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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23화 (323/963)

323화. 성화(聖火)를 밝히는 자 (5)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들어.”

평소 무뚝뚝하기로 소문 난 규적(叫寂)의 표정이 드물게 일그러져 있었다.

석양도 그 빛을 잃어 세상이 온통 어두워진 지 한참이었다. 겨울철 중원의 날씨는 아직도 적응이 되질 않았다.

이미 한서가 불침이라 추위는 물론 더위도 잘 타지 않는 그였지만, 날씨가 주는 느낌이라는 게 있다. 규적은 하남의 겨울 날씨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질 않는구만.’

역시나 고향이 최고다. 중원 땅이 워낙 넓고 기름지니 교세 확장을 위해서 반드시 공략해야 하지만, 그래도 규적은 이 땅이 싫었다.

‘차라리 화끈하게 치고받으면 좋을 것을.’

물론 그도 알고 있었다. 전쟁이란 것이 단순히 힘의 논리로만 움직이진 않는다는 것을.

전쟁은 무조건 빨리 끝날수록 좋다. 그리고 전쟁이 빨리 끝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힘과 영향력이 필요한 법이다.

신화와 사음, 광혈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서서히 중원에 침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어야 하니까.

다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다른 법이었다. 규적은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지만, 그 이상으로 뜨거운 열혈이었다.

평소 표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것도 자신의 이 불같은 성정을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수하들에게 억지로 자비를 베푸는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었다.

‘빌어먹을.’

눈에 보이는 산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싶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지만, 가슴은 시간이 지날수록 답답해져만 갔다.

‘승부다운 승부를 겨뤄 본 게 언제 적인지 기억도 안 나는군.’

답답한 마음 때문일까?

이놈의 정체기는 오 년이 지나도록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 정체기만 벗어나면 단숨에 십호장(十號將) 안쪽까지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이게 다 환경 때문이다. 그가 중원 땅에 들어와 하남성의 군부 측 인사가 된 게 바로 오 년 전이었다.

제대로 주먹질을 하질 못하니 무공에도 정체기가 올 수밖에 없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흠.”

규적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거점에서도 오십 리를 넘게 달려왔다. 이제는 속도를 내도 될 것 같았다.

파아아앙!

전신에서 시뻘건 광채가 드리워지나 싶더니, 그의 신법 속도가 두 배는 더 빨라졌다.

바람을 찢고 나아가니, 불만 가득하던 감정이 그래도 좀 풀리는 것 같았다.

기분이 안 좋을 때는 이렇게 마음껏 달려 주는 게 좋다. 규적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

규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파파팡!

허공에서 몇 번이나 발길질하며 속도를 늦춘 그가 거대한 나무 꼭대기에 내려섰다.

거목이지만 꼭대기인 만큼 가지가 얇았다. 그런 곳을 밟았음에도 나뭇가지가 휘질 않았다. 엄청난 경신 공부였다.

그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흐음. 분명 기(氣)가 튀는 걸 느꼈는데.”

극히 미세한 기의 출렁임.

기실, 그냥 지나쳐도 될 정도로 미미했다. 생각해 보면 착각이라고 넘겨도 무방할 정도였다. 워낙 빨리 달리던 중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규적은 신중했다.

불만은 불만일 뿐이다. 그는 신화교 십팔무장(十八武將)의 일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다.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라는 게 있으니까.’

화르륵. 화르르륵.

전신에서 넘실거리던 화기가 점차 색을 잃었다.

기파가 유형에서 무형으로 변했다. 단전을 가득 채우고 있던 진기를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뿌리는 것이다.

운기탐지(運氣探知)의 수법이었다. 벽을 깨고 한계를 넘어선 고수들만이 가능한 극도로 섬세한 진기 운용이었다.

우웅. 우웅.

불어오는 바람이 거세다.

바람이 세니 퍼트린 진기가 연신 출렁거렸다. 진기의 밀도를 낮춘 데다가 그 근본이 화기라서, 겨울철 바람과 맞지 않는 것이다.

