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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08화 (308/963)

308화. 반전 (2)

“폭풍전야가 따로 없군.”

술잔을 기울이던 당관이 느닷없이 그리 말했다.

연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오?”

“그냥, 맹의 분위기 말이오.”

당관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겨울의 마지막 한파인지, 살벌한 바람을 따라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전에 묵룡부의 정보원이 죽은 이후로, 무림맹의 분위기가 제법 살벌해진 것 같소. 겉으로는 별일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구려.”

“아 참.”

당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며칠 전에 말한 것, 사실이외까?”

“음?”

“가주 아들내미가 친 사고 말이오.”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소.”

잠영일호를 묵룡부의 정보원으로 둔갑시켜 죽인 일.

연호정은 그 일을 가득상에게만 고백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연위와 제갈문호에게도 그 사실을 알렸다.

제갈문호는 무척 놀랐지만, 생각보다 담담한 기색이었다. 물론 연호정이 선을 넘었음을 알았으나, 선거가 코앞이기도 했고 그 정도는 군사의 재량으로 어떻게든 무마시키겠다며 그냥 넘어갔다.

아마 연호정이 아니라 누구의 짓이라도 일단은 잠재우려 했을 것이다. 제갈문호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지금은 원리 원칙대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맹의 안정화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위는 아니었다.

“크게 혼을 냈소.”

연위는 아주 오랜만에 연호정을 꾸짖었다.

다만 연호정 역시 자신이 선을 넘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달리 변명을 하거나 제 주장을 강하게 내비치진 않았다.

연위도 내심 아들을 이해했다. 아들이 잘못을 저지른 것을 떠나서, 모용군을 견제하려는 아들의 마음 자체를 이해했다. 이유인즉, 묵비와 함께 아들의 과거사를 알고 있는 유이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었다.

흑암제라 불리며 흑도를 평정했다 하더라도, 백도에는 백도의 방식이 있는 법이었다. 나아가 연위는, 연호정이 다시 흑도의 흉악한 술수에 물들지 않기를 원했다.

그래서 크게 혼을 냈고, 연호정 역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겠다고 하였다.

“해서, 아들의 이번 일을 봉공회의에 알릴 생각이었소.”

당관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봉공회의에?”

“그렇소.”

“미쳤소? 그리하면 모용군만 좋은 일을 시키는 셈이외다.”

“모용군에게 기회를 줄지언정 잘못은 잘못이오. 잘못을 저질렀으면 마땅히 그에 따른 벌을 받고 책임을 져야 하오.”

“꽉 막혔군. 당신 아들내미가 제법 살벌한 짓을 한 건 분명하지만, 그렇게까지 막 나갈 짓은 아니었소이다.”

“막 나가는 게 아니오. 내게는 그것이 정도(正道)요.”

애초에 이런 부분에서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당관은 괜한 말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데 왜 알리지 않았소?”

“군사께서 막았소이다.”

당관이 피식 웃었다.

“모용군 말이 맞았군.”

“무슨 말이오?”

“모용군이 말하기를, 제갈가주는 대의 이전에 오직 무림맹을 위해 일할 것이라 하더이다. 누가 무림맹주가 되든, 맹주가 천하를 도탄에 빠트릴 만한 작자만 아니면 어떻게든 그를 도와 무림맹을 바로 세우려 할 인물이라고.”

“…….”

“하지만 이번 일은 나 역시 제갈가주에게 동의하오. 가주야 그놈의 아비이니 실망할 수 있겠지만, 지금을 전시(戰時)로 가정하면 꽤 대담한 한 수라고 호평을 받아도 무방하지.”

연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담한 한 수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요.”

“말이 되는 소리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시오. 우리는 칼과 방패 하나씩만 들고 싸우자고 나섰는데, 상대는 화포를 끌고 와서 쏴 대고 있는 꼴이잖소?”

꽤 흥미로운 비유였다.

그리고 맞는 말이기도 했다. 모용군은 공작에 능하며, 작정하고 움직이면 백도인으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흉계로 원하는 것을 손에 넣는 사람이니까.

