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10화 (310/963)

310화. 반전 (4)

연지평은 저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나섰다가 묵비에게 제지를 당했다.

“누, 누님?”

묵비가 고개를 저었다.

“끼어들지 마. 너나 내가 끼어들 수 있는 판이 아니야.”

“하, 하지만!”

“결과를 내도 아버님과 연 공자가 낼 거야. 게다가, 저 두 사람이 마땅한 이유도 없이 저런 공방을 벌일 리가 없어.”

“……!”

“가만히 있어. 지금은 그게 옳아.”

연지평이 입술을 깨물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묵비 역시 심란하기로는 연지평 못지않았다.

‘대체 왜?’

연위와 연호정의 비무에서는 어떠한 의도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하나의 의도는 확실히 보였다. 하지만 묵비는 그 의도를 자신이 잘못 읽은 것이라 믿고 싶었다.

‘진짜인가.’

묵비의 눈이 깊어졌다.

‘정말 서로를 죽일 기세인데.’

연호정과 함께 무수히 많은 실전을 거듭한 지금의 묵비는, 이제 기세의 허(虛)와 실(實)을 감각적으로 파악해 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그 감각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저건 진짜라고, 누구 하나가 죽을 때까지 이어지는 생사결이라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연지평과 대화할 때도 느꼈지만, 그녀는 연씨 집안의 결속과 애정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연위는 연호정의 과거를 알게 되었다. 연호정도 연호정이지만, 연위는 연호정에게 큰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만에 하나라도 사달이 날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보는 이들로선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말 위험한 순간이 온다면.’

궁사(弓師)의 동체 시력은 일반 무인보다 배 이상 뛰어나다.

맞상대라면 모를까, 관전 중이라면 얼마든지 끼어들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내가…….’

순간 연호정의 기도가 돌변했다.

화르르르륵!

마치 파군각 전체를 불살라 버릴 듯 압도적인 화기(火氣)를 뿜어내는 그였다.

연가신단으로 제어한 주작기였다. 완벽하게 제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질이 예전보다 두 배는 더 강하고 거칠어진 듯했다.

묵비의 눈이 커졌다.

‘주작공?!’

주작의 기예(技藝)는 절대적인 살초다.

연호정의 무공 제어는 그 누구보다 탁월한지라 극한의 살초인 주작공으로도 사람을 보호하고, 절대방어의 기예인 현무공으로도 무시무시한 살법을 구사한다.

하지만 지금의 주작공은 그 의도가 너무나도 명백했다.

‘살기!’

화아아아악!

해일처럼 몰아치는 살기는 진짜였다. 자신의 아버지를, 연가의 가주를 정말로 죽일 기세였다.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연위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바바바바박!

연위가 선 땅 일대에 수십 개의 검상이 새겨졌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마치 수백, 수천 개로 조각난 무형의 칼날이 연위의 몸 주변을 유영하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살기의 칼날, 진심으로 상대를 베겠다고 다짐한 연위의 진짜 기도였다.

부자지간이지만 두 사람의 기질은 너무나도 달랐다.

연호정의 살기가 끓어오르는 용암과 같다면, 연위의 살기는 냉혹함 그 자체였다. 연호정의 기파가 몰아치는 파도처럼 거세다면, 연위의 기파는 폭풍전야의 밤하늘처럼 서늘하고 불길했다.

그렇게나 다른 기질이지만, 유사한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파괴력.

두 초고수가 내뿜는 기파가 목적을 갖고 사람에게 향했을 때, 손도 대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만큼 막강한 파괴력을 지녔다는 것만큼은 비슷했다.

그런 두 사람의 기파가, 살기가, 의지가 정면으로 부딪쳤다.

콰지지직! 콰드드드득!

뿜어져 나오는 외기의 힘이 너무 강했다. 삼 장 거리를 벌리고 섰음에도 두 사람 사이의 땅이 쩍쩍 갈라졌다.

무시무시한 기파의 충돌이었다. 그 충돌이 어찌나 살벌한지, 파군각의 건물과 담벼락을 몽땅 날려 버릴 것 같았다.

치이이이이익!

성질이 다른 두 살기가 부딪치며 희뿌연 연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잠시 후.

훅!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흉악한 기파가 동시에 사라졌다.

“…….”

서로를 직시하는 두 사람.

파아아아악!

먼저 움직인 것은 놀랍게도 연위였다.

강궁의 화살처럼 쏘아진 연위의 움직임은 그 속도가 조금 전과 차원을 달리했다.

단숨에 거리를 좁혀 검을 내치니, 섬전과도 같은 검격이 연호정의 목젖을 노렸다. 일검에 죽일 기세였다.

