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화. 그림자 전쟁 (2)
“흐음, 다향이 제법 좋소이다.”
“다행이구려.”
“다만, 오늘은 왠지 술이 마시고 싶은데.”
“해가 중천에 떴습니다. 음주를 하기에 좋은 시간은 아닌 듯싶습니다만.”
제갈문호의 점잖은 거절에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시간 따져 가며 술 마시는 시대는 지났소이다, 군사.”
“그렇습니까?”
“별 감흥 없으신 모양이군. 오랜만에 진득한 얘기 좀 하려고 왔는데 말이오.”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였다.
“……그러시군요. 긴히 하실 얘기가 있다는데, 고작 차를 대접하면 너무나도 송구스러운 일이 되겠지요.”
“허허허.”
“마침 연가주에게 받은 공부가주가 있습니다. 그걸로 한잔, 어떻습니까?”
“아주 좋소.”
잠시 후, 두 사람 사이에 조촐한 술상이 차려졌다.
“한잔 받으시지요.”
술을 받고 가볍게 입술을 적셔 본 모용군의 눈이 커졌다.
“허어, 이번 해 공부가주 물량이 크게 줄었다더니만,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오. 맛과 향이 아주 부드러워졌군.”
“그러게나 말입니다. 워낙 귀한 술이라, 저도 귀빈이 아니면 쉽게 꺼내지 않지요.”
한 잔 마셨으니 슬슬 본론을 꺼내라는 뜻이었다.
모용군이 웃으며 제갈문호의 잔을 채워 주었다.
“군사.”
“말씀하시지요, 모용가주님.”
“군사께서는 통천신의(通天神醫)와 친분이 있지 않소?”
제갈문호의 눈이 반짝였다.
“친분이랄 것까지는 없고, 어쩌다가 몇 번 차를 마신 적은 있습니다. 통천신의처럼 대단한 분께선 저 같은 불학무식한 놈과는 쉬이 교류치 아니하시지요.”
“허허, 예전에 연 군장이 명가와의 싸움으로 사경을 헤맬 때, 통천신의를 불러 그를 치료케 해 주셨잖소?”
“물론 그랬지요. 다만, 당시 그분께서는 저의 부탁이 아니라 제 딸내미의 부탁으로 오신 겁니다.”
“어찌 되었든, 귀 가문과 통천신의 사이에 어느 정도 인연이 있다는 건 분명한 것이로군.”
“그 또한 인연이라면, 분명 소중한 인연이랄 수 있겠지요.”
상대가 무슨 말을 꺼낼지도 모르는데 섣불리 확답을 할 필요는 없었다. 제갈문호는 신중하게 접근했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께서도 아시겠지만, 통천신의는 성정이 괴팍하기로 유명하나 지닌바 실력만큼은 중원 제일을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소이다.”
“대단한 분이시지요.”
“하지만 그분 역시 의원이오. 그분이 과거 어디서 의술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분의 의술이 사도(邪道)였다면 진즉 매장을 당했겠지.”
제갈문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분의 성정이 괴팍하다고 하여 그분의 능력까지 폄하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입니다.”
“알고 있소. 나는 통천신의가 중원의 정통 의맥을 이었다고 믿소. 그렇지 않았다면, 제아무리 의계의 최고 원로라 해도 지금까지 활동할 수는 없었을 터이니.”
“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모용군이 의자 밑에 놔두었던 보자기를 들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천년설삼이오. 그것도 세 뿌리나 되지.”
“……?!”
“하곡이라고, 하남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는 명의가 있소이다. 그자가 이 사람에게 뇌물이랍시고 준 것이 바로 이 천년설삼 세 뿌리요.”
제갈문호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모용군이 손사래를 쳤다.
“오해하지 마시오. 내가 진정 뇌물을 받아먹을 요량이었다면, 굳이 군사 앞에서 대놓고 말했겠소?”
“하면 무슨 뜻입니까?”
“의신회라는 조직을 알고 계시오?”
“의신회?”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해 드리리다.”