“그 상황에서, 당신 아들내미는 우리 몰래 적측에 침투하여 화약을 적셔 놓았소이다. 당분간 화포에 불붙을 일이 없어졌는데, 칭찬은 못 해 줄망정 오히려 혼을 내다니.”

“…….”

“그쪽 부자지간 일에 관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돌아가면 어깨나 토닥거려 주시오. 솔직히 말하자면, 난 이번 일로 속이 다 시원하더이다.”

참으로 당관다운 말이었다.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소. 물론 그대의 말에도 일리는 있소만, 나는 썩 동의하고 싶지 않구려.”

“그거야 받아들이는 사람 마음이니, 나 역시 신경 쓰고 싶지 않소.”

술 한 잔으로 목을 축인 당관이 재차 물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되고 있소?”

“무엇이 말이오?”

“내 후원자가 되지 않았소? 선거까지는 시간이 제법 남았지만, 중원은 넓소이다. 슬슬 부채질 좀 하셔야 할 터인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더이다.”

당관이 혀를 찼다.

“하긴, 가주가 그쪽 방면으로는 영 신통치 않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

그 말에 연위는 저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이런 사람인 줄 아셨음에도 어찌 후원자로 꼽으셨소?”

“그러게나 말이외다. 슬슬 후회하고 있소.”

“허허허!”

“뭔가 일을 시작하려거든, 돌아가서 당신 아들내미와 상의해 보도록 하시오. 이번 일도 그렇고, 그놈 머리 굴리는 거 하나는 예술이더이다.”

“알겠소. 곧 시작해 보리다.”

“좋소.”

덜컹!

그때, 몰아치는 바람에 창가가 거세게 흔들렸다.

당관이 미소를 지었다.

“이번 한 해는 꽤 살벌한 한 해가 되겠구만.”

“허허.”

“갑자기 왜 웃소?”

“그 말, 내 아들놈이 예전에 했던 말이오.”

“한데 그게 왜?”

“그냥 생각나서 말이오.”

“싱겁긴.”

“술 더 드리리까?”

“아직 간에 기별도 안 갔는데 이것만 마시고 끝낼 생각이었소? 더 주시오.”

“잊으신 것 같은데, 여기는 그대 거처요.”

“알았으니까 잔이나 채워 주시오.”

“허허허.”

* * *

휘이이이이잉!

거센 눈보라와 함께 몰아치는 바람이 대기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화르르르륵.

폭설이 내리는 저녁.

연호정은 파군각 마당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치이이이익!

굵은 눈송이가 펑펑 쏟아지니 금세 눈으로 덮일 것 같은데, 놀랍게도 거센 눈발은 연호정의 근처에 오기도 전에 녹아서 흩어져 버렸다.

그것은 연호정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기(火氣) 때문이었다. 주작기가 거세게 타오르며, 눈발이 몸에 닿기도 전에 녹인 후 증발시켜 버리고 있는 것이다.

실로 무서운 화력이었다.

이 층 창가에서 연호정을 내려다보던 묵비가 혀를 내둘렀다.

“엄청나네. 열기가 여기까지 전해져.”

연지평이 침을 삼켰다.

“저것이 사신무로군요. 누님 말마따나 엄청난 위력입니다.”

“내 기억에 저 정도는 아니었어. 다른 진기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주작기의 화력이 예전보다 두 배는 더 강해진 것 같아.”

“두, 두 배나요?”

“아마도.”

묵비의 눈이 반짝거렸다.

“연가신단을 연성한 이후, 무공이 또 한 차례 도약의 전기를 맞이하고 있는 거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연호정이 굳이 야외로 나와 연공에 들어간 것은, 연가신단으로 갑작스레 증폭된 사신기를 재차 안정시키기 위함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주작기와 백호기가 기승을 부렸다. 용포신공의 기운이 워낙 사납고 거칠어서, 그와 비슷한 성질을 지닌 두 개의 기운이 청룡기와 현무기보다 유독 흉흉하게 날뛰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살벌한 눈보라는 두 신기(神氣)를 제어하기에 제격인 환경이었다. 습도를 머금은 음기와 한기로 가득한 이 날씨의 힘을 빌려, 증폭된 주작기를 안정적으로 심장에 장착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연호정의 운공은 자정이 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마치 망부석이라도 된 양, 그는 그 자리에 앉아서 운기하고 또 운기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거짓말처럼 눈보라가 그쳤다. 저 멀리 동녘 하늘에서 떠오르는 햇살이 무림맹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후우.”

