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화. 준비 완료 (2)
“휴우.”
청년이 숨을 몰아쉬었다.
“확실히 신법 수련은 강산(江山)을 넘는 게 최고야. 익히기만 하고 숙련되지 않았던 게 벌써 몸에 붙었어.”
물론 이것 역시 경신술에 한해서일 뿐, 실전에선 또 다르다. 검술과 경신술을 시기적절하게 섞어 쓸 줄 알아야 전투의 효율이 올라가는 법이었다.
‘아마 형님은 이 모든 게 가능하겠지.’
청년은 자신의 혈육을 떠올렸다.
세상을 향해 포효할 때를 기다리고 있던 잠룡(潛龍).
어린 시절, 다소 삐걱거리던 관계를 청산하고 난 이후로 형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청년은 형의 발전을 한없이 감탄 가득한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안심하기도 했다. 형이 자신보다 한참이나 뛰어난 것이, 범상치 않은 역사를 가진 형제지간에선 오히려 다행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야 청년은 스스로의 마음을 바로 세울 수 있었다.
형의 발전, 이십 대 초반의 나이로 무종지벽을 돌파한 천하제일 후기지수의 위명에 진심으로 기뻐했으나, 동시에 형의 명성에 먹칠해선 안 된다는 걸 절감했다.
형은 세상에 다시없을 천재였다. 그런 형에게, 못난 동생의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그렇게 피를 쏟고 뼈를 깎는 하루하루 끝에.
청년은 비로소 자신의 힘에, 경지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아버지와 형의 명성에 먹칠하지 않을 정도는 된다는 확신을.
“자, 적당히 쉬었으니 또 달려 볼까.”
그 잠깐 새에 흐트러졌던 호흡을 완전히 정상으로 되돌렸다.
놀랍도록 빠른 회복 속도였다. 내공의 질과 양을 떠나, 체력을 극한까지 단련하지 않았다면 호흡을 이렇게 빨리 되돌릴 순 없었을 것이다.
청년이 땅을 박찼다.
파앙!
가히 쏘아지는 화살처럼 빠르게 나아간다.
굉장한 속도, 신법의 속도만큼은 어지간한 절정고수도 눈 아래로 볼 만한 경지였다. 심지어 그 짧은 순간, 조금은 어색했던 동작과 호흡이 무서운 속도로 제자리를 찾아 가고 있었다.
천재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재능이었다. 머리로 분석하고 받아들이는 종류의 재능이 아닌, 타고난 감각 자체가 남달라 머리보다도 몸이 먼저 기억하는 희대의 무골(武骨)이었다.
파아앙! 파아아앙!
안 그래도 빨랐던 신법의 속도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빨라졌다.
호흡의 분배가 점점 완벽을 향해 조정된다. 팔다리의 동작이 점차 하나가 되고, 쓸데없는 호흡이 줄었으며, 자연스럽게 내공 소모 역시 점차 느려지고 있었다.
마치 고고한 선비가 학을 타고 날아가는 듯했다. 이것이 바로 벽산연가 최고의 신법, 천종운행비(天縱運行飛)의 본모습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
청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쇳소리다.’
치이잉. 쩌어엉.
저 멀리 어딘가에서부터 강렬한 쇳소리가 들려왔다.
병장기와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였다. 나아가, 그 강렬한 충돌음 뒤로 불꽃 같은 살기와 처절한 피비린내가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 방향이라면 분명 형님과 일행이 가는…….’
그때였다.
화아아악!
청년의 눈이 커졌다.
온갖 살벌한 기세와 피비린내 속, 너무나도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기운 하나가 청년의 가슴을 떨리게 했다.
화르르르륵!
난생처음 느껴 보는 불처럼 화려한 기운이었다. 아니, 실제로 그 어느 것에도 비견하기 어려운 화기(火氣)가 세상을 모조리 불태울 것처럼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화기를 받치고 있는 것은, 거의 완전(完全)의 영역에 근접한 신공(神功)이었다.
‘벽라진결!’
검극사기(劍極思氣)가 폭발했다.
퍼어어엉!
청년의 몸이 한 줄기 빛살이 되어 쏘아졌다.
* * *
쩌저저저저정! 푸화아악!
허공을 수놓은 핏물은 환한 달빛을 받았음에도 시커먼 먹물처럼 보였다.
촤르르르륵! 퍼버버벅!
넓은 범위를 아우르는 교룡의 이빨이 문답무용으로 쳐들어오는 흑의인들의 목을 모조리 뜯어 버렸다.
연호정이 외쳤다.
“모용 군장!”
“알고 있네!”
파아앙!
단숨에 좌측 공격로로 진입한 모용우가 강인한 진각을 밟았다.
쾅!
대지가 뒤흔들렸다.
힘의 진각이었다. 연호정이 찍어 내는 진각보다는 위력이 약했지만, 대신 더 멀리 퍼져 나가는 진동이 모용우의 무공 특성을 말해 주고 있었다.