그가 하곡에게 들은 바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제갈문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중원 의맥을 이은 의원들의 연합이라.”
“이번에 서역신녀를 데려오기 위해 탕마멸사의 군장들을 파견하지 않으셨소?”
“물론 그랬습니다.”
제갈문호가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감이 있었습니다. 서역신녀의 실력은 확실하지요. 그러나 중원의 의원 중 상당수가 그녀를 질시하고, 심지어는 위해를 가하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위해를 가한 정도가 아니외다.”
“그렇군요. 모용가주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자칭 중원의 의맥을 이었다는 자들이 조직적으로 그녀를 못살게 굴었던 것이로군요.”
“그렇소이다. 심지어 그들은 관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소.”
제갈문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확인된 사항입니까?”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이 사람을 뭘로 보는 것이오?”
“…….”
“그 부분은 확신해도 좋소. 게다가 하곡의 말을 들어 보니, 의신회 측에서 군장들에게 접근하여 제법 실례를 저지른 모양이외다.”
“뭐라고?!”
모용군은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간략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의 말을 들은 제갈문호가 탄식을 토했다.
“악수를 둬도 그런 악수를 두다니.”
“그렇소이다.”
“허, 나는 연 군장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건드리는 자들이 있다면, 시원하게 박살을 내고 오라고 말입니다. 설마하니 그들이 조직적으로 나서서 이런 일을 벌일 줄은…….”
“연 군장의 성격을 군사도 아실 게요. 연 군장은 당한 걸 절대로 잊지 않소이다. 게다가 지닌바 능력은 그 누구보다도 특출나지요.”
“절대 그냥 넘어가지는 않겠군요.”
“그렇소이다. 물론 임무가 먼저이니만큼, 일단 서역신녀부터 데리고 온 이후에 작업에 착수하겠지.”
제갈문호가 한숨을 쉬었다.
“이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해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화가 났기 때문이오.”
“화가 나다니요?”
순간 모용군의 두 눈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살기가 어찌나 지독한지, 제갈문호조차도 순간적으로 움찔했을 정도였다.
이 정도의 살기는 진심에서 우러나오지 않으면 보이기 힘들다. 제갈문호는 모용군이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의원이면 의원답게 사람 몸뚱이 고치는 일에나 신경을 쓸 것이지, 감히 무림맹의 행사에 끼어들어 물을 흐리려 하다니.”
“…….”
“무림맹은 당대 무림 최강의 조직이외다. 그 어떤 조직도 무림맹의 권위에 도전해서는 안 되오. 설령 관부라 할지라도.”
“위험한 발언입니다.”
“군사는 그리 생각지 않는단 말이오?”
“물론 의신회의 처사에는 저 역시 화가 납니다. 실제로 그런 조직이 있는지조차 몰랐으니, 기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합니다. 그러나 중원 최강의 조직이기에 더더욱 고개를 낮추고 허리를 숙여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허리를 숙일 땐 숙이더라도, 칼을 뽑아야 할 때는 망설이지 말아야 할 것이오. 군사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연 군장을 보낸 게 아니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각자가 보는 선(線)이 달랐다. 제갈문호의 눈은 신중함을 갖춘 정의(正義)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모용군의 눈은 정의를 결정 지을 수 있는 강력한 권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각자가 보는 곳이 다르니, 똑같이 화가 나도 대응 방식을 달리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군사. 지금 이 자리에서만큼은 터놓고 얘기하겠소.”
모용군이 번뜩이는 눈으로 제갈문호를 노려보았다.
“나는 군사가 싫소이다. 그 좋은 능력을 품고도 이 이상을 넘보려 하지 않는 가벼움이 마음에 들지 않소. 신중함이라는 덕목으로 포장된 소심함도, 현실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덜떨어진 이상을 좇는 것도 다 마음에 안 드오.”
무척이나 거친 언사였다. 공적인 자리든 사적인 자리든, 모용군이 이렇게까지 살벌하게 말하는 일은 지극히 드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군사를 존중하는 것은, 그대가 무서워서도 아니고 상대 당파의 움직임을 견제하기 위함도 아니외다.”
