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05화 (305/963)

305화. 해답은 하나다 (5)

기우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당장 목숨을 잃지는 않을 거예요.”

잠영일호가 충혈된 눈으로 기우희를 노려보았다.

단전이 완전히 파괴된 것도 모자라 혈도 곳곳에 모아 둔 음한백류의 기공력까지 상실했다. 연호정은 철저하게 그의 몸을 망가트렸고, 다시는 무공을 연성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느닷없이 찾아와 모든 것을 잃었다. 기우희를 노려보는 그의 눈에 원독의 빛이 가득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그거요?”

기우희의 대응은 담담했다.

“뭐가 말인가요?”

“고작 선택을 내렸다는 것이, 교를 배신하는 것이었소?”

“…….”

“당신의 혈관에는 신화(神火)의 염혈(炎血)이 흐르고 있소! 제아무리 핍박을 받았기로서니 교를 배신한다고? 지금껏 당신을 존중했던 나 스스로가 혐오스럽소이다!”

성녀라는 호칭이 당신으로 바뀌었다. 그만큼 배신감이 컸던 것이다.

기우희가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인제 와서 무슨 말을 할까요? 어차피 매번 했던 대화의 연장이겠지요.”

“부끄러운 줄 아시오!”

“…….”

“그렇게나 교가 싫었다면 차라리 목숨을 끊었어야 했소! 배신이라니?! 본교 역사상 당신 같은 작자는 단 한 명도……!”

“그러는 당신 역시 중원 무림을 배신했군요.”

“뭐라?!”

기우희가 잠영일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순간 잠영일호는 말문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보는 기우희의 두 눈이 평소와 달리 은은한 붉은빛을 띠고 있는 듯했다.

“중원 무맥을 잇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 단순히 중원의 무공을 익힌 것이 아니라, 아예 그쪽 일맥이었다니.”

“그것은 다른 문제요!”

“같은 문제예요. 누가 더 나은지, 누구에게 더 명분이 있는지를 떠나, 결국 사람은 각자 선택을 내리면서 사는 거랍니다.”

기우희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요. 어차피 이런 말을 해 봤자 당신은 이해하지 못하겠죠. 나 역시 나의 선택이 옳다 확신할 수 없어요.”

“…….”

“다만, 적어도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할지언정 어떤 여파가 와도 받아 낼 생각이에요. 그것이 선택에 따른 책임이니까요.”

“……나를 어찌할 셈이오?”

어차피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그였다. 그렇다고 기우희 역시 자신을 풀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잠영일호는 자신의 최후가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순간에 찾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여느 범부들처럼 울고불고할 생각도 없었다.

의연하게 최후를 맞이하리라. 잠영일호는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연 군장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요. 당신을 이용해 먹든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든, 저는 관여치 않을 생각이에요.”

“……!”

“죄송해요. 편안한 죽음을 맞긴 힘들 것 같아요.”

잠영일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날 죽이시오! 비록 갈등은 있었으나, 십수 년이 넘도록 당신을 호위한 사람이 나요! 그 정도 최후는 안겨 주어도……!”

“동시에, 제 어머니를 죽인 원수죠.”

“……!!”

기우희가 쓰게 웃었다.

“잠영일호. 저는요, 이 선택을 내리면서 여태 남아 있던 일말의 양심과 죄책감을 모조리 버리기로 했어요. 그 대상이 제 어머니를 죽인 원수라면, 더더욱 냉혹해져야만 하겠지요.”

잠영일호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아니라고, 난 당신의 어미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기도 했다. 기우희의 영안은 단순히 기척을 잡아내는 것을 넘어, 공력의 방패를 뚫고 들어와 참과 거짓마저 간파할 수 있는 신의 권능이었다.

기우희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흐린 하늘을 보는 그녀의 눈은, 선택을 내린 사람답지 않게 무척이나 혼란스러워 보였다.

“배신이라…….”

* * *

모용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묵룡부라?”

“그렇소.”

“묵룡부의 정보원이 맹을 염탐하고 있었단 말인가?”

“글쎄올시다. 염탐인지 뭔지는 아직 모르겠소. 워낙 입이 무거운 친구라, 지금껏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더이다.”

