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8화. 수레바퀴가 굴러가다 (6)
당관과의 가벼운 술자리를 끝내고 파군각으로 들어온 연호정은 순간 은밀한 살기를 느꼈다.
쉬이익! 퍼억!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피하니, 어느새 목전(木箭) 한 발이 땅에 박혀 있었다.
어찌나 예리하고 강렬한 일격이었는지 화살의 깃대까지 땅에 박혔다. 날이 추워서 땅도 얼었다는 걸 생각하면 기가 질리는 힘이었다.
연호정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삼 층 창가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시큰둥한 표정의 묵비가 홍련궁을 내리고 있었다.
“미친 거야? 냅다 화살을 날리다니!”
“흥. 또 나 몰래 뭐 재미있는 일 하고 왔죠?”
“재미는 무슨. 머리 아파 뒈지겠…… 야!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너 지금 이마빡 노렸어? 죽을래?”
“잘 피했잖아요.”
“장난하나, 지금. 나 술 마셨다고! 아슬아슬하게 피했네, 젠장.”
“무림인은 언제 어느 때든 싸움이 벌어질 수 있으니 항상 긴장해야 한다. 나한테 그렇게 알려 줬잖아요?”
“내 집에서는 좀 편히 쉬자. 어?!”
“쳇.”
파라락.
창가에서 몸을 날린 묵비가 단숨에 연호정 앞으로 내려섰다.
그녀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멸사군 훈련 다 끝냈어요.”
“어, 고생했어.”
“자꾸 이렇게 밖으로만 나돌 거예요? 이러다가 군병들 얼굴도 잊겠는데요?”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이제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나머지는 돌아가는 상황 보고 대처해도 될 것 같아.”
“그 거짓말, 진짜죠?”
“거짓말 아냐.”
“웃기시네.”
“대체 사람이 왜 이렇게 꼬였냐? 너, 예전엔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날 이렇게 만든 건 다 연 공자예요. 아니 그리고, 내가 뭐 어때서?”
연호정이 진저리를 쳤다.
“알았다. 내가 미안하다. 뭘 해 주면 될꼬?”
그제야 묵비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해 줄 건 없고, 연 공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어요.”
“음?”
“기 의원이요.”
기우희의 거처는 내성 중앙을 중심으로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술시(戌時)가 넘은 시각, 연호정과 묵비가 기우희의 거처를 찾았다.
“오셨어요?”
연호정의 눈이 반짝거렸다.
이 시간에 올 줄 알고 있었던 건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 두 잔을 준비해 둔 기우희가 고풍스러운 의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기우희가 미소를 지었다.
나름대로 마음을 정리한 것인지, 그녀의 웃는 얼굴은 무척이나 보기가 좋았다. 실제로 워낙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용모의 소유자라 그 웃음만으로 추위가 한결 가시는 듯했다.
“앉으세요.”
“그러지.”
두 사람이 기우희의 맞은편에 앉았다.
연호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날 보자고 했다고?”
“네. 그런데…….”
기우희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음주를 하셨나요?”
“음?”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티가 나나? 내공으로 주기를 전부 날려 버렸는데.”
기우희가 웃으며 자신의 코를 가리켰다.
“술 냄새가 나서요.”
“개코가 따로 없군.”
“환자를 제대로 보기 위해선 오감 역시 잘 단련해야 하거든요.”
“그건 또 처음 듣는 말인데?”
“그에 따른 진단법도 있어요. 저는 그저 환자의 상세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지만요.”
사상이나 출신을 떠나, 그녀는 의원으로서 초일류였다. 그리고 그만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노력을 했을 것이다.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야 그렇다 치고. 날 보자고 했다고?”
“네.”
“무슨 일로?”
기우희가 차로 목을 축였다.
쉽게 하기 힘든 얘기인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제대로 마음을 먹었군.’
눈빛과 표정, 기도 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제되어 있다.
자신이 나아갈 길을 확실히 정한 자의 모습이다. 어떤 의미로는 묵비나 강량보다도 더 확신에 찬 그 모습에, 연호정은 오늘의 이 대화가 제법 의미가 있으리란 걸 확신했다.
