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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17화 (317/963)

317화. 수레바퀴가 굴러가다 (5)

공공대사의 거처 앞, 널찍한 마당에 나온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연호정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강동 벽산연가의 연호정이오.”

범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초면부터 하오체다. 외양만 봐도 나이를 알 수 있을 텐데, 꽤 오만하게 나오는 듯했다.

하지만 상대가 그리 나온다고 자신까지 껄렁거릴 수는 없는 노릇.

“소림의 범오라 하오.”

멀리서 둘을 바라보던 공공대사가 나직이 혀를 찼다.

그 옆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던 당관이 피식 웃었다.

“저 나한 덕분에 대사께서도 심심할 일은 없겠소.”

“허허, 난감할 뿐이오.”

두 사람의 대화는 거리가 제법 떨어진 범오의 귀에도 생생히 들렸다.

범오의 눈이 깊어졌다. 왠지 자신을 경험도 없는 어린애 취급하는 것처럼 들려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무념(無念). 마음을 비우자.’

작게 심호흡을 한 범오는 문득 연호정의 허리춤에 걸린 손도끼를 보았다.

날도 제대로 세우지 않은 도끼였다. 그 크기가 성인 남성 팔뚝 길이보다 조금 긴 정도일까.

범오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도끼를 쓰시오?”

“아, 이거 말이오?”

연호정이 쓴웃음을 지었다.

“도끼가 주 병기이긴 하오만, 근래엔 손을 놓고 있소. 물론 필요한 순간이 오면 쓰겠지만 말이오.”

“음.”

범오는 은근히 상대를 경시했다.

‘도끼라니.’

본디 도끼는 정통 무림인들이 쓸 만한 병기가 아니었다. 저 흑도의 무뢰배들이나, 무게로 밀어붙이는 삼류 산적들이나 쓸 법한 병기란 말이다.

한데 천하제일 후기지수란 자가 도끼를 쓰다니? 하물며 검법으로 명성을 날렸던 연가의 자제가?

‘참으로 독특한 자로군.’

웃으며 연호정을 보던 범오가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어떤 병기를 쓰든, 자신의 기를 갈무리한 그 실력만큼은 진짜다. 방심해선 안 될 일이지.’

기척을 읽지 못한 것만으로도 상대의 실력은 인정받아 마땅했다.

다만, 무림의 무공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그중에는 진기를 갈무리하는 데에 유독 특화된 신공절학도 많았다.

범오는 상대의 무공 역시 그런 종류와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면, 슬슬 시작할까 싶소.”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시작한 것 아니었소? 기다리고 있었는데.”

범오의 얼굴에 의아함이 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먼저 손을 쓰겠다 말한 적도 없소만?”

“……음, 그쪽이시구만?”

연호정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시작합시다.”

범오는 괜스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연호정의 그 눈빛과 언행이, 방장 사숙이나 당가주와 비슷했던 것이다.

‘오만하군.’

스르륵.

범오가 자세를 낮추었다.

부드럽게 잡은 자세는 마치 단단한 바위를 연상케 했다. 빈틈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범오의 몸에서 은은한 황금빛 진기가 새어 나왔다.

우우우웅!

마치 범종(梵鐘)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퍼져 나갔다.

공공대사가 무릎을 쳤다.

“대승범천이로구나!”

소림의 무상신공 중 하나, 대승범천신공(大乘梵天神功)의 개방이었다.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기파가 놀랍도록 강인했다. 화려하다거나 특별하다는 느낌보다는, 고요하게 존재감을 퍼트리는 멋진 기공술이었다.

범오가 말했다.

“먼저 들어오시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사박사박.

범오가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것인가?’

들어오라 했더니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저 터벅터벅 걸어온다.

내공심법을 개방한다거나 조심스레 자세를 취한 것도 아니었다. 마치 뒷산에 산책하러 나가는 듯 산뜻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심지어 두 눈에는 승부사의 투기(鬪氣)나 긴장 따위도 없었다.

‘이 작자가 지금 나와 장난이라도 하자는 겐가?’

어느새 연호정이 범오의 일 장 거리 안까지 들어왔다.

그때였다.

파아악!

연호정의 오른발이 송곳 달린 채찍처럼 범오의 얼굴을 향해 쏘아졌다.

범오의 눈이 번쩍거렸다.

‘빠르다!’

느릿하게 다가오다가 일순간 폭발적인 각법을 쏘아 낸다.

