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손님맞이 (1)
“일이 터졌습니다.”
“일?”
“양천이 사음(邪淫) 쪽과 연락을 끊었다고 합니다.”
“…….”
“양천의 심복으로 보낸 사군칠장(邪君七長)에게서 연락이 없다고 합니다. 양천 휘하 정예라는 십이지신의 흑양으로 활동했는데, 어느 순간 부내에서 증발했다고 합니다.”
“사군칠장의 증발을 직접적으로 알아챘다는 것은, 묵룡부에 심어 둔 세작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렷다?”
“사군칠장의 증발, 새로이 정보부장이 된 의문의 고수가 모용가주에게 죽은 것까지가 세작들이 보낸 마지막 정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묵룡부에 뿌려 둔 세작이 모두 잡혔다는 뜻인가?”
“현재로서는…… 그렇다고 봐야 할 듯합니다. 모두 증발하지 않았다면, 한 달이 넘도록 연락이 끊기지도 않았을 테니까요.”
“끝내주는군.”
“…….”
“내 누누이 말했거늘. 양천을 가벼이 보지 말라고. 사군칠장? 그깟 애송이를 대표로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양천 목에 목줄을 걸 자신이 있다고 하더니만, 꼴이 우습게 됐군.”
“…….”
“사음의 반응은 어떤가?”
“침묵 중입니다.”
“꽤 치욕스러운 모양이야. 하긴, 욕을 먹어도 이상하지 않지.”
“그리고, 정확한 정보는 아니지만 한 가지 보고를 더 올릴까 합니다.”
“보고하게.”
“양천이 모용가주와 모종의 거래를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모용가주와?”
“그렇습니다.”
“모용가주가 묵룡부 측 정보부장을 죽였다고 하더니만, 왜 거래를 했다는 거지?”
“정확한 이유는 불명입니다. 정보 자체의 신빙성도 그리 높지 않습니다만, 모용군이 양천과 직접 대면했음에도 무림맹으로 무사히 귀환한 것과 모용군의 딸로 추측되는 여인이 묵룡부로 들어가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호오.”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방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추측에 불과합니다만.”
“추측이라지만, 일련의 과정을 따져 보니 신빙성이 매우 높아 보이는데.”
“양천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모용군은 굳이 양천과 거래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라…… 혹, 모용군에 관한 신상 정보가 있나?”
“있습니다. 세밀하지는 않습니다만.”
“확인해 보게. 그의 성정이 어떠한지, 모용군이 가주가 된 뒤 모용세가가 얼마나 확장되었는지까지 조사해 봐.”
“알겠습니다만, 어찌 그러시는지요?”
“만에 하나 모용가주가 야심을 숨기고 있다면, 양천과 거래할 이유는 충분하네.”
“예?”
“내년에 무림맹주를 선출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
“무림맹이 창설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야. 그들 역시 초대(初代) 맹주 자리엔 안정적인 정치를 발휘할 만한 자를 앉히고 싶겠지.”
“소림…….”
“혹은 무당파든. 아마 구파일방에서 선출될 확률이 높지. 그러나 판은 언제나 흔들릴 수 있는 법, 누군가가 상식을 벗어날 정도의 두각을 나타낸다면 맹주 자리를 거머쥘 수도 있겠지.”
“그렇군요. 그래서 모용가주를…….”
“얼핏 듣기로 모용군의 야심이 대단하다고 알고 있네. 그만큼 대외에 자신을 꾸미는 능력도 탁월하다고 했던 것 같아. 더 자세한 조사가 필요하겠지만.”
“그러셨군요.”
“만일, 모용군이 양천과 손을 잡았다면.”
“…….”
“그때는 우리가 이 판을 흔들어 볼 수도 있네.”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사음이 이 건에 대해 걸고넘어지면…….”
“사음은 흑도를 담당하고 있었어. 우리는 모용군을 노리고 있지. 서로 싸우는 판이 달라.”
“아!”
“모용군에 관한 정보, 전부 긁어 오게.”
“명을 받듭니다.”
* * *
촤르르르륵!
허공을 꿰뚫는 교룡쇄가 무서운 힘을 발산했다.
티티티팅!
쏟아지는 화살을 모조리 쳐 내는 쇠사슬.
묵비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파아아앙!
교룡쇄를 손에 감은 연호정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남천의 화신, 주작의 보법이었다. 제아무리 묵비가 신법에 자신이 있어도, 혈익휘천 앞에서까지 여유를 부릴 순 없었다.
터어어어엉!
용비순행의 신법으로 거리를 벌린 묵비가 화살 없이 시위를 당겼다.
무형의 진기로 날리는 화살, 무형탄(無形彈)이었다.
