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264화 (264/963)

264화. 고백 (2)

어두운 방 안.

초 하나에 의지해 술을 마시는 당관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졌다.

“……쓰군.”

탁자 위에는 이미 대여섯 병의 술병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연성한 내공이 추구하는 바에 따라 다르지만, 통상의 내가고수라면 술에 잘 취하지 않는다. 진기(眞氣)가 언제나 내부 장기들을 보호하며 끊임없이 불순물을 제거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무종지벽을 돌파하면 진기가 세맥(細脈)까지 타통되어 내기가 융통무애(融通無碍)하게 흐른다. 억지로 진기의 행로를 틀어막지 않는 이상, 술에 취할 일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물며 당관은 수천 가지의 독을 접하고 음용해 본 독의 대가였다. 진기를 억제한다 한들, 독주 몇 병 정도로는 취기가 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왜일까?

당관은 어쩐지, 이십 년 만에 술을 마시고 취기가 오르는 것을 느꼈다.

“궁상떨지 마라.”

당관이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음영이 진 얼굴에 떠오른 날카로운 미소는 비수의 날처럼 섬뜩해 보였다.

“어차피 대단한 기대도 없었다. 믿을 것은 언제나 나 자신뿐. 누군가에게 바랄 것도, 실망할 것도 없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당관 역시 알고 있었다. 무림맹으로 들어오고 난 이후의 자신이, 사천에서 제왕으로 군림하던 때의 자신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자신의 변화를, 그리고 더 이상 자신이 중심이 아닌 현실을.

쪼르르륵.

이제는 채워지는 잔에서 올라오는 주향도 맡기 힘들다.

당관이 눈을 감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탄식에 가까운 혼잣말과 함께 쓴웃음을 짓던 당관은 문득 한 줄기 인기척을 느꼈다.

‘……?!’

당관의 눈이 대번에 날카로워졌다.

푸스스.

내공을 운용해 순식간에 주기(酒氣)를 배출했다. 모조리 흡수한 줄 알았더니, 확실히 취기가 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고수다.’

그것도 놀라운 고수가 방문 너머에 서 있었다.

안정적이면서도 절제된 기도.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았기에 압도적인 패기는 느낄 수 없지만, 그것은 발톱을 숨긴 사자의 초연함일 뿐이었다.

‘언제?’

취기로 인해 감각이 무뎌졌던 모양이었다.

당관이 날카롭게 외쳤다.

“어떤 놈이냐!”

그때, 문밖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연가주요.”

순간 당관의 눈이 깊어졌다.

‘연위?!’

놀랍다.

비록 크게 신경 써 본 적은 없지만, 봉공회의에서 몇 번이고 만난 사이였다. 상대의 무공을 유추할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회의에서 마주쳤던 연위와 지금의 연위는 느껴지는 기도가 그야말로 천지 차이였다.

‘그새 이만한 발전이 있었다고?!’

아니면 스스로 힘을 숨기고 있었던 건가?

물끄러미 문을 바라보던 당관이 고개를 돌렸다.

“기별도 없이 찾아온 무례는 넘어가겠소. 이만 나…….”

나가라는 말을 하려던 당관은 순간 움찔했다.

‘내, 귀하를 충분히 존중하고 있다 생각하오. 어떤 면에서는 여기 계시는 두 분보다도 더. 그것은 귀하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귀하의 성격을 알기 때문이오.’

모용군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리는 듯했다.

당관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이만 돌아가시오.”

동시에 연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술 생각이 나서 왔소. 공적인 용무는 없으니, 시간 되면 한잔합시다.”

“가라고 하였소.”

“향이 좋은 술을 가져왔소만.”

“…….”

“정 혼자 있고 싶다면, 알겠소. 나중에 다시 찾아오리다.”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던 당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입맛에 맞지 않으면 당장 내쫓을 줄 아시오.”

잠시 후, 두 사람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날 속였군.”

“술이 마음에 들지 않소?”

당관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저잣거리 백정도 안 마실 싸구려 백주를 들고 와선 향이 좋다니?”

연위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향 좋은 술이라 한들, 맹독으로 단련된 당가주 간에 기별이나 가겠소?”