그때, 연호정의 양손이 느릿하게 올라왔다.

느릿하게 움직였는데도 연위의 검격이 닿기 전에 전방을 틀어막는다. 신묘한 술수였다.

투우우우웅!

연위의 검기가 연호정의 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놀라운 반탄력이었다. 보이지 않는 강철의 벽이 연위의 검기를 튕겨 내 버린 것이다.

후우욱!

연호정이 연위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연위의 눈이 빛났다.

권각을 지르는가 싶었더니, 몸을 둥글게 말아 상반신 전체로 공격해 온다. 중원의 무공에서 쉬이 찾아보기 힘든 기예, 몸통 박치기였다.

쾅!

폭음과 함께 연위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힘에서 밀린 게 아니었다. 물론 연호정의 돌진력은 대단했지만, 힘 대 힘으로 맞붙었다면 밀릴 리가 없는 그였다.

다만 그가 물러난 것은 충격을 해소함과 동시에 후속 공격을 감행하기 위함이었다.

번쩍!

연위의 검이 벼락처럼 휘둘러졌다.

실제 벼락이라도 된 양 갈지(之) 자를 그리며 베어 오는 검기가 일품이었다.

투웅! 피슉!

검배를 쳐서 참격을 튕겨 냈다고 생각했지만 오산이었다. 휘어져 내려온 검기가 그대로 연호정의 허벅지를 베었다.

‘위험.’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갔으면 대퇴근 절반이 베여 날아갔을 것이다.

현무기의 반탄력 덕분에 살았다. 주작기를 운용하고 있었다면 다리가 잘려 나감과 동시에 아버지의 손도 재기 불능으로 망가졌을 것이다.

연호정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늘 싸움은 그런 싸움이었다. 그 어떤 난적과의 싸움보다도 살벌하고 즐거운, 그러면서도 나 자신의 미래를 증명하는 일전이었다.

그 믿음 가득한 미래를 증명할 수 있다면 팔다리가 떨어진들 대수랴.

‘다만, 아직 보여 드릴 게 많습니다.’

꾸우우우웅!

허공 어디선가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괴생물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후속 공격을 감행하려던 연위는 순간 몸이 덜컥 멎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상대의 막강한 기도에 짓눌려 신체의 움직임을 통제당한다는 건, 지금 연위의 경지를 생각하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는군.’

동시에, 연위는 알 수 있었다.

연호정이 지금껏 자신에게 보여 주지 않았던 막강한 무공을 구현하고 있다는 것을. 이번 일격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건네려 한다는 것을.

그의 직감은 정확했다.

철썩! 촤아아아악!

몰아치는 파도 소리가 매서운 압박감을 전해 주었다.

순간 연위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심상치 않은 뭔가가 올 거라는 건 직감했지만, 그 힘이 자신의 예상 이상이라는 건 지금에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후우우우우웅!

세상이 어두워졌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심해에 빠진 것만 같았다. 연가신단의 힘으로 발산되는 현무기(玄武氣)의 힘은 천하의 연위조차 긴장케 할 만큼 엄청난 농도를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

각기 상단과 하단으로 향했던 연호정의 좌수와 우수가 중단에서 만났다.

짜악!

손바닥이 마주치는 소리는 경쾌했다.

그리고 그 경쾌한 소리는 뒤이어 터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폭음에 곧바로 묻혀 버렸다.

콰아앙!

이번만큼은 연위조차 힘으로 밀렸다.

‘충격파?!’

양손을 부딪쳐 토해 내는 막강한 충격파였다. 흡사 해일과도 같은 공격력, 심해(深海)의 육중한 압력이 진기의 폭발을 일으켜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는 듯했다.

타다다다닥!

십여 걸음이나 뒤로 물러났는데도 상체 중심이 계속 뒤로 밀려나 있다. 해일 같은 힘으로 밀어 내는 기공력이었다.

연위가 땅에 검을 박아 넣었다.

카가가가가각!

검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검극사기를 쏟아부었는데도 검이 휠 정도의 압력이었다. 눈앞에서 화약 없는 화탄이 터진 것만 같았다.

치이이이이익!

연위의 몸에서 희뿌연 김이 피어올랐다.

전신에 검극사기를 두르지 않았다면 정말 낭패를 당할 뻔했다. 맞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방어 태세로 돌입한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후욱. 후욱.”

연호정의 호흡이 더더욱 거칠어졌다.

혼신의 힘을 다한 일격임이 확실했다. 다만, 그럼에도 연호정의 체력을 생각하면 너무 빨리 지친 감이 있었다.

