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6화. 수레바퀴가 굴러가다 (4)
공공대사는 물론 당관, 범오 모두가 깜짝 놀랐다.
“부맹주라니?”
연호정이 깊은 눈으로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가주님도 알고는 계십니다. 우리 측에서 아무리 난리를 쳐도, 이번 선거에서 승리를 거머쥐기란 힘들 것임을.”
당관이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는 사실을 깨닫곤 표정을 구겼다.
공공대사가 헛기침을 했다.
“그거야 모를 일일세.”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어느 정도 유추되는 것이 있잖습니까? 대사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세인들이 인식하는 사천당가는 공포 그 자체입니다.”
피와 공포는 대체하기 힘든 힘이다.
하지만 백도 무림은 피와 공포보다는 명성과 협의를 우선시한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렇다.
그런 백도 최고의 연합 세력인 무림맹의 맹주를 당가의 수장에게 맡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다.
“설령 십이 봉공 전체가 당가주님을 밀어준다고 해도, 여론의 벽에 부딪힐 것입니다.”
“으음.”
공공대사의 눈이 깊어졌다.
“대충 예상은 했네만, 역시 당가주께서 맹주 후보로 나선 것은 ‘누군가’의 대항마로 나서기 위함이었던가?”
연호정의 얼굴에 감탄이 묻어 나왔다.
“대단하십니다. 솔직히, 거기까지 보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공공대사가 한숨을 쉬었다.
“속세의 다툼은 이권을 얻기 위한 욕망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다만, 백도 무림의 최고 연합 세력인 무림맹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 답답할 뿐일세.”
“무림 최고 연합 세력이기에 더더욱 이런 일이 터질 수밖에 없지요. 최고가 되면 그만한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요.”
공공대사의 혜안에 힘이 들어갔다.
“자네가 바라는 것은 권력인가?”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권력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르는 법. 저는 제 사람들 챙기기도 바쁜 사람입니다. 당장 멸사군장이라는 직책만으로도 버거울 지경이지요.”
“그래, 자네는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 아닐세. 자네의 진심을 떠나, 나는 그렇게 보고 있고 또한 믿고 있네.”
“잘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도 자네가 이 치열한 정치판에 끼어들어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은 어인 이유인가?”
공공대사는 피라고 하였다.
실제로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 아니었다. 공공대사가 보기에 욕망과 분노, 다툼과 상처는 곧 피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금, 무림맹 내 정쟁에서 가장 피를 많이 묻히고 있는 사람은 둘.
바로 연호정과 모용군이었다.
“싸워야 할 사람들이 쉬쉬하고 있으니까요.”
“……?!”
“불도를 닦는 대사님께서 보시기엔 정쟁(政爭)이라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 또한 다툼이니까요. 그러나 싸움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더 나은 길을 찾기 위한 선의의 싸움이라면 나 또한 환영일세.”
“싸움에 선의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세운 정의가 반드시 옳다고 생각지도 않지요. 그러나 적어도 더 나은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손에 피와 오물을 묻히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합니다.”
연호정의 눈이 번쩍거렸다.
“외면하고 지켜보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힘을 가진 자가 유유자적 사는 것은, 적어도 난세에선 죄악입니다.”
“죄악이라?”
“죄악이지요. 힘을 가졌다면, 그 힘을 올바르게 써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로 인해 피를 볼지언정.”
공공대사의 눈이 깊어졌다.
“그것이 자네의 대의(大義)인가?”
“저의 대의이기 전에, 시대의 진리입니다.”
“시대의 진리라…….”
“도불(道佛)의 선사들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지요. 도고일척(道高一尺)이면 마고일장(魔高一丈)이라, 삿되고 악한 것은 언제나 선함을 앞섭니다.”
“…….”
“힘이 있는 자라면, 끊임없는 자기 수양을 전제로 도고삼척, 도고칠척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요.”
가만히 연호정을 바라보던 공공대사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드리워졌다.
“쓰디쓴 가르침이었다네.”
“가르침이라니요? 감당키 힘든 말씀입니다.”
“허허,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 하였네. 지자(知者)도 우자(愚者)가 되지 않기 위해선 끊임없이 스스로를 낮춰야 하는 법.”
공공대사가 반장례(半掌禮)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연 군장의 강의, 늙은 땡중에게 큰 배움이 되었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여물지 못한 젊은이의 혈기 넘치는 발언에 불과합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허허허.”
티는 내지 않았지만, 당관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놈의 혓바닥은 타고났군.’
대화의 흐름을 주도한 것도 모자라, 천하의 공공대사가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이런 일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다. 단순히 화술이 뛰어나고 아니고를 떠나, 상대의 입장과 사상을 어느 정도 꿰뚫어 보지 못하면 이런 결과를 낼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연호정은 확실히 비범한 사람이었다.
상대를 이해해야 할 때와 이해할 필요가 없을 때를 구분할 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는 것은.’
당관이 공공대사를 바라보았다.
연호정의 말은 의미하는 바가 분명했다. 힘이 있는 자가 움직이지 않으니 세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 자신이라도 나섰다는 건, 결국 당신이 지금이라도 움직여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소림이 움직인다?’
공공대사가 말을 이었다.
“자네가 보기에, 모용가주가 그리도 위험한 사람이던가?”
“그렇습니다.”
“그와 함께하는 이들도?”
“애초에 봉공분들 모두가 백도를 대표하는 문파의 수장입니다. 열두 분 모두 정쟁의 흐름을 바꿀 만한 힘이 있지요.”
“그렇구먼.”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당관을 바라보았다.
“당가주.”
“말씀하시오, 대사.”
“가주께서는 무림맹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오?”
당관이 피식 웃었다.