“…….”

“나름 심혈을 기울여서 고른 놈이오. 내가 마셔 본 술 중 가장 독한 놈입디다.”

딴에는 옳은 말이다.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핑계가 좋소.”

“한잔 따라 주겠소.”

연위가 당관의 잔을 채웠다.

가만히 연위를 보던 당관이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용건은?”

“말했잖소? 공적인 용무는 아니오. 그저 술이나 한잔하고 싶어서 왔소.”

“그 거짓말, 진짜요?”

“거짓말 아니외다.”

“거짓말이 아니다?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것이오?”

“믿지 않을 이유는 또 뭐요?”

“이런 절묘한 때에 찾아와 술 한잔하자고 하는 사람을 덜컥 믿으란 말인가? 너무 속 보이는 처사라고 생각하지 않소?”

연위가 무뚝뚝한 얼굴로 자신의 잔을 채웠다.

당관과는 달리 우측 얼굴에 음영이 진 연위의 얼굴은 굵은 획으로 그린 명화(名畫)를 보는 듯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면, 당신은 날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소.”

“뭐라?”

“그간 그대가 어떤 사람들을 상대해 왔는지 모르겠지만, 난 구밀복검(口蜜腹劍) 하는 이가 아니오.”

당관이 피식 웃었다.

“성인군자 납셨군. 그래, 하면 공적인 일도 아니요, 날 회유하러 온 것도 아니면, 대체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말동무나 해 주기 위해서 왔소.”

“크하하하!”

당관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말동무? 내 말동무가 되어 주어서 그대가 얻는 이득은 무엇이오?”

“그대를 더 잘 알 수 있겠지.”

“……!”

생각지도 못했던 답변이었다.

서늘한 눈으로 연위를 노려보던 당관이 잔을 비웠다.

“할 말 없으면 이만 나가시오.”

“따님이 많이 섭섭해하더이다.”

“……뭐라?”

연위의 목소리는 지극히 무덤덤했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그대를 무척 걱정하더군.”

“…….”

“아시겠지만, 그대의 따님이 내 아들놈과 친분이 있소. 덕분에 어제 다 같이 식사도 할 수 있었지.”

쾅!

탁자가 뒤흔들렸다.

당관의 두 눈에서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졌다.

“당장 나가시오.”

“계속 그렇게 삐딱하게 나올 생각이오?”

“당장 나가라지 않소!”

“그렇게 딸을 잃고 싶소?”

“시끄럽소! 오지랖도 적당히 부려야지! 제삼자가 남의 집안일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야!”

“남에게 부려도 손가락질당하는 것이 허세요. 자식에게는 허세 부리지 맙시다.”

“이익!”

“그리고 방금 오지랖이라고 했소?”

연위의 눈이 서늘해졌다.

“그렇소. 이건 오지랖이자 조언이오. 하지만 당신은 내게 화를 내선 안 되오.”

“뭣이?!”

“자식과 관련된 일이라면 저잣거리 백정의 조언이라도 귀담아들어야 마땅하오. 세상에서 가장 천한 이의 조언 앞에서도 귀를 활짝 열어야 할 것이오.”

“……!”

“그렇게 노력해도 될까 싶은 것이 자식 일이오. 당신처럼 귀를 닫고 소리만 지르다간, 평생 자식 얼굴도 못 보고 살 수 있소.”

당관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놀랍게도, 그는 연위에게 더는 소리치지 못했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당장 손을 쓰고도 남을 상황이지만, 함부로 독공을 개방하지도 않았다.

그런 당관을 보며, 마침내 연위도 깨달았다.

‘이자, 생각보다 냉정한 자다.’

진짜 폭발하면 누구보다도 흉포해질 수 있는 남자다.

하지만 그 폭발하기까지의 선이 생각보다 훨씬 깊었다. 실로 거침이 없어 보이지만, 적어도 최악과 차악 중 무엇이 더 나은지를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이자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딸을 사랑하고 있다.’

물론 그 방식은 삐뚤어지고 독선적인 면이 강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딸을 자식으로 여기고는 있다는 것이었다. 진짜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상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그 마음이 진짜라면, 과정이 다소 어려울지언정 충분히 관계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자식들에게 못 할 짓을 많이 했소.”