연호정이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됐다.’

주작기와 백호기를 청룡기와 현무기에 어울리게 맞추었다.

‘짧은 새에 엄청나게 거세어졌군. 자칫 잘못했다간 그간 맞춰 놓은 균형이 삽시간에 깨져 버릴 뻔했어.’

이것이 바로 연가신단의 힘이었다.

연가신단은 곧 내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내단을 품었다는 것은 곧, 지치지 않는 진기의 발원지를 가졌다는 뜻이었다.

지치지 않는 진기의 발원지. 거기에 용포신공을 수련하면서 신단의 기가 무척이나 거칠고 흉흉해졌다.

말하자면 마르지 않은 땔감이 끊임없이 오장육부로 스며들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자연 주작기와 백호기가 거칠게 날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어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걸리는군. 정말이지 보통 힘이 아니야.’

연호정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벽라진결을 익혔을 때는 오히려 사신기의 힘이 벽라진결을 압도했으면 압도했지, 결코 밀린 적은 없었다.

한데 연가신단을 만드니, 그 탄력을 받은 용포신공이 사신기를 제멋대로 휘둘러 버렸다.

‘과연 본가 최대의 비기라고 할 만해. 연가신단과 잘 어우러지도록 사신기를 가꾸려면, 제법 고생 좀 하겠어.’

고생이야 하겠지만, 동시에 바라 마지않던 일이었다. 두 힘이 충돌하지 않도록 진기를 발전시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내공 출력이 올라간다는 뜻이니까.

‘좋아.’

연호정이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앞에는, 동쪽에서 비치는 햇살을 받고 선 아버지가 계셨다.

“끝났느냐?”

“예, 끝났습니다.”

아버지의 기척은 진즉에 느끼고 있었다.

연위가 담담하게 물었다.

“신단의 기가 워낙 거세니, 그것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용포 때문인가.’

그는 며칠 전 연호정의 과격한 수법에, 용포기가 어느 정도 개입했다고 생각했다.

용포신공은 오대신공 중 가장 거친 힘이었다. 제아무리 정공이라도, 그런 진기를 품으면 자연 성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으리라.

다만 아들의 경지가 종사급에 이르렀으니, 그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을 것이다.

“용포신공은 잘 제어가 되더냐?”

“지금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제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잘했다.”

연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네 녀석의 그 주작기 덕분에 따로 청소를 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구나.”

쏟아지는 눈을 녹이고 또 녹여 댔으니, 당연히 쌓일 리가 없었다.

“식사는 아직이냐?”

“예.”

“허기는 지느냐?”

“아닙니다.”

“그래, 그리 말할 줄 알았다.”

연위가 파군각의 창가 한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방이었다.

후우웅. 탁!

창가를 통해 날아온 장검이 연위의 손에 잡혔다.

“며칠 전, 네 동생의 무공을 봐주었다. 네 무공도 봐주어야 하는데, 당분간 바쁠 듯하여 따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구나.”

“아, 예.”

“아직 배가 고프지 않다면, 지금 한번 봤으면 좋겠다. 그간 네가 무엇을 얻었는지, 앞으로 어찌 나아가고자 하는지를 알고 싶구나.”

그것은 비단 무공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마치 저 당관이 말했던 것처럼, 연위 역시 연호정의 무공을 통해 보고 싶은 것이다. 아들의 무공은 물론, 아들이 앞으로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인지를.

모용군? 정쟁? 무림맹주?

분명 중요한 문제지만, 적어도 연위에게 있어서 아들의 앞날보다 중요하지는 않았다.

결국 아들부터 건사하고 대의를 좇겠다는 것.

당관이 당관다운 선택을 내렸다면, 연위 역시 연위다운 선택을 내린 것이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武)를 통해 그릇을 입증하는 자리. 당관과의 자리보다 만 배는 더 부담스러웠다.

“준비되었느냐?”

“물론입니다.”

“먼저 들어오거라.”

파아악!

연호정이 허리춤에서 손도끼를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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