타아아아앙!
공기를 불태우며 쏘아지는 무형탄의 위력은 이전과는 또 달랐다.
연호정의 눈에 불이 붙었다.
콰앙!
신속의 보법이 힘과 전진의 보법으로 바뀐 것은 순간이었다. 백색의 바람이 휘몰아치며 백호군림의 일 보(一步)를 만들어 냈다.
교룡쇄를 양 주먹에 둘러 감은 연호정이 미친 듯이 쌍권(雙拳)을 휘둘렀다.
퍼펑!
무형탄이 부서지고, 두 줄기 권풍(拳風)이 묵비의 몸을 노렸다.
빠르고 날카로운 권격. 상대를 일절 봐주지 않는 무서운 무공이었다.
그때, 묵비의 몸이 불가사의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파아악!
벼락처럼 달려 나간 묵비가 순식간에 연무장 너머 벽 앞에 다다랐다.
팍!
연무장 벽을 박차고 도약한 그녀의 몸이 어느새 반대편 벽에 도달했다.
파바바바박!
용비순행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신법이 아니었다. 탄력, 유연성, 장거리 이동, 단거리 주파, 공격 보조 등 경신술이 할 수 있는 모든 범위를 충족하는 천하 정점의 무공이었다.
그 신법에 타고난 탄력, 그 탄력을 극한까지 발달시킨 수련, 마지막으로 묵비의 무서운 동체 시력이 합쳐져 엄청난 광경을 만들어 냈다.
파파파파파파팡!
사방에서 돌가루가 튀었다.
파파팡! 타타타타타탕!
공기가 폭발하는 소리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이, 이게 뭐야?!”
팽만호의 목소리는 경악으로 가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묵비의 움직임을 보는 멸사군병 모두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연무장 내의 모든 영역을 지워 가며 움직이는 묵비. 대체 속도가 얼마나 빠른 건지, 그 움직임이 육안으로 잘 보이지도 않았다.
마치 하얀 물감을 담뿍 찍은 굵은 붓으로 수십 개의 직선을 그리는 것처럼 미친 듯이 움직인다. 놀랍게도, 그리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데도 땅과 벽을 박차는 발끝의 움직임은 무척 산뜻해 보였다.
‘흐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굉장하긴 하다만, 체력 소모가 극심할 텐데.’
묵비의 무공은 동적(動的)인 무공이었다. 지닌바 심폐 능력이 연호정보다 크게 뒤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움직임은 언제까지나 지속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단기전으로 승부를 보려는 것. 하지만 녀석은 내 반응 속도를 알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화살을 날려 봤자 전부 피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쿠르르르릉.
보이지 않는 파도가 사방에서 몰아치는 듯했다. 연호정이 현무기를 끌어 올린 것이다.
‘동시다발 저격!’
연호정의 추측은 정확했다.
퍼어어어어어엉!
엄청난 울림을 담은 무형탄이 연호정에게 쏘아졌다.
한 발이 아니었다. 사방을 끊임없이 종횡하는 묵비가 움직일 때마다 쏘아 내는 무형탄, 다만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한 번의 폭음만 들릴 뿐이었다.
우우우우웅!
벽라진기가 벼락처럼 치솟았다.
세상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연호정은 팔방에서 몰아치는 무형탄의 개수를 헤아려 보았다.
‘마흔일곱, 마흔여덟, 마흔아…… 쉰아홉?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열 발은 쏟아 낸다는 거지?’
연호정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미쳤군. 이런 무공을 구상했단 말이야?’
물론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칫 방심하다가는 자신조차 당할 판이었다.
‘그렇다면.’
상대가 상식을 넘어서는 공격을 가해 왔다면, 이쪽 역시 상식을 초월하는 대응을 보여 줄 수밖에.
연호정의 두 손에 흑색의 수기(水氣)가 담겼다.
콰아아아앙! 퍼퍼퍼퍼퍼펑!
연무장이 부서지며 자욱한 연기를 피워 냈다.
“으아악!”
“피해!”
“시바, 구경하다 죽게 생겼네!”
멸사군병들이 기겁하여 뒤로 물러났다. 튕겨 나온 경력의 여파만으로도 내상을 입을 판이었다.
투우우웅!
하늘 높이 날아오른 묵비의 얼굴은 상당히 창백해져 있었다. 내공의 소모와 신체가 받는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만은 밝았다.
‘구룡파멸진(九龍破滅陣)이 제대로 들어갔다. 실전에서 성공할 줄은 몰랐는데.’
구룡파멸진은 구룡파천궁상의 무공이 아니었다. 연위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그녀 스스로 창안한 기술이었다.