용포신공 때문이었다.

용포로 인한 사신기를 완벽하게 제어하고 있지만, 신공 자체의 폭발력은 몸이 아직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시전자의 체력과 근력을 한계까지 쥐어짜는 용포신공의 특성을, 연호정조차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칭!

땅에 박힌 검을 뽑아 든 연위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연호정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우우우우웅!

그 한 번의 호흡으로 어느새 진기가 안정적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호흡의 안정화, 진기의 회복력이 실로 놀라웠다.

연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더 할 수 있겠느냐?”

훅!

어느새 연호정의 몸이 연위의 후방 좌측에서 나타났다.

주작기가 아님에도 빠르다. 이번에는 현무가 아니라 청룡이었다. 유연하고도 빠른 신법을 이용해 생각지도 못했던 사각으로 접근한 것이다.

연위의 검이 재차 움직였다.

쩌저저정! 쾅!

두 사람의 검권이 부딪치며 또다시 막강한 충격파를 일으켰다.

촤아악!

연호정의 가슴에 사선의 검상이 생겨났다.

퍼어엉!

연위의 좌측 소맷자락이 폭발하듯 터져 나갔다. 드러난 팔뚝이 새빨갛게 부어 있었다.

쾅! 쿠우웅! 퍼어어엉!

신들린 듯 부딪치는 두 사람의 무공은 그 자체로 예술이라 할 만했다.

흉흉하고 위압감 넘치는 승부지만, 그 안에는 무인으로서 보여 줄 수 있는 모든 무공이 녹아 있었다. 공격, 방어, 회피, 반격은 물론 살법과 활법까지, 천하 만무(萬武)의 총화가 여기에 있었다.

그리고, 묵비는 그제야 볼 수 있었다.

‘달라진다.’

연호정의 무공이 달라지면, 연위의 무공도 달라진다.

연호정은 굳이 사신무를 쓰지 않아도 무공 자체가 흉악한 일격필살이었다. 연위는 그런 연호정의 무공 기질을 본떠서 아들과 맞붙은 것이다.

아들이 주작기로 살기를 일으키면, 아버지 역시 칼날과도 같은 살기로 대응한다.

아들이 현무기로 묵직한 방어와 충격파를 보여 주면, 아버지 역시 완전한 방어검과 여유를 보여 준다.

아들이 백호기로 후퇴 없는 전진형 공격을 구사하면, 아버지 역시 대쪽 같은 군자의 검을 휘두르며 물러서지 않는다.

아들이 청룡기로 빠르고 부드러운 손속을 풀어 놓으면, 아버지 역시 지극히 여유롭고 경쾌한 검력을 구사한다.

연위는 말 그대로 연호정의 모든 무공을 똑같이 받아 내고 있었다. 마치 너 자신을 보라는 것처럼.

아주 똑같지는 않아도, 이것이 바로 너의 무공이 아니냐며 넌지시 가르쳐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러한 승부를 통해서 연위 역시 아들의 무공을 분석해 아들의 현재와 미래를 직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퍼어엉!

묵직함보다는 상쾌함이 느껴지는 폭음이었다.

그 일격을 끝으로 멀찍이 물러난 두 사람의 모습은 무척이나 험했다.

연호정의 몸은 여기저기 베여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연위 역시 연호정의 거센 무공에 의복과 머리카락이 한껏 흐트러져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한참 동안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연위였다.

“당가주가 말하더구나. 후원자로서 슬슬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니냐고.”

살벌한 격전을 끝내고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뜬금없었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머리를 굴려야겠지요.”

“이 애비가 어떻게 움직였으면 하느냐?”

“아버지께서는 아버지 나름대로 움직이고 계십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 혼자 음지(陰地)에서 싸울 작정이냐?”

“안타깝게도 그런 술수에 능해서 말입니다.”

이번 비무가 왜 벌어졌는지를 생각하면 상당히 도발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연위는 그저 웃었다.

“칼은 칼집 안에 있을 때 비로소 무서운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뽑아야 할 때를 알고 있으리라 믿겠다.”

“앞으로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마.”

“아버지.”

“음?”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연위가 몸을 돌렸다.

“이미 반성하였는데 용서를 하고 말고가 있겠느냐. 네가 무고한 사람을 해하여 만인이 널 손가락질할지언정, 이 애비만큼은 널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그래도 선은 넘지 마라.”

“예.”

“가마. 푹 쉬거라.”

그렇게 연위가 파군각을 나섰다.

한참 동안 대문을 바라보던 연호정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가 고소를 지었다.

“차라리 욕을 하고 뺨을 때리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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