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54화 (254/963)

254화. 동풍(凍風)의 시간 (4)

사박. 사박.

산길을 오르던 남자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인가.”

산바람을 쐬다 보면 여름에도 서늘한 느낌을 받곤 한다.

겨울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굽이쳐 불어오는 바람은 천하의 고수라도 몸을 떨게 만든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 거친 산바람도 잠잠했다.

대신 눈이 내렸다.

한 송이, 한 송이 떨어지는 눈은 마치 흩날리는 꽃잎을 닮았다. 제법 굵은 눈송이들이 산 전체를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다.

“운치가 있구나.”

작년에도 본 경치지만, 오늘은 대별산의 경치가 유독 아름다웠다.

하나하나 뜯어봐도 별다를 게 없는데, 이상할 정도로 새로웠다. 그것은 아마도 산이 변한 게 아니라, 나 자신이 변했기 때문이리라.

남자가 눈을 감았다.

파직!

고요했던 산속에 한 줄기 번갯불이 번뜩였다.

후우우우우웅.

바닥에 깔린 눈이 사방으로 튀었다.

파라라라락!

멋스럽게 빼입은 옷깃이 바람에 펄럭였다. 유독 바람이 잔잔한 날이었지만, 남자의 쾌속한 이동 속도로 인해 공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스르륵.

부드럽게 착지한 남자, 모용군이 거대한 성채를 올려다보았다.

가까이서 봐도 그 규모가 엄청난 성채였다.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가히 소국(小國)의 성벽을 연상케 할 정도로 넓을 것이다.

모용군은 문득 눈이 부시는 것을 느꼈다.

‘그래, 무림맹은 이제 하나의 국가나 다름이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관림상호불침의 조약으로 인해 관부와 무림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같은 세상을 공유하면서도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실제로 그 조약이 체결되고 난 이후, 십수 년간은 온갖 분란이 끊이질 않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관부와 무림은 어느새 서로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사이에 이르렀다. 절대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았던 두 집단이 마침내 공존(共存)을 이룬 것이다.

‘강호 무림은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명확한 통제 기관이 없다.’

모용군의 눈이 서늘해졌다.

‘그러한 강호에 무림맹이 창설되었다. 무림맹은 곧 백도 무림을 넘어 온 무림의 성지가 될 것인즉, 무림맹주는 무림의 황제로서 자유분방한 강호의 통치자가 될 수 있다.’

모용군은 맹주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만인의 축복을 받으며 거대한 태사의에 오르는 자신을. 손짓 한 번으로 지각 변동을 일으키는 권력을 손에 넣은 자신을.

‘……좋군.’

그려진다. 제 모습이.

그리고 그곳으로 오르기 위한 무수히 많은 과정들이.

“헉! 다, 당신은 설마?”

모용군이 눈을 떴다.

성문을 지키는 수문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모용가주님?”

지금은 그렇지.

모용군이 웃으며 말했다.

“성문을 열게.”

“아! 죄송합니다만…… 패를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신분을 이미 알지만, 절차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뜻이리라.

모용군은 순순히 패를 내주었다.

“확인 완료했습니다!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쿠구구구궁!

거대한 성문, 백호대문이 열렸다.

열린 성문으로 들어가기 전, 모용군이 수문위를 바라보았다.

잔뜩 긴장한 수문위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 따로 하교하실 것이라도 있으신지요?”

모용군이 고개를 저었다.

“자네, 이름이 무엇이지?”

“전강(全講)이라 합니다.”

천하의 모용가주가 이름을 묻는다. 겉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전강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자네들이야말로 무림맹의 얼굴일세. 비록 고단하겠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원리 원칙을 준수하여 무림맹의 위엄이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해 주게.”

“가, 감사합니다!”

이것이 칭찬인지 아니면 비꼬는 것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전강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모용군이 품에서 작은 전낭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받게.”

“이, 이것이 무엇입니까?”

“추운 겨울에 고생이 많아. 근무가 끝나면 동료들과 함께 맛난 술이라도 자시게.”

“헉! 괘, 괜찮습니다!”

모용군이 껄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 사람아, 이래 봬도 내 모용세가의 가주이거늘 설마 뇌물이랍시고 주는 돈이겠는가?”

“컥! 그, 그게 아니라…….”

“신경 쓰지 말고 받게. 그렇지 않아도 상부에서 경비대와 수문위를 위한 복지에 관해 논의 중일세. 진즉에 신경을 써 줘야 했는데, 너무 늦어져서 미안할 뿐이야.”

전강의 얼굴에 감격이 어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성문 안쪽은 물론, 좌우에 서 있던 무사들 모두가 울컥하는 기분을 느꼈다.

전강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감사할 것 없네. 오히려 우리가 감사해야지. 우리가 마음 놓고 맹의 중대사를 논의할 수 있는 것도 다 자네들 덕 아니겠나.”

모용군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잊지 말게. 신분의 고하도 있고, 직업의 귀천도 있는 세상이지만, 적어도 자네들이 하는 일은 우리가 하는 일만큼이나 어렵고 힘들어.”

“…….”

“앞으로도 힘내 주게.”

전강은 물론 수문위 모두가 고개를 숙였다.

“저희 모두, 언제라도 맹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하하하, 좋네.”

전강의 어깨를 두드려 준 모용군이 그제야 맹으로 들어갔다.

품격 넘치는 걸음걸이, 그러나 그의 뒷모습은 고고한 품격과 상반되는 위풍당당함으로 가득했다.

전강의 얼굴에 부러움이 일었다.

“저런 수장 휘하에서 움직이는 모용세가의 무사들은 얼마나 협의가 넘칠 것인가. 저런 주군이라면, 실로 따를 만할 것이다.”

