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그림자 전쟁 (5)
“아, 그래요?”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자칫 잘못하다간 길이 엇갈릴 뻔했어요.”
“아닙니다. 연 군장님께서 워낙 중요한 직책에 계신지라, 그분의 동선은 언제나 주시하고 있습니다.”
“헤에, 그렇게 중요한 직책인가요?”
“물론입니다. 현재 무림맹에는 무수히 많은 전투 부대와 조직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직 중 가장 자유로운 부대가 탕마멸사의 유군 부대지요.”
“그렇군요.”
“유군 부대 자체가 어느 정도 맹의 제어에서 자유로운 독립 부대라는 뜻입니다. 즉, 맹 차원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부대라는 것이지요. 연 군장님께서는 그만큼 큰 신뢰를 받고 계십니다.”
“대단하군요. 큰 명성을 날리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조금 갑작스럽긴 한데, 다소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하나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예? 아, 그러시지요.”
“올해가 지나면 열여덟, 맞으시지요?”
“그렇습니다.”
“…….”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닙니다. 하면, 호북 지부 쪽에도 연락을 넣어 놓겠습니다. 마차를 마련해 두었으니 편하게 이동하십시오.”
“아, 마차는 괜찮습니다. 신법 수련하는 셈 치고 달려가도록 하지요.”
“그, 그 먼 거리를요?”
“하하, 형님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나중에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하면 이만.”
어느새 저 멀리 달려 나간 청년의 뒷모습을 보며, 개방의 강서성 남창(南昌) 지부장은 혀를 내둘렀다.
“열여덟 나이에 저런 말도 안 되는…… 허허, 가주도 그렇고 대공자도 그렇고, 다음 세대의 무림은 연가가 주도하겠구나.”
* * *
이틀이 지났다.
“외상은 다 나았네요?”
“그렇지.”
“하지만 중요한 건 내상이겠죠. 지금 생각해 보면 진짜 무식했네요. 구식이라도 화포는 화포인데, 그걸 정면으로 깨부술 생각을 하다니요.”
연호정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거 내가 차례대로 안 깨부쉈으면 너희 목숨 다 날아갔다.”
“알아요. 그러니까 어처구니가 없죠. 세상에 화포까지 동원하다니.”
“그렇…… 엥? 그나저나 너, 화포에 대해 좀 아나 보다?”
묵비가 피식 웃었다.
“세상 돌아가는 건 몰라도, 알아야 할 건 알아요. 관일곡에선 활 외로, 사출 병기(射出兵器)에 관한 전반적인 지식을 가르치죠. 암기를 제외하면요.”
“그렇구만?”
새로운 사실을 안 기분이었다. 적어도 과거 오대신장 시절의 묵비는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묵비의 눈이 빛났다.
“그나저나 이상하지 않아요?”
“뭐가.”
“아무리 의원들의 모임이라 해도 화포를 동원한 건 너무 과해요. 화포는 군부 내에서도 최고 수장의 허가가 떨어져야만 운용할 수 있는 비밀 병기 아니었나요?”
“맞아.”
“그렇다면 의신회가 군부의 수장에게까지 손이 닿아 있다는 건데…….”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이라고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게 아니지. 그들은 무림맹 산하 조직의 수장들에게 접근하여 맹의 임무를 포기하라고까지 했어.”
“음.”
“어지간한 배포 없이는 그러기도 힘들지. 다소 오만했다손 치더라도, 믿고 있는 거야. 그 정도 선까지는 무림맹을 건드려도 된다고. 문제가 생기더라도 무마할 힘이 있다고 확신하는 거지.”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그렇다면 정말로……?”
“아직 모르는 일이야. 그리고 이 일은 당장 우리가 처리할 일도 아니고.”
“네?”
연호정이 주루를 힐끔거렸다.
“우리의 임무는 서역신녀를 호위하는 것이다. 그 어떤 일도 그보다 우선시될 수 없어.”
“…….”