용비순행의 탄력과 속도, 그리고 구룡궁술의 파괴력을 접목시킨 그녀만의 무공. 아직 보완해야 할 점은 많았지만, 화력 면에서는 용아포(龍牙砲)보다도 막강한 기술이었다.
쿠르르릉!
자욱하던 먼지구름이 가라앉으며, 온통 터지고 박살 난 연무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순간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어디 갔지?’
구룡파멸진에 직격을 당하면 시체조차 온전하지 못하다.
하지만 연호정에게는 해당 사항이 아니었다. 그녀는 연호정의 능력을 알고 있었고, 이 정도 공격은 여유롭게 받아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한데 연호정이 사라졌다.
연무장 중앙, 거대한 구멍만 남긴 채.
‘설마?!’
구룡파멸진에 당한 걸까? 진짜로?
타아악!
재빨리 땅으로 내려선 묵비가 사방을 훑어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 연 공자!”
그때였다.
쾅! 촤르르르르륵!
땅에서 솟구친 교룡쇄가 그녀의 발목을 잡아챘다.
“헉!”
콰드드득!
교룡쇄에 묶인 그녀의 발이 발목까지 땅으로 파고들었다.
엄청난 내공이었다. 순간적으로 힘을 줘 막았는데도 발목까지 파묻혔다. 묵비의 내공량을 생각하면 정말이지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묵비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렸다.
‘땅?!’
콰콰콰쾅!
천지가 울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좌측 땅속에서 연호정이 솟구쳤다.
묵비의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티티티팅!
그 한순간에 무형탄을 사 연발이나 쏘아 내는 묵비의 반응 속도도 인간의 영역은 아니었다.
하지만 연호정은 더 빨랐다. 빠르고 유연한 보법으로 무형탄을 피해 내며 접근한 그가 호왕구벽세를 펼쳤다.
쾅!
“큭!”
묵비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놓친 홍련궁이 저만치 날아갔다. 막강한 일격에 그녀 역시 튕겨 나갔어야 정상이지만, 발목이 교룡쇄에 묶여 있어 회피도, 방어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끄응.”
“괜찮냐?”
연호정이 사악하게 웃었다.
“내가 이겼다.”
묵비가 볼멘소리를 뱉었다.
“치사해요.”
“뭐가 치사해?”
“땅으로 숨어들다니,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실전에 규칙이 어디 있어?”
“그리고, 발목에 이건 뭐예요? 묶어 놓고 때리겠다, 이거예요?”
“이건 철저하게 네가 긴장을 푼 탓이야. 설마, 그 무공에 내가 흔적도 없이 갈려 나갔다고 착각한 건 아니겠지?”
진짜 얄미운 사람이다.
묵비가 투덜거렸다.
“이거나 풀어 줘요. 어떻게 묶었길래 꼼짝도 안 하네.”
연호정이 그녀의 발목에 칭칭 감긴 교룡쇄를 풀며 말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네?”
“이번 공격 말이야. 어지간한 상대는 피할 엄두도 못 내겠어. 뭐, 진짜로 전탄(全彈)을 명중시키려면 훨씬 더 섬세해야겠지만.”
묵비의 얼굴에 기쁨이 어렸다.
“괜찮았어요?”
“어, 근데 실전에 쓸 정도는 아니야. 내공과 체력 소모가 너무 과해. 확실하게 죽인다면 모를까, 못 죽이면 네가 당할 거다.”
“……하긴.”
“조금 더 잘 만져 봐. 완성되면 결전 병기로서 나무랄 데가 없을 것 같다.”
“네.”
멸사군병들은 두 사람의 무지막지한 비무에 혀를 내둘렀다. 살벌할 줄은 알았지만 이건 정도를 넘어섰다.
그리고 새삼 실감했다. 자신들의 군장이 강하다는 것을.
저 재앙 같은 공격에서도 긁힌 상처 하나 없는 연호정의 무공은 진정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군장님!”
같이 밥이나 먹자 말하려던 연호정이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제갈아연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손님 오셨…… 이게 뭐야?! 누가 연무장 박살 냈어! 둘이 비무라도 했어요?”
“커험.”
“아, 싸우려면 어디 산골짜기라도 가서 싸워요! 뭐 하는 짓이야, 이게!”
연호정이 묵비를 가리켰다.
“묵 부장이 박살 낸 거야. 난 땅속에 숨은 죄밖에 없어.”
묵비가 배신감이 느껴지는 눈으로 연호정을 보았다.
제갈아연이 투덜거렸다.
“쳇, 보수하려면 공금 엄청 깨지겠구만.”
“근데 왜?”
“손님 오셨어요. 얼른 와요.”
“누구?”
제갈아연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