천하의 범오조차 그 무서운 속도에 당황했다. 하지만 그 역시 소림의 기재로 정평이 난 무승, 연호정의 살벌한 각법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후욱!

범오의 우권(右拳)이 뱀처럼 휘어지며 연호정의 장딴지를 노렸다. 안면에 꽂히기 전에 후려쳐 튕겨 버릴 심산인 것이다.

그때, 연호정의 발이 범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쿵!

“억?!”

쏘아지던 각법이 도끼를 휘두르듯 하단으로 내려와 범오의 발등을 밟았다.

범오의 얼굴이 벌게졌다.

‘이익!’

설마하니 발등을 밟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대승범천신공의 보호를 받아 뼈가 부러지진 않았지만, 발등에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세상 어떤 비무자가 상대의 발등을 밟는단 말인가. 듣도 보도 못한 공격이었다.

파아아앙!

성난 범오가 쌍권을 휘둘렀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것 같지만, 그 안에는 바위도 깨부술 힘과 기세가 가득했다. 소림금강권(少林金剛拳)이었다.

터텅!

범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어느새 자신의 두 주먹이 좌우로 튕겨 나갔다. 상대의 손바닥이 손목 맥문을 후려친 것이다.

대체 어떤 수법을 쓴 건지 보고도 알 수가 없었다. 번개처럼 빠른 술수였다.

연호정의 좌수가 범오의 가슴을 후려쳤다.

퍼억!

‘큭!’

강렬한 통증에 머리가 다 어지러워지는 듯했다.

대승범천신공의 내력으로도 충격을 해소하기가 힘들었다. 강권(强拳)이 아닌 유권(柔拳)의 수법, 상대의 내부에 타격을 가하는 암경(暗勁)의 일종이었다.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나던 범오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악!”

콰직!

어느새 연호정의 발이 또다시 그의 발등을 밟고 있었다.

어찌나 강하게 짓눌렀는지, 발 전체가 땅을 파고들었다. 가슴을 답답하게 조여 오는 듯한 통증, 그리고 발등이 부러질 것 같은 통증에 범오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이놈!”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사자후였다.

우우우우웅!

범종 울리는 소리와 함께 범오의 주먹이 꿈틀거리며 연호정의 상반신을 노렸다.

놀랍도록 빠르면서도 유연한 권법이었다. 연호정조차 아차 하면 당할 정도로 신묘한 묘리가 가득한 일권이었다.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소림칠십이절예(少林七十二絶藝) 중 하나, 용왕유권(龍王柔拳)이었다. 그 이름처럼, 한 마리 용이 꿈틀거리듯 그 기세가 웅장했다.

‘과연.’

연호정은 속으로 감탄을 내뱉었다.

‘역시 소림 무공은……!’

배움은 뛰어나지만 제대로 활용치 못하는 얼치기 무승의 손에서도 막강한 위력과 기파를 만들어 낸다.

과연 태산북두의 무공이라 할 만했다. 온 천하를 뒤져도 이만큼 고급스럽고도 웅혼한 무공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우웅!

연호정의 두 팔이 은은한 녹청빛 광채를 발했다. 청룡기를 운용한 것이다.

휘이이익!

기세부터 부수고 들어가는 용왕유권의 권력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휘둘러진 연호정의 양팔이 범오의 팔을 뱀처럼 휘감았다.

범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범오의 팔을 휘감은 연호정이 그대로 상체를 후방으로 눕혔다.

콰득!

“크아아악!”

범오의 왼팔이 그대로 부러져 버렸다.

그나마 관절이 파괴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정신적 충격은 목이 달아난 것과 비슷했다.

‘이익!’

상대와의 비무에서 팔이 부러진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범오 역시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대로 체중을 실어 오른손으로 연호정의 턱을 노리는데, 그 손에서 푸른 광채가 물결처럼 퍼져 나오고 있었다.

관음청강수(觀音淸剛手)였다. 짧은 순간 복잡한 내공 운용으로 공격을 가하는 것, 실전 능력은 부족하나 배우고 익힌 무공 모두가 몸에 배어 있었다.

연호정이 발에 힘을 주었다.

콰드드득!

“컥!”

범오의 신형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피슉!

관음청강수의 일격이 연호정의 어깨를 스치고 나아갔다.

공격이 들어온다고 굳이 피할 필요는 없다. 상대의 자세를 흐트러트리면 그뿐이었다. 실전에 지독히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수법이었다.