그 말에 모용군은 안심했다.

“묵룡부의 정보원을 잡았다면, 즉각 상부에 말해 뇌옥에 가둬 두어야 하지 않겠나?”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럴 생각이오. 그럴 생각인데, 뇌옥이라는 장소가 그리 안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외다.”

“본맹의 힘을 너무 얕보는군. 무림맹의 뇌옥은 침투가 불가능한 곳이야. 설령 성천십삼좌라도, 힘으로 밀고 들어가지 않는 한 비밀리에 침투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할 걸세.”

“다른 사람이라면 그러겠지. 하지만 세 치 혀로 조종당하는 옥졸들은 자주 드나들 수 있겠지.”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자네 말은 마치, 본맹에 묵룡부와 결탁한 사람이 있다는 걸로 들리는군.”

연호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당신도 기억할 거요. 우리가 함께 손잡고 묵룡부에 침투했던 작전을. 우리도 가능한 일인데, 묵룡부라고 못하겠소?”

“본맹과 묵룡부를 비교하지 말게. 묵룡부, 그놈들은 절대 본맹에 세작을 파견할 수 없어.”

“절대라…… 당신답지 않은 단정적인 표현이외다. 그리 자신하는 이유가 있소?”

“이유? 있지.”

모용군의 눈이 불을 뿜었다.

“무림맹은 천하제일맹일세. 심지어 지금 이 순간에도 맹회 소속의 전력이 증강되고 있으며, 경비도 철통처럼 조여지고 있어.”

“세상에 완벽이란 건 없는 법이오.”

“또한, 무림맹은 열두 봉공의 연합과 무수히 많은 군소 문파의 연합이야. 자네야 묵룡부주 하나를 속여서 쉽사리 침투했지만, 무림맹에는 그따위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네.”

“그 방법만 고수할 필요는 없지. 작정하고 세작을 파견할 생각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접근할 수 있을 것이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때였다.

연호정의 손이 허리춤을 스쳤다.

콰직!

모용군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어느새 수부(手斧)를 꺼내 탁자를 찍어 버린 연호정이 살벌한 음성으로 말했다.

“질문 하나 하리다. 성심성의껏 대답해 줬으면 좋겠소.”

명백한 위협이었다.

원체 사이가 나쁘긴 했지만, 지금 연호정의 행동은 분명 선을 넘었다.

모용군의 목소리도 무섭도록 차가워졌다.

“……그 질문, 분명 중요하고 타당한 질문이어야 할 것일세. 자네가 감당키 힘든 의혹을 제기한다면, 감히 무림맹 봉공 앞에서 도끼를 꺼내 든 죄를 물어야 할 것이야.”

제아무리 적이라도 맹 내 모용군의 위치는 연호정보다 훨씬 높다. 그 앞에서 도끼를 꺼내 찍어 위협했으니, 이는 생각보다 큰 죄로 다뤄질 수 있다.

연호정은 모용군의 협박 아닌 협박에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

“당신, 묵룡부주와 거래했소?”

모용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로군.”

“다시 묻겠소. 거래했소이까?”

이런 식으로 물어보는 것은 상대방 역시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만일 연호정에게 자신과 묵룡부주 간의 사이를 입증할 만한 증거가 있었다면, 오히려 조용히 있다가 역공을 날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용군은, 거기까지 추측한 연호정의 두뇌에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아니, 감탄을 넘어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대체 이놈은 어떻게……?!’

모용군이 담담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해 두겠네. 묵룡부주와의 거래 따위는 없었네.”

“…….”

“제대로 확인되지도 않은 사항을 들고 와서 맹의 봉공을 죄인으로 모는 것도 모자라 도끼로 겁박을 해? 게다가 흑도 출신의 검사를 맹에 들이다니? 자네,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군.”

모용군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맙네. 역시 수세를 펼친 보람이 있군. 자네가 이리 격하게 나와 뇌옥에 처넣을 구실을 손수 마련해 주었으니, 눈엣가시를 처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꽤 다급하긴 했던 모양이오. 그따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건 또 어인 헛소리신가?”

“당신을 겁박했다는 것, 증명할 사람이 없잖소?”

“…….”

