 같소. 장강까지 건넌 이상, 묵룡부는 물론 흑도의 어떤 문파도 우리를 쫓지 못할 것이오.”

그가 모두를 둘러보았다.

“그간 고생들 많으셨소.”

일행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호정이 그렇다고 하니 이젠 정말 마음을 놔도 되는 것이다.

패율이 툴툴거렸다.

“다음부터는 좀 화끈한 곳으로 갈 때 불러라.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다.”

“알겠습니다.”

당상아가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감당 못 할 적과 싸우는 게 낫지, 침투전(浸透戰)이라는 건 정말 어렵네요.”

“뭐, 다 그렇지.”

제갈아연이 슬쩍 물었다.

“그나저나 정아.”

“말해.”

“우리도 우린데, 지휘권자께서는 어떻게 되셨을까?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으시려나?”

“글쎄다.”

연호정이 남쪽을 바라보았다.

서늘하게 가라앉은 그의 두 눈에 의미심장한 빛이 어렸다.

“……멀쩡히 살아 돌아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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