범오는 자신의 공격이 빗나간 이유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눈앞이 번쩍거리는 충격을 맞이해야 했다.

빠각!

도끼처럼 솟구친 무릎이 범오의 턱을 후려쳤다. 범오는 순간 정신이 날아갈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연호정의 진짜 공격은.

퍼억! 빠각! 퍼어엉!

강력한 삼 연타가 범오의 몸에 모조리 적중했다.

극심한 내상을 유발하진 않지만, 충격에 정신을 못 차리게 하는 공격이었다. 만일 살기까지 실렸다면 삼격으로 가기도 전에 범오는 죽었을 것이다.

후우우웅!

연호정의 몸에서 새하얀 바람이 솟구쳤다.

콰앙!

강력한 일 보(一步)와 함께 호왕의 일격이 날아갔다.

퍼어어억!

“커억!”

범오가 피를 토하며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튕겨 내는 게 아니라 모든 힘이 몸으로 가해지는 공격이었다. 죽거나 극심한 내상에 요양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지만, 당분간 제대로 된 무공을 구사하긴 힘들 것이다.

연호정이 손을 털었다.

“견식 잘했소.”

“크으윽!”

“그럼.”

“기, 기다려!”

범오가 부들거리며 몸을 세웠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대단하시오. 과연 소림의 무승들은 하나같이 강골이라더니, 그 일격을 맞고도 다시 일어날 줄은 몰랐소.”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이냐!”

“무엇이 말이오?”

범오가 창백한 얼굴로 이를 갈았다.

“발등을 밟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수를 싸움이라고……!”

그때였다.

화아아아아악!

범오는 일순 세상이 붉게 물드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붉은 세상에서, 마침내 연호정이 도끼를 꺼내 들었다.

후우우우웅!

불꽃을 머금은 듯 뜨거운 바람이 범오의 몸을 휘감았다.

‘헉!’

범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 뜨였다.

두 눈 가득 광기 어린 화염을 토해 내는 악귀가 도끼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도끼였다.

동시에 도끼가 아니기도 했다. 세상의 어떤 도끼도 태산처럼 크진 않기 때문이었다.

화르르르륵!

공기를 가르며 떨어지는 도끼날에 불이 붙었다. 화염의 도끼날이 당장이라도 몸을 반으로 쪼갤 듯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범오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후우우우욱!

순간 뜨거운 바람은 사라지고, 겨울의 한풍이 범오의 몸을 식혀 주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뜬 범오의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다. 연호정이 휘두른 손도끼가 어느새 그의 이마에 닿아 있었던 것이다.

연호정이 빙긋 웃었다.

“소림의 무학은 깊고도 방대하여 천하 어떤 수법에도 대응이 가능한 고차원적인 무공이라 들었소만.”

“…….”

“고작 이런 잡술에도 대응하지 못할 만큼, 그대가 익힌 무공은 가벼운 것이었소?”

범오의 볼이 파르르 떨렸다.

손도끼를 요대에 건 연호정이 포권을 취했다.

“소림공(少林功)은 명불허전이었소. 패한 것은 그대일 뿐, 소림공이 아니외다.”

“……!”

“나중에 때가 되면 또 한 판 합시다. 그때는 나 역시 힘으로 상대해 주겠소. 몸조리 잘하시구려.”

연호정이 공공대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공공대사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처로 돌아가는 길.

당관이 툭 던지듯 물었다.

“왜 그랬느냐?”

“무엇이 말입니까?”

“너답지 않게 손속에 사정을 두었잖느냐?”

연호정이 뜨악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럼 그 자리에서 상대를 죽이란 말입니까?”

당관이 코웃음을 쳤다.

“죽이진 않더라도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눌러 줄 순 있지. 먼저 비무를 부탁한 쪽도 공공대사였으니, 뭐라 하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야 안 되지요. 오히려 그 무승이 승부욕에 불타 제게 찾아와야 합니다.”

“어찌 그러하냐?”

“저한테 뭐라도 배운다는 걸 알면, 대사님이 가주님의 뒤를 맡아 줄 확률이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당관은 혀를 내둘렀다.

“뱀 같은 놈.”

“그나저나 시간이 좀 애매한데, 밥이나 한 끼 하시겠습니까?”

“개소리 마라. 밥때는 진작 지났다.”

“흠.”

“밥은 됐고, 술이나 사라.”

“그럴까요? 그러시죠,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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