“당장 후개라도 옆에 있다면 모를까, 뭔가 알아보려 해도 쉽지 않은 상황이야. 일단은 우리 임무부터 무사히 끝낸 후에 처리해도 처리해야겠지.”
“그리고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이 일을 무림맹 상부에 알릴 테니, 제아무리 연 공자라도 나서서 처리하긴 쉽지 않겠죠?”
“그렇지.”
“손을 떠났다는 말이 그런 뜻이었군요.”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지.”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묵비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가 아니겠지.’
그녀는 연호정을 잘 알고 있었다.
연호정은 자신을 건드린 사람을 용서하는 법이 없다. 특히나 의신회처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선을 넘은 자들은 철저하게 깨부수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지금 연호정은 말한다. 자기 손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라고. 이번 일은 무림맹이 처리해야 옳은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일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뜻이야. 그리고 그 일은 바로…….’
서역신녀다.
혼란스러운 눈으로 연호정을 보던 묵비가 입을 열었다.
“연 공자.”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급한 게 아니면 나중에 얘기할까?”
“네? 왜요? 어디 가게요?”
“서역신녀한테 가 보게.”
순간 묵비의 얼굴에 긴장이 차올랐다.
“연 공자.”
“걱정하지 마라. 별일은 없을 테니까.”
“…….”
“다만,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기류를 조금 바꿔 볼 필요는 있겠지.”
연호정은 이틀 전, 모용우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다만, 전장에서 만난 게 아닌 만큼 그녀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노력하지.’
모용우는 서역신녀를 적으로 규정하고 움직이는 것에 망설임을 보였다.
연호정은 모용우를 이해했다. 그는 삼교와의 전쟁을 겪어 보지 않았고, 그 피비린내 가득한 전장의 공기를 맡아 본 적도 없었다.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더 신중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말을 반대로 하면, 연호정은 삼교와 관련된 일에는 절대 냉정해질 수 없다는 뜻과 같다. 냉정해지려고 노력할 뿐이다.
‘형님 말도 틀린 건 아니야.’
신중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게다가 연호정이 보기에도 서역신녀는 천성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물론 모용우에게 했던 말처럼, 연호정에게 있어서 삼교 놈들의 선악은 중요치 않았지만.
연호정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괜스레 분위기 말아먹는 것도 내 취향은 아니지. 일단은 만나 보고 결정하도록 할게.”
그때, 묵비가 연호정의 등짝을 후려쳤다.
퍼억!
“컥!”
연호정은 순간 바닥을 구를 뻔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매서운 일격이었다. 연호정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으르렁댔다.
“이게 뭔 짓이야, 인마!”
“어깨에 힘 빼라고요.”
“뭐?”
묵비가 실실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든, 연 공자는 연 공자답게 행동하면 되잖아요? 그간 연 공자가 그래 왔던 것처럼.”
“…….”
“연 공자답지 않게 부담 갖지 말고, 저지르려면 가서 시원하게 저질러 봐요.”
물끄러미 묵비를 보던 연호정이 등을 쓰다듬었다.
“얘기 끝나고 오면 네 등짝에도 불날 줄 알아.”
“신법 수련이나 더 하고 오셔.”
“나한테는 혈익휘천이 있거든.”
“나한테는 활이 있는데?”
“못 피할 것 같냐?”
“못 맞출 것 같나 보죠?”
“……죽일.”
“하아.”
기우희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의신회라.’
침상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기를 한참.
피로가 잔뜩 쌓였지만, 심경이 복잡해서 그런지 잠이 오질 않았다.
그녀는 잠영일호의 말을 떠올렸다.
‘또한, 무림맹으로 침투하는 것 역시 성녀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성녀님께서 이 수난을 겪고 계시는 이유는 원죄(原罪)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그녀에게는 죄가 있었다. 하지만 그 죄는, 그녀의 자유 의지로 저지른 죄가 아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떠안고 있던 죄. 그녀의 혈관에서 흐르는 피의 절반은, ‘그들’의 입장에선 용납할 수 없는 천함을 담고 있었다.
“천하다…….”