‘건곤.’
모용우의 탕마대검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쩌어어엉! 서걱! 쩌어어어엉! 서걱!
묵직한 검날이 허공을 가로지를 때마다 흑의인들의 협봉검과 자모원앙월(子母鴛鴦鉞)이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산산이 부서지고 있는 건 병기를 쥔 흑의인들의 목숨 역시 마찬가지였다. 느닷없는 습격에 분노한 것은 연호정만이 아닌바, 모용우 역시 드물게 살기를 뿜어내며 적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퍼억! 퍼억! 치리리리리링!
검배로 머리통을 부수고, 일곱 자루의 단창과 협봉검을 일검(一劍)을 휘둘러 잡아 둔다.
물 흐르듯 부드러운 검법의 연계기였다. 일격필살의 위력은 없지만, 그 흐름이 장강의 물살처럼 도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모용우가 탕마검을 비틀었다.
파캉!
검에 붙들린 병장기들이 모조리 박살 났다.
동시에 그의 좌수가 불을 뿜었다.
퍼버버버벅!
부드러운 장력에 맞은 흑의인 일곱이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잔혹한 살수였다. 모용세가의 비전 수공(手功), 황풍장(荒風掌)이 세상에 그 위력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쩌저저정! 서걱! 푸화아악!
모용우의 검법은 놀라웠다.
지금껏 대다수의 전투를 연호정에게 맡겼지만, 기실 모용우의 실력 역시 동년배에서 수위를 다투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연호정에겐 없는, 모용세가에서도 오직 그만이 타고난 재능이.
‘다섯.’
모용우가 눈을 감았다.
반면 그의 검은 장중한 흐름을 만들어 내며 하늘 높이 치솟은 흑의인들을 휘감아 갔다.
순간 건곤팔극심법의 내공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푸화아아악!
하늘에서 피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무형의 검기로 표적들을 옭아맨 후, 단숨에 당겨 베어 넘긴다. 건곤백팔검해에는 없는 수법, 교룡쇄의 움직임을 보고 즉석에서 구현해 낸 검기공(劍氣功)이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한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한들, 그것을 실전에서 곧바로 구현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유인즉, 생사결에서 익숙하지 않은 깨달음을 풀어내 봤자 제대로 통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용우에겐 해당되지 않았다. 극한의 상황에서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그대로 검결에 풀어내는데, 마치 수백 번을 연련한 것처럼 아무런 위화감이 없었다.
그것이 바로 모용우의 재능이었다.
감각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연지평과는 다른 재능. 바로 배우는 속도 자체를 가속화하는 것이었다.
실전 능력이 탁월한 것이 아니라, 어떤 무공이라도 한번 배우면 곧장 능숙하게 펼쳐 낼 수 있다. 극에 이른 분석력으로 얻은 깨달음을 몸에 붙이는 속도가 불가해할 정도로 빠른 것이다.
‘이것이다.’
촤아아아악!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선혈이 달빛을 가렸다.
‘이것이 바로 나의 무(武)다!’
장중한 검형(劍形)을 그리면서도 끊김이 전혀 없다. 일전에 연호정과의 대화로 깨달았던 자신의 무공을, 지금 이 순간 확실하게 펼쳐 내는 그였다.
그때, 거대한 그물이 연호정과 모용우의 머리 위로 펼쳐졌다.
모용우의 눈이 흔들렸다.
‘이건 힘든데.’
저 그물을 끊어 내기엔 몰려오는 적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그의 검법은 적들의 발을 묶어 두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다.
그때였다.
부아아아아앙! 퍼어어어엉!
화포처럼, 아니 화포 이상의 위력을 담은 철전 한 발이 그물을 통째로 박살 내며 뒤로 밀어 냈다.
‘묵 부장!’
지금껏 전선에 개입하지 않았던 묵비가 딱 적절한 순간에 참전한 것이다.
‘역시!’
멋진 일격이었다. 모용우는 화살의 위력이 아니라, 묵비의 시기적절한 참전에 감탄했다.
내상을 바로잡는 중에 돕겠답시고 괜히 화살만 소모할 필요는 없었다. 연호정과 모용우, 두 사람의 철벽같은 공방에 빈틈이 드러나는 순간 궁술을 펼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로 인해 묵비는 힘을 비축할 수 있게 되었고, 만에 하나의 경우가 생겨도 아군의 생존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연호정이 외쳤다.
“모용 군장! 한눈팔 때가 아니야!”
“아, 미안하네!”
촤르르르륵! 퍼버버버벅!
교룡쇄의 첨두가 칼날처럼 예리하게 흑의인들의 몸통을 꿰뚫었다.
전방위를 아우르는 무지막지한 무공이었다. 거기에 팔십 근 광룡부가 휘둘러질 때마다 흑의인들의 몸뚱이가 화탄에 맞은 것처럼 펑펑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갔다.