잠시 후, 기우희가 입을 열었다.
“연 군장님.”
“말해.”
“일전에 연 군장님께서 말씀하셨지요? 삼교는 중원을 불태울 것이며, 무수히 많은 죄 없는 사람을 지옥으로 처박을 것이라고.”
“그래.”
“저 역시 동감해요. 아니, 인정합니다. 저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었어요.”
외면한 것 같다가 아니라 외면했다고 한다. 확신을 갖고 말하는 것이다.
기우희의 눈이 빛났다.
“군사님께는 말씀을 드렸어요. 저는 무림맹을 위해서 일하는 게 아니라, 삼교의 침공으로 피 흘릴 이름 모를 사람들을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라고요.”
연호정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무림맹이 엇나간다면 언제든 뛰쳐나갈 거란 말로 들리는군.”
“네. 언제든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 거예요. 그리고 무림맹을 성토하겠지요. 물론, 무림맹이 엇나간다면요.”
연호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그게 바로 의와 협이지. 물론, 나는 아직 의협(義俠)과는 거리가 멀지만.”
기우희가 미소를 지었다.
“군사님과 같은 말씀을 하시네요.”
“그분도 그러시던가?”
“네. 무림맹이 엇나간다면 언제든 나가도 좋다고 하셨어요. 그 발언에 절대적인 자신감이 느껴졌지요. 아마도 군사님은 무림맹이 엇나가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으신가 봐요.”
“확신이 아니지.”
“네?”
“앞날은 누구도 모르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이 난리를 떨고 있는 거 아닌가?”
“그럼 군사님께서 보여 주셨던 그 자신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죠?”
연호정이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무림맹이 정말 그 지경까지 가게 된다면, 가장 먼저 자신이 죽을 거란 뜻이지.”
“……!”
“비록 남들 눈엔 머리나 쓰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군사님의 의협심은 본맹에서도 손에 꼽힌다. 그리고 그 의협심이 향하는 곳엔 무림맹이 있지. 만에 하나 무림맹이 엇나간다면, 이미 군사님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야.”
기우희가 씁쓸하게 웃었다.
“군사님을 향한 그 믿음, 정말 대단하세요.”
“적어도 지금은 그렇지. 말했듯 앞날은 누구도 모르는 것. 나도, 군사님도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야.”
“하긴, 그렇겠네요.”
기우희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전에 잠영일호를 데려가셨죠?”
“그리고 죽였지.”
“네, 알아요.”
잠시 말을 멈춘 기우희가 연호정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무림맹에, 잠영일호만 찾아온 건 아니에요.”
연호정의 눈이 빛났다.
“그래, 전에 들었지.”
“무림맹 외성에 연락책이 존재해요. 정확히 몇 사람이나 되는지는 저도 모르지만요.”
“거기까지는 말 안 해 주던가.”
“네. 잠영일호가 보기에 저는 그리 믿음직한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굳이 그런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잠영일호의 생각을 떠나, 신화교에서 그녀의 존재는 계륵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생아라도 결국 교주의 핏줄이니 냉정하게 내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받아들이자니 후계 구도에 심각한 지각 변동을 일으킬 수 있다.
게다가 그녀 자체가 중원에서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신화교 입장에선 여러모로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건대, 몇몇 사람을 빼고는 본교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는 것 같더군요.”
“말을 아끼는 중이다.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봉공 중 누군가가 삼교와 선을 대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그게 군사님일 확률은 없는 거고요?”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랬다. 그리고 군사님이 삼교와 손을 잡고 있었다면 애초에 얘기가 안 돼.”
“그도 그렇네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기우희가 고소를 지었다.
“잡아야죠. 연락책부터.”
스르륵.
일순 연호정의 기도가 달라졌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기질은 서늘하게 날이 서 있다. 놈들을 잡는다는 생각만 해도 진기가 요동치려 하고 있었다.
묵비가 연호정의 어깨를 잡았다.
“연 공자.”