“설령 그걸 증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천하의 모용가주가 일개 유군 부대 대장에게 겁박을 당했다……. 맹주 선거가 코앞인데, 대중에게 그런 무능력한 인상을 심어 줘도 되겠소?”

모용군이 인상을 찌푸렸다.

“내, 분명히 말하지. 지금 당장 뇌옥으로 자진 출두하게.”

“감당할 자신 있소?”

“감당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지. 자네가 지은 죄에 날 끌어들여 봤자 탁상공론에 불과할 뿐이야.”

“탁상공론이라?”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자에 박힌 도끼를 뽑아 허리춤에 건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뇌옥으로 가리다. 그리고 내가 잡은 정보원을 공공대사님께 보내겠소.”

“……!”

“지금까지 벌어졌던 일련의 사태에 관한 얘기는 물론, 내가 왜 당신이 묵룡부주와 거래했을 거라 의심하는지, 당신이 지금까지 무슨 짓을 벌였는지 몽땅 고발하겠소이다.”

“네놈…….”

“설령 내 말이 진실이 아니더라도 당신은 절대 맹주가 될 수 없을 거요. 그 진실을 제대로 파헤치기도 전에 맹주 선거가 끝날 테니까.”

“…….”

“여론의 무서움을 그리 잘 알고 계시는 분이니, 이런 식으로 날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는 것도 잘 알 텐데. 눈치는 그대로인데 머리가 그 눈치를 따라가지 못하는군.”

모용군의 눈에 살기가 일었다.

“굳이 그렇게 진흙탕 싸움을 벌여야만 하겠는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말로 판을 깨려 들지 말고, 제대로 대화하자는 거요. 당신이나 나나, 누구 하나가 뇌옥으로 들어가는 순간 똑같이 상대를 파멸시킬 수 있잖소?”

“…….”

“승패는 가를지언정, 우리 사이에 동귀어진이라는 선택지는 뺍시다. 나도 당신 하나 때문에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고 싶지는 않거든.”

가만히 연호정을 노려보던 모용군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묵룡부주와 거래 따위 한 적 없다. 할 수가 없지. 내, 제아무리 권좌를 탐할지언정 천한 흑도의 무뢰배 따위와 손을 잡는 악수는 두지 않아.”

대화의 재개다.

연호정은 여전히 선 채로 팔짱을 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소. 사실이오?”

“날 취조라도 하는 것인가? 대화를 원한다면 대화를 하게.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 역시 수세를 풀고 다시 공세로 접어들 수밖에 없어.”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하면 다른 걸 묻겠소.”

“일방적인 대화로군. 내 기분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건가?”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역으로 짚어 보면, 당신도 그간 몰랐던 나에 대한 정보를 유추할 수 있잖소?”

“웃기는 소리. 내게 뭔가를 물어보고 싶거든, 자네 역시 모두에게 부끄러움이 없어야 할 것일세.”

모용군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공공대사에게 보내든 어쩌든, 묵룡부의 정보원을 잡았다고 상부에 보고토록 하게. 그것이 순리(順理)야.”

“순리라…….”

“자꾸 이런 식으로 월권을 저지르면, 내 진정 자네를 가만두지 않을 걸세. 이것은 정쟁(政爭) 이전에 무림맹을 위한 일이야. 적어도 그 선만큼은 넘어선 안 되지.”

옳은 말이었다.

옳은 말이되, 모용군의 비밀을 아는 연호정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이기도 했다.

“좋소. 상부에 보고 후 뇌옥으로 보내리다.”

“잘 생각했네. 그리고 하나 더. 흑도 출신 검사를 맹으로 들인 것, 그 역시 보고하게. 친분이 있어 들였다고 하기에는 시국이 좋지 않아. 그간 숨겼던 책임도 져야 할 것일세.”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

“차, 잘 마셨소.”

“……뭐?”

연호정이 몸을 돌렸다.

“더 할 말이 없소이다. 알아볼 건 다 알아봤소.”

“……?!”

“오늘도 많은 정보를 건네줘서 고마웠소.”

연호정은 막을 새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멍하니 문을 보던 모용군의 얼굴이 순간 팍 일그러졌다.

콰앙!

묵직한 주먹에 맞은 탁자가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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