이 정도가 되면 제아무리 독종이라도 기가 질릴 수밖에 없었다. 흑의인들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 진형을 형성했다.
그때, 연호정의 전음이 모용우와 묵비에게 쏘아졌다.
[이놈들, 공격이 일관적이지 않아. 하나의 조직이 아니라 복수의 조직이 섞여 있는 거다.]
두 사람은 연호정의 생각에 동감했다.
적들의 공격은 일견 매서워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체계적이지 않았다. 물론 그 숫자와 살기만으로도 대단한 위협이었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쓸데없는 희생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런 놈들이 뒤로 빠지고 있다! 진형을 형성하고 차분하게 상대하려는 거야! 이놈들에게 생각할 시간을 줘선 안 돼!]
일순 연호정의 몸 전체에서 시뻘건 화기가 일렁였다.
모용우와 묵비의 눈이 커졌다.
쾅!
흑의인들이 물러나는 속도보다 세 배는 빠른 속도로 적진 한가운데에 진입한 연호정이 광룡부를 휘둘렀다.
퍼버버버벅!
“이, 이런!”
“사방으로 흩어져라!”
침묵으로 일관하며 공격하던 흑의인들의 입에서 비로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모용우가 소리쳤다.
“연 군장!”
연호정이 광룡부를 머리 위로 쳐들었다.
쾅! 쾅! 쾅!
무지막지한 도끼질이었다.
하늘 높이 쳐든 도끼를 그대로 내리쳐 적들을 쪼개 버리는데, 그 속도가 미친 듯이 빨랐다. 장작도 저렇게 빨리는 패지 못할 것 같았다.
콰앙!
강인한 진각과 함께 펼쳐지는 홍염육살공(紅焰六殺功).
힘과 전진의 무공인 호왕구벽세가 아니라, 적의 피를 탐하고 시신을 불태우는 초살(初殺)의 육살공이었다.
퍼버버벅! 쾅! 쾅! 콰르릉!
그야말로 독무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안 그래도 손발이 안 맞는 적들을 향해 미친 살인마처럼 도끼를 휘두르는데, 잡을 수 있을 때 다 잡겠다는 듯 평소보다 훨씬 더 격렬한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서걱! 푸화아악!
하지만 제아무리 연호정이 강하다 한들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협봉검과 작살, 자모원앙월과 각종 암기로 인해 연호정의 몸에는 하나, 둘 상처가 늘어났다.
심지어 화포를 깨부수며 입었던 내상도 다 낫지 않은 판국이었다. 연호정의 안색이 점차 창백해졌다.
그 모습을 본 모용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연 군장!”
그가 저도 모르게 외치며 뛰어나가려던 때였다.
‘……?!’
알 수 없는 막강한 기파가 후방에서부터 밀려 들어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모용우와 묵비는 깜짝 놀랐다.
‘고수?!’
강렬한 기파였다.
어딘지 모르게 다급함도 느껴졌지만, 문제는 다가오는 이의 속도가 실로 엄청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도에 어울리는 칼날 같은 기파가 폭풍처럼 주변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연호정이나 모용우의 상대는 아닐지언정, 그만한 적이 참전하는 순간 얘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모용우가 외쳤다.
“묵 부장!”
“알고 있어요!”
이렇게 된 이상 묵비도 힘을 비축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까드드드득!
홍련궁의 시위를 당기는 묵비의 눈이 무서운 속도로 접근하는 한 청년을 포착했다.
‘검사다! 그리고 빨라! 필시 반응 속도 역시 대단할…… 어?’
순간 묵비가 눈을 깜빡였다.
왜일까? 어쩐지 상대의 기파가 익숙했다. 그리고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는 상대의 얼굴 역시,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했다.
그렇게 묵비가 ‘어, 어.’하며 멈칫한 사이.
돌풍을 일으키며 접근하던 청년이 제자리에서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퍼어어어엉!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청년의 몸놀림은 가히 창천을 누비는 대붕(大鵬)과도 같았다.
묵비에게 소리치려던 모용우는 저도 모르게 청년을 바라보았다. 날아오른 청년이 어느새 적진의 하늘 위까지 접근한 것이다.
‘아름답다.’
놀라우리만치 빠르고, 순간 넋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몸놀림.
그러나 그 청년이 검을 빼 든 순간, 보는 이를 몽롱하게 만드는 기도가 단숨에 뒤바뀌었다.
차아아아앙!
진격의 발검(拔劍).
사방천지를 베어 넘길 듯 그물처럼 뿜어지는 막강한 검기가, 적아를 불문한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몰라보게 어른스러워지고, 놀라우리만치 강인해진 눈빛.
청년, 연지평의 강인한 두 눈이 일순 무시무시한 검광(劍光)을 뿜어냈다.
“형님!”
연호정의 얼굴에 놀라움이 일었다.
“평아!”
연지평의 검력(劍力)이 사방을 아우르며 적도들의 팔목을 휘어 감았다.
푸화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