‘흐음.’

그래도 실력이 어디 가진 않는다.

억지로 내공을 강하게 불어넣어 주변을 더 상세히 더듬던 그가 이내 진기를 갈무리했다.

‘단순한 착각이었던가.’

피식 웃은 규적이 나뭇가지에서 발을 떼려는 순간.

바로 그때였다.

피슉.

한 줄기 날카로운 바람이 나무 아래에서 올라왔다.

규적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콰앙!

벼락처럼 빠르고 바위처럼 무거운 장력.

일격에 땅을 터트리고, 굵은 나무뿌리를 절반이나 뭉개 버렸다. 대단한 위력이었다.

파아아악!

단숨에 아래쪽으로 내려온 규적이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떤 놈이……?!”

순간 규적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퍼어어억!

나무에 한 자 길이의 도끼가 손잡이까지 틀어박혔다.

실로 은밀하고도 빠른 술수였다. 천하의 규적조차 찰나만 늦었어도 그대로 목이 날아갔을 일격이었다.

물론, 공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후우웅!

뜨겁게 타오르는 진기가 규적의 코앞까지 접근했다.

‘화기(火氣)?!’

화기다. 한데 그 화기가 보통 대단한 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자신이 품고 있는 화기와 비교해도 큰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넘치는 화력, 타오르는 살기를 보며 순간 ‘본교의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화기의 주인이 내치는 수도(手刀)가 어느새 규적의 목젖 두 치 앞까지 접근해 있었다.

피슉!

규적의 목에 기다란 자상이 났다. 피 몇 방울을 흘린 상처 부위가 순식간에 화상을 입었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열양공의 고수인 규적이 화기를 기반으로 한 수도 일격에 상처를 입은 것도 모자라 화상까지 입은 것이다.

“이놈!”

쾅!

느닷없이 폭발한 경력에 습격자의 몸이 뒤로 튕겨 나갔다.

규적의 눈이 흔들렸다.

‘뭐야?’

배화경파술(拜火勁破術)은 중원의 촌경(寸勁)보다 빠르고 폭발력과 위력 역시 배나 더 강한 신화교도들만의 고유 무공이었다.

심지어 그 수법을 쓴 사람이 십팔무장의 일인이다. 어지간한 고수는 그 자리에서 상반신이 터져 나가도 이상하지 않다.

‘왜 느낌이 없지?’

장심(掌心)에서 폭발한 발경이 목표물을 부술 때의 감각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출렁이는 물의 벽을 친 것만 같았다. 규적은 배화경파술을 쓰면서 단 한 번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찰나에 찰나를 쪼갠 시간.

규적의 눈에, 어둠 속 습격자의 전면에서 흐르는 반투명한 물결과도 같은 진기의 흐름이 보였다.

‘물?!’

느려졌던 시간이 급격하게 빨라지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악!

수벽(水壁)의 중앙을 뚫고 나온 주먹이 무서운 속도로 규적의 명치를 향했다.

너무 빨라서 피할 새가 없었다. 규적은 단숨에 청로순화공(靑爐純化功)을 운용, 열화신장(熱火神掌)을 휘둘렀다.

퍼퍼펑! 콰직!

곧게 들어간 일권의 관통력을 전부 상쇄하지 못했다. 규적의 몸이 거목을 산산조각 내며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파파파파팡!

규적의 눈이 커졌다.

‘빠르다!’

불꽃 같은 기파를 뿜어내며 직선으로 수많은 선을 그려 내는 습격자.

실로 무시무시한 신법이었다. 아니, 보법일까?

뭐가 되었든, 그 속도가 자신보다도 한 수 위였다.

파아아아앙!

어지럽게 움직이던 습격자가 단숨에 규적의 하단으로 휘어져 내려왔다.

단순히 빠른 것만이 아니라 지극한 유연함까지 겸비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몸놀림, 규적은 경신술에 한해서만큼은 상대가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콰쾅!