“미안하지만, 난 대의라는 낯간지러운 말을 싫어하오.”
“허어.”
“날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일 뿐이오.”
“다시 묻겠소. 가주께서는 권력을 원하시오?”
“권력?”
당관이 조소를 지었다.
“내 이미 사천의 제왕으로 군림하고 있거늘, 그 이상의 권력이 필요할 성싶소?”
“…….”
“나는 이 얼치기와 생각이 다르오. 권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법. 그러나 내 이미 황제가 부럽지 않은 권력을 쥐고 있거늘, 머리 아픈 맹주직 따위에 연연할 것 같소?”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실제로 사천에서 당가의 위세는 청성파와 아미파를 훌쩍 넘어선다. 청성과 아미는 산중에 있고, 당가는 속세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사천에 한해서지만 황제 못지않은 권력을 쥐고 있다는 당관의 말은 사실이었다. 평생 사천에서만 산다고 생각하면, 당관은 굳이 이런 정쟁에 발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하면 가주께서는 어찌 선거에 나서신 것이오?”
“모용군이 잘되는 꼴은 못 보겠어서 말이오.”
“정말 그것뿐이오?”
당관이 피식 웃었다.
“내가 그리 단순한 사람으로 보이시오? 당연히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하면……?”
“그 이상은 말해 주기 싫소.”
공공대사가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예전에 뵈었을 때보다 많이 부드러워지신 것 같소이다.”
당관이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마음대로 생각하시오.”
마지막으로 그가 연호정을 보았다.
“부맹주직은 말 그대로 맹주를 보조함과 동시에 봉공, 장로 사이를 조율하는 자리일세.”
“그렇습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 당가주께서 그 직책을 잘 수행하시리라 보는가?”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당가주님의 능력을 다 파악한 게 아니라서요.”
“허허, 그러면서 부맹주직을 밀어 달라 말씀하시는가.”
“누가 있어 맹주나 부맹주직을 잘 소화할 거라 예상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최대한 문제가 없는 사람이 실권을 잡게 되면, 그를 도와 백도를 평안케 하고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겠지요.”
원론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 원론적인 말이 공공대사의 결심에 불을 붙였다.
“……좋네.”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한번 생각해 봄세. 물론 진심일세.”
확답을 얻진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연호정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러지 말게. 앞서 말했지만, 이 사람 역시 생각을 해 봐야 할 문제야. 게다가 말이 좋아 대의지, 사전에 예까지 와서 뒤를 밀어 달라 말하는 것 자체가 좋아 보이는 행동은 아닐세.”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내 자네가 이유 없이 이런 일을 벌이지 않음을 알고 있네. 하여 생각해 보겠다고 하는 것이니, 지나치게 큰 기대도, 실망도 말았으면 하네.”
“이해했습니다.”
“좋네.”
공공대사가 당관에게 웃으며 말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가주께서도 든든하시겠구려. 이만한 인재가 함께해 준다니.”
당관이 코웃음을 쳤다.
“언제든 이 사람 목을 물어뜯을지도 모르는 놈이오. 등골이 서늘하외다.”
“허허, 천하의 당가주께서 그리 말씀하실 정도면, 연 군장의 능력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오.”
“선 넘으면 죽음이지. 적보다도 못한 사이라오.”
“적어도 적은 아닌 게로군.”
“당장은 그렇겠지.”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별도 없이 찾아와 심란케 해 드렸습니다. 용서해 주시길.”
“그건 괜찮…….”
그때였다.
공공대사는 문득 범오를 바라보았다.
범오의 눈은 연호정에게 꽂혀 있었다. 불타오르는 두 눈에 알 수 없는 감정이 가득하였다.
공공대사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이보게, 연 군장.”
“말씀하십시오, 대사님.”
“확실히 자네 말이 맞네. 기별도 없이 찾아온 것도 모자라 뒤에서 밀어 달라느니, 대의니 진리니 하는 것은 확실히 선을 넘었어.”
연호정이 무안하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자네의 인품과 능력을 알기에 가만히 듣고 있었네. 다만 자네가 한 행위는 분명 공작(工作)일세. 바르지 못한 일이야. 원칙적으로도, 그리고 빈승에게도.”
연호정의 얼굴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얘기가 다 끝난 상황에서 그런 말을 덧붙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혹, 제게 따로 원하는 것이 있으신지요?”
공공대사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원한다기보다는, 빈승의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겠는가? 수락한다면 오늘의 실례는 깔끔하게 잊어 줌세.”
“말씀하십시오.”
공공대사가 범오를 가리켰다.
“자네가 보기에는 어떠한가?”
연호정이 범오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치며 보이지 않는 불꽃을 튀겼다.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림의 정종 무공을 제대로 연마하신 분이로군요.”
범오로서는 기가 찰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공공대사가 크게 웃었다.
“그렇다네. 옛날부터 그 무재를 인정받은 본사의 인재 중 하나일세. 다만 나이를 먹고도 지닌바 호승심을 다스리지 못해, 나이 든 사숙의 호통이나 듣는 처지라네.”
“하하.”
“어떤가? 천하제일 후기지수라 불리는 호신쌍위의 일인, 구주명가를 물리치는 데에 큰 공을 세운 벽산의 호장께서 머리 굳은 나한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겠는고?”
당관은 속으로 혀를 찼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연호정의 손속이 당씨들만큼이나 독하다는 걸 아는 그였다. 괜히 부탁하러 왔다가 지금까지의 대화가 다 물거품이 되는 건 아닌가 싶었다.
연호정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의 무공을 견식할 기회를 주셨으니, 저라고 어찌 발을 빼겠습니까? 오히려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범오가 벌떡 일어났다.
연호정이 엄지로 방문을 가리켰다.
“가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