“모용가주가 귀맹했다고 합니다!”

“모용가주가 돌아왔습니다!”

“그 씹새가 왔다던데?”

“흐음, 생각보다 귀환이 빨랐네요.”

모용군의 귀환 소식은 순식간에 맹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온 모용군은 거처에 들르지 않고 곧장 회의장으로 향했다. 그간의 일을 보고하기 위함이었다.

반 시진 후, 회의장에 봉공들이 모였다.

“허허, 정말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공공대사의 담백한 치하에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고생이랄 것이 있겠습니까.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실제로 고생한 것은 실무조원들이지요.”

“허허허.”

“게다가 실무조장의 능력이 원체 탁월하여, 막상 호남에 당도하니 달리 할 일이 없었습니다. 몇 가지 조정 부분을 제외하면 말이지요.”

“그러셨군요.”

“임무도 임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천만다행입니다.”

공공대사가 빙긋 웃었다.

“모용 봉공께서 그리 말씀해 주시니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그렇지요. 임무보다도 소중한 것은 인명인지라, 사상자가 나지 않은 게 다행입니다.”

“하하하.”

모용군이 봉공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어쨌거나 봉공분들 모두가 바쁘실 텐데, 그간의 일을 간략하게 보고토록 하겠습니다.”

그는 호남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를 짧고 조리 있게 설명했다.

당연하지만, 그 자신이 저지른 귀계에 대한 내용은 쏙 빠져 있었다. 연호정과의 신경전, 그리고 양천과의 만남까지도.

“허어.”

용화진인이 감탄을 터트렸다.

“정말이지 대단하군요. 솔직히 말해, 그 젊은 나이에 벽산의 호장이라는 명성은 다소 과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거늘, 참으로 대단한 인재입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천하제일을 논하는 후기지수 아니겠습니까. 무공도 무공이지만, 응변의 기지와 양천을 공략한 대범함은 가히 찬사를 받아 마땅하지요.”

“허허, 그렇습니다.”

“무공과 지략을 실전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천재. 솔직히, 그런 말도 안 되는 천재가 세상에 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뭐지?’

모용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듯 연호정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비록 적이지만, 모용가주는 멸사군장을 누구보다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칭찬이 다소 과한 감이 있어.’

물론 칭찬에 칭찬을 더해도 부족할 인재이긴 하다.

다만 그 칭찬을 모용군이 하니 의심스러운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모용군과 연호정의 관계를 아는 제갈문호로선 그의 의도가 순수하다고 믿기 어려웠다.

제갈문호가 연위를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연위, 그러나 그와 돈독한 친분을 쌓아 온 제갈문호는 연위의 눈빛 속에 드리워진 의아함과 불안함을 읽을 수 있었다.

‘연가주 역시 이상함을 느끼고 있다. 대체 뭘까?’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

제갈문호는 몇몇 봉공들의 안색이 점차 미묘해지는 것을 눈치챘다.

‘설마…….’

제갈문호의 표정이 티 나지 않게 굳어졌다.

‘그랬군.’

갈증이 심한 사람에게 한 잔의 물은 감격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갈증이 해소되었는데도 자꾸만 물을 준다면, 그때부터는 괴로워지는 법이다.

‘당파에 속하지 않은 소수의 봉공들이 불편해하고 있다.’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헐뜯는 것만이 공격이 아닌 법. 과한 칭찬으로 불안감을 조성해 내부 분란을 유도한다…….’

그렇지 않아도 연호정의 명성은 백도 무림 전체에 퍼져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로 무종지벽을 돌파한 것도 모자라 무림맹 최초의 유군 부대 대장으로 임명되었고, 그전에는 구주명가를 무너트리는 데에 선봉으로 서기까지 했다.

나이, 무공, 지략, 가문, 나아가 호방한 성격까지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다.

누구라도 질시할 만한 능력이요, 배경이었다.

‘모용가주.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부터 그런 협잡이란 말이오?’

제갈문호가 곧장 끼어들려는 순간이었다.

“탕마군장도 대단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연위에게 향했다.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연위가 말을 이었다.

“탕마군장 모용우도 얼마 전에 무종지벽을 돌파하지 않았습니까. 이립이 되지 않은 나이에 그만한 경지라면, 가히 멸사군장에 뒤지지 않는 천재지요.”

모용군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천하의 모용군조차도 이번만큼은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가, 아니 탕마군장이 무종지벽을 돌파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허!”

불편해하던 봉공들도 비로소 표정을 풀었다.

“축하드립니다, 모용 봉공.”

“탕마군장의 재능 역시 무림의 홍복이외다.”

“과연 무림맹 전투 부대의 쌍두마차라 할 만합니다. 탕마멸사의 이름처럼, 앞으로 백도 무림을 환히 비추는 태양이 될 만한 인재들이에요.”

봉공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모용우를 칭찬했다.

놀라움과 기쁨으로 굳어졌던 모용군의 얼굴이 일순 편안해졌다.

그가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는 조용히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과연.’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호랑이는 호랑이를 낳는 법. 아들내미 못지않다 이건가?’

연위가 모용군을 보았다.

“이 사람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새삼 연 봉공님의 신색이 몹시 훤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때 제갈문호가 나섰다.

“묵룡부의 극비 정보는 모두 받았습니다. 개중에는 해석하기 어려운 문자들도 많았지만, 보름 내로 전부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오오!”

“봉공회의는 그때 다시 여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용 봉공께서도 피곤하실 터이니, 오늘은 이만 회의를 마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모용군의 기습적인 귀환.

겨울, 동풍의 시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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