“……후우.”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다스린 연호정. 그러나 그의 눈은 점점 더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우희가 말을 이었다.
“그것 때문에 연 군장님을 뵙고 싶었어요. 기실, 저는 신화교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이 없고, 나아가 이런 암투(暗鬪)에 대해서도 문외한이라서요.”
“그렇군.”
“다만, 연락책을 잡았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는 건 알죠. 연 군장님 말씀마따나 그 이상을 원한다면, 섣불리 연락책을 다 잡는 것도 문제가 될 것 같아요.”
“그도 그렇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즉…….”
“허위 정보를 흘려라.”
“맞아요.”
기우희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만약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면 훗날 신화교 측에서도 알게 될 테지요. 제가 배신했다는 것을요.”
“그렇겠지.”
“제 목숨, 지켜 주실 수 있으세요?”
연호정이 찻잔을 두들겼다.
“어차피 네가 없으면 신화교 놈들을 꾀어낼 수 없어. 네가 우리와 함께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 우리는 하나의 조직이 된 거다.”
“그렇군요.”
“걱정하지 마라. 적어도 네 목숨이 날아가기 전에 내가 살아 있진 못할 테니까.”
절대적인 호위를 약속한다는 뜻이었다.
기우희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살벌한 약속까지는 필요 없지만, 좋아요. 저 역시 연 군장님을 지켜 드리죠.”
연호정은 물론 묵비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켜 주다니? 누가 누구를?”
“앞으로 싸울 일이 많으실 텐데, 상처가 덧나서 죽는 일은 없어야죠.”
“호오? 주치의(主治醫)라도 되어 주시겠다는 건가?”
“모든 환자를 평등하게 대하는 게 제 신조지만, 적어도 제 목숨을 쥐고 흔드시는 분께는 한 번이라도 더 손을 보태는 게 당연하죠.”
묵비는 괜스레 입맛을 다스렸다. 어쩐지 연호정과 친분을 맺거나 거래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비정상적으로 변해 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거처부터 옮기려고요.”
“거처를 옮긴다니?”
“절 지켜 주셔야 하잖아요? 파군각으로 옮겨야죠. 거기에 남는 방 있죠?”
묵비가 입을 쩍 벌렸다.
연호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삼교만 신경 쓰는 게 아니야. 맹 내의 알력 다툼이 한창이다. 지금 네가 우리 처소로 오면 여러모로 말이 많아져.”
“그거야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요.”
“…….”
“게다가, 어차피 저는 당가주님의 후원자로 내정되었어요. 말하자면 저는 삼교만이 아니라 연공자의 정적(政敵)들에게도 노려지게 된 셈이죠.”
“음, 그건 그렇군.”
“나흘 뒤에 의선각이 정식으로 열려요. 그 전에 거처를 옮겨서 마음부터 다스리고 싶네요.”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연가의 핏줄들.은 물론 묵비, 강량에 기우희까지. 어째 파군각이 점점 요새화(要塞化)되어 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해. 아버지께는 내가 따로 말씀드리지.”
기우희가 활짝 웃었다.
“고마워요.”
“고마울 것까지는 없고.”
연호정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나저나 네가 연락책에게 허위 정보를 흘릴 생각이라면, 그 연락책 역시 파군각에 접근하게 될 텐데.”
“이것 하나는 확신할 수 있어요. 연락책은 파군각이 어떤 장소인지, 누가 거하는 곳인지 절대로 모를 거예요.”
“그래, 그거면 됐어.”
연호정의 눈이 불을 뿜었다.
“선거니, 뭐니 하면서 별의별 일이 다 있었더랬지. 모용가도 형님이 알아서 맡는다 했으니, 나도 슬슬 달려 볼까.”
* * *
사흘 후.
하인으로 보이는 중년 사내 하나가 은밀하게 파군각으로 들어섰다.
“연 공자.”
“나도 느꼈어.”
팔짱을 낀 채 창가 옆 벽에 등을 기대고 선 연호정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참기 어렵군. 당장이라도 잡아서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을 정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