“…….”

“지나치게 엄격하게 키웠더랬지. 몇 년 전까지 둘째는 내게 말도 걸지 못했고, 첫째는 엇나가서 술만 그렇게 퍼마셨더랬소.”

“…….”

“그게 그 아이들 잘못 같소? 아니오. 자식이 그렇게 된 것은 다 부모 탓이오. 부모가 제대로 보듬어 주지 않으면 자식들이 망가지는 법이오.”

당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연위가 잔을 비우고 말했다.

“나는 운이 좋았소. 부모의 도움 없이도 두 아들이 알아서 잘 커 주었소. 해서 생각했소. 아마도 나는 천하에서 가장 자식 복이 많은 놈일 거라고. 자식들에게 느끼는 미안함과는 별개로 말이오.”

“…….”

“한데 이리 보니, 당신도 운이 꽤 좋아 보이는군.”

연위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당관은 저도 모르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당가주.”

“…….”

“내가 당가주를 찾아온 것은 당신과 모용군의 관계가 어긋나서도, 그래서 당신을 회유하고자 한 것도 아니오.”

“…….”

“나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갔다가 자식들 덕에 관계를 개선했소. 그래서 알 수 있소. 조금만 지나면 당신 역시 나처럼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가리란 것을.”

당관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그래서, 선배 대접이라도 바라는 거요?”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가주의 따님은 내 아들의 친구요. 나를 이곳에 오게 한 것은, 자식을 둔 아비로서의 걱정 때문이라오.”

“착한 척하지 마시오.”

“난 내가 착하다고 생각한 적 없소.”

“나와 상아 때문에 왔다고? 웃기지 마시오.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한테 자식 똑바로 간수하라는 말이 하고 싶어서 왔다니, 그걸 누가 믿…….”

“똑바로 간수해야 할 것은 쓸데없는 데에서만 발휘되는 당신의 자존심이오.”

“……!”

연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적대 관계도 아니잖소?”

“착각도 유분수군.”

“적대 관계조차 될 수 없소, 당신은.”

자존심을 자극하는 언사였다. 당관이 핏발 선 눈으로 연위를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당관을 보던 연위가 일순 미소를 지었다.

“하나 묻고 싶소.”

“…….”

“모용군에게 청음독의 출처에 관해 물어보았소?”

당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소. 당신에게는 청음독의 출처가 중요한 게 아니었어. 아니, 더 정확히 얘기하면 그 손수건에 묻은 청음독을 누가 만들었는지 짐작하고 있었겠지.”

“……이만 나가시오.”

“즉, 당신 역시 모용군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싶어서 우리 큰애의 설득에 걸려 준 것 아니오?”

“…….”

당관은 자신의 잔으로 고개를 돌렸다.

물끄러미 그를 보던 연위가 포권을 취했다.

“혼자 있고 싶었던 마음을 아오. 다소 과격한 언사였지만, 꼭 해 주고 싶었던 말이라 큰 실례를 범했소.”

“알면 되었소.”

“오늘의 실례는 향 좋은 명주로 대신하겠소. 언질을 주면 내 시간을 비워 두리다.”

연위가 방을 나섰다.

하염없이 잔을 내려다보던 당관이 백주를 따랐다.

가득 채운 술을 단숨에 넘기니 새삼 목이 칼칼했다.

“애비나 자식이나, 혓바닥에 비수를 달았군.”

당관이 백주를 병째 들이켰다.

명치께부터 올라온 열기가 얼굴 전체로 번졌다.

“……쓰다.”

* * *

“뭐 해요?”

“음?”

홀로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고개를 돌려 묵비를 보았다.

“뭐야? 언제 왔어?”

“방금이요. 수련 끝나고 돌아오는 길이에요. 불이 켜져 있길래.”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다.”

묵비도 고개를 까딱였다.

“고생했어요. 쉬어요.”

“그래.”

묵비가 나가자, 연호정이 다시 창밖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짝이는 별빛이 아름다웠다.

“……때가 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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