두 사람의 권장(拳掌)이 부딪치며 요란한 폭음을 터트렸다.

‘익!’

규적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불거졌다.

습격자는 단순히 몸놀림만 재빠른 것이 아니었다. 빠르고 현란한 경신술은 물론이거니와, 그에 못지않은 힘도 겸비하고 있었다.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나는 규적. 습격자는 재빠르게 따라붙어 두 다리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파파파파팡! 퍼엉!

심지어는 각법(脚法)조차도 빨랐다.

신묘한 깨달음이나 정제된 투로(套路)도 없는 발길질이었다. 한데도 빠르고 강했다. 어딜 어떻게 노려 오는지를 눈으로는 쫓을 수가 없었다.

규적의 쌍장이 허공을 어지럽게 갈랐다.

퍼퍼펑!

규적의 두 손이 뒤로 튕겨 나갔다.

‘강하다!’

빠르다. 그리고 강하다.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이 곧 무공의 모든 것이다.

육안으로 확인키 어려울 정도로 빠르고, 어떤 방어막조차 깨부술 만한 힘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궁극의 무공인 법.

습격자는 별다를 것도 없는 무공으로 자신을 이렇게나 몰아붙였다. 무공의 극의(極意)로 올라가는 길목을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퍼엉!

몇 합을 밀려나면서 고요히 모으고 있던 열화의 장력을 폭발시켜 습격자를 밀어 냈다.

이번에도 손에 전해지는 느낌이 없었다. 위력에선 배화경파술보다 분명한 한 수 위였는데도, 저 반투명한 수벽 앞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괜찮다.

이 일격으로 습격자와의 거리가 오 장이 넘게 벌어졌다. 그 정도 거리면 잠시 숨을 돌리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후우.”

짧고 빠르게 숨을 고른 규적의 안광이 불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떤 개 같은 놈이……!”

규적은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상반신을 숙여야 했다.

콰아앙!

이번 일격은 크다.

마치 거대한 성벽을 화포로 쏘아 낸 것 같은 위력이었다. 무형의 쌍장 발경에, 규적의 뒤에 있던 나무 세 그루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굉장한 위력의 장법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정도 파괴력 넘치는 무공을 구사하는데도 진기의 흐름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화염처럼 달아올랐던 규적의 안광이 점차 끈적끈적한 핏빛으로 변했다.

콰콰쾅! 콰아앙!

재차 공격에 들어가려던 습격자가 멈칫했다.

콰아앙! 쾅! 화르르르륵!

규적의 무차별 장력 난사에 주변 나무들이 온통 부서졌다. 그리고 부서진 나무에 심상치 않은 불꽃이 피어오르며 일대에 불의 벽이 생겨났다.

타오르는 불꽃의 승부처.

규적이 냉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움찔.

습격자가 후속 공격을 멈추었다.

가만히 규적을 노려보던 습격자가 자세를 풀었다. 규적을 노려보는 눈빛에 실린 무서운 살기는 그대로였지만, 표정에는 의아함이 떠올라 있었다.

“통성명이라? 이 상황에서?”

“다시 말한다. 이름을 밝혀라. 이름 석 자도 밝히지 못하는 놈과 승부를 내고 싶지는 않다.”

규적은 승부라고 말했다.

그렇다. 비록 밀렸지만, 몇 합의 공방으로 규적은 상대를 완전히 인정해 버렸다.

우두둑.

규적의 꽉 쥔 주먹에서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심(武心)이 뜨겁게 타올랐다. 폭발하는 호승심이 일순 교주를 향한 신심마저 눌러 버렸다.

가슴 속에 꾹꾹 누르고 살았던 강렬한 욕망.

혼신의 힘을 다해 부딪쳐도 아깝지 않은 상대의 등장에, 규적은 자신이 처한 상황조차 잊고 흥분하고 말았다.

습격자, 연호정의 눈이 가느다랗게 뜨였다.

“……이상한 