“하면 어찌 저를 존중하십니까?”
“그대 역시, 무림맹에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오.”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모용군이 말을 이었다.
“서로가 이미 다 알고 있으니, 조금 더 깊은 구석까지 들어가 봅시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나는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오.”
“…….”
“그 누가 힘을 쏟고 몸부림을 친다 한들 감히 발치에도 이르지 못할 천하제일의 권위를 손에 넣고자 하오. 성천십삼좌든 각 문파의 원로든, 그 누구도 내게 대항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을 손에 넣고 싶소. 내게는 그런 야심이 있소이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한 힘을 얻는 건, 나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소. 내게는 많은 인재가 필요하오.”
“설마하니, 이 사람을 회유코자 함입니까?”
“내 입장에서 보면, 당신은 회유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오.”
“……?!”
“누가 맹주가 되었든, 그 맹주가 천하를 도탄에 빠트릴 만한 자가 아니란 것만 확신하면 최우선 순위로 민생 안전을 생각할 사람이외다. 그리고 나는 무림맹과 함께 최고가 되고 싶지, 반대 당파라고 다 죽이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는 사람이오.”
제갈문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모용군의 눈에서 시퍼런 뇌전이 번뜩였다. 진심으로 화가 나니, 애써 억눌러 두었던 뇌정공이 저절로 발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시겠소? 내가 당신들을 견제하고, 때로는 비수로 찌르거나 몽둥이로 후려치는 이유는 당신들이 내 앞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오. 그러나 내가 맹주가 되면, 반대 당파라고 숙청하는 일은 없을 거란 뜻이외다.”
“…….”
“나는 그런 사람이오. 그래서 내 사람을 아끼지. 마찬가지로, 내가 손에 넣고자 하는 무림맹은 그 어떤 조직도 깔봐서는 안 될 신성한 조직이란 말이오.”
“가주.”
“그리고 그것은!”
쾅!
모용군이 탁자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술병과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나뒹굴었다.
“당신에게도 해당되는 얘기올시다.”
“……!”
“보는 곳이 다를지언정, 당신 역시 화를 내야 마땅하오. 이유? 이유는 분명하오. 그 같잖은 의원 놈들이 알량한 권력을 손에 넣었다고 감히 백도 무림 최고의 조직을 찔러 보고 있잖소!”
“…….”
“약자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분명 위정자가 갖춰야 할 덕목이외다. 그러나 약자들의 눈치를 봐 가면서 정치를 하려거든, 당장 그 자리에서 내려오시오!”
제갈문호의 눈이 흔들렸다.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모용군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그 개 같은 놈들이 감히 내 동생을 협박했소.”
“…….”
“연호정, 그 망할 찰거머리가 아니라! 십 년 만에 내 곁으로 돌아온 소중한 동생을 건드렸단 말이오!”
지이이이잉!
모용군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뇌기가 뿜어져 나왔다.
강한 인내심으로 외기(外氣)까지 분출하고 있지는 않지만, 폭발 직전의 화탄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만큼 화가 난 것이다.
“나는 권력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내 혈육이라도 내칠 수 있소. 그러나 그 모든 행위는 나의 꿈에 동참한, 혹은 내 세 치 혀에 넘어왔으나 결국은 하나가 된 휘하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이기도 하오.”
“…….”
“무림맹 소속의 군장들이 협박을 받았소. 이대로 넘어가면, 내 다음 대 맹주직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만큼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모용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호흡을 고른 그가 차갑게 말했다.
“나는 하곡에게 말했소. 더 이상 연호정을 자극하지 말라고. 의신회는 물론, 관부의 기둥뿌리까지 뽑힐 거라고 단단히 겁을 주었소. 이유를 아시오?”
“…….”
“놈들은 우리 손에 무너져야 하기 때문이오.”
“…….”
“내, 분명히 두고 볼 것이오. 당신에게 진정 군사의 자격이 있는지를.”
쾅!
모용군이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