기우희의 얼굴에 슬픔이 어렸다.
“대체 귀천(貴賤)은 무엇으로 결정되는 것이죠? 돈 많은 자의 핏줄이면 귀하고, 가난한 자의 핏줄이면 천한 건가요? 피부색이 다르면 천하고, 피부색이 같으면 고귀한 건가요?”
기우희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의술을 파고들었다. 남들이 말하는 피가 다르다는 얘기를 문자 그대로 알아듣고, 정말 인체의 구조부터 알아보려는 치기 어린 생각에서 시작한 학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의술에 능통해지고 세상을 경험하면서, 그녀는 깨달았다.
이 세상에 귀천은 없다는 것을. 그저 그 귀천을 가르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란 것을.
하지만.
“……아무리 부르짖어 봤자, 그들은 이해하려 들지도 않을 테니까.”
기우희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어쩌면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닐지도 모른다.
선택권이 있었든 없었든,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림맹으로 향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어야 한다는 현실이었다.
나의 뜻을, 세상의 가치를 알아주지 못한다고 한탄해 봤자 현실은 바뀌지 않는 법.
‘사람 몸을 고치는 의원이, 한 조직의 앞잡이가 되어 세작 노릇이나 해야 한다니.’
기우희가 탄식을 토해 냈다.
‘의신회를 욕할 자격은 처음부터 없었어. 나 역시 그들과 하등 다를 게 없는 사람이야.’
그때였다.
“멸사군장 연호정입니다.”
순간 그녀는 깜짝 놀라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네?!”
“…….”
“……아, 네. 드, 들어오세요.”
“알겠습니다.”
끼이이익.
문이 열리고, 연호정이 들어왔다.
기우희의 눈이 흔들렸다. 연호정이 들어오자마자 방 안의 분위기가 일변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당황한 기우희는 쭈뼛쭈뼛한 자세를 고수했다.
‘이상해.’
스스로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그녀는 긴장되는 마음을 좀처럼 풀어내지 못했다.
‘내가 왜 이러지?’
연호정을 마주하면, 아니 그의 목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쿵쾅거린다.
상대에게 이성적인 매력을 느껴서? 그게 아니다.
기우희는 연호정의 눈빛과 목소리에서 진한 위압감을 느끼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 그 위압감은, 교(敎)의 호법들 이상의 적의(敵意)로 물들어 있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기 신의께서는 제 호위 대상입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앉아도 되겠습니까?”
“네! 그, 그러시죠.”
그렇게 두 사람이 탁자를 마주하고 앉았다.
연호정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 기우희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기우희는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숙인 채 쭈뼛거렸다.
숨 막히는 침묵이 이어졌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연호정이었다.
“긴장하고 계시는군요.”
“네?!”
“그렇게 긴장하실 필요가 없는데, 이상할 정도로 긴장을 하고 계셔서 말입니다.”
“아! 그, 그게…….”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
“외, 외상은 다 치료가 된 것 같은데, 내상은 아직 심각한 상태 같아서요.”
왜일까?
기우희의 그 말에 연호정은 왠지 김이 팍 새는 기분을 느꼈다.
“뭐, 괜찮습니다. 속이 좀 쓰리긴 하지만, 이 정도 상처는 익숙해요.”
순간 기우희의 눈이 번쩍였다. 마주 앉은 연호정이 다 놀랄 정도로 강렬한 안광이었다.
“안 돼요! 내상을 방치한 채 그냥 놔두다가는 훗날 장기가 크게 상할 수 있는……!!”
“…….”
“……사, 상한답니다?”
순간 소리를 버럭 질러 버린 스스로에게 놀란 기우희가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새하얀 피부가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이 인간?
물끄러미 기우희를 바라보던 그가 한숨 쉬듯 말했다.
“빌어먹을, 진짜 김새는구만.”
“허억! 제, 제가 뭔가 큰 잘못이라도……?!”
“뭐 하자는 겁니까?”
“……네?”
“세작질 하려고 들어온 거, 맞습니까?”
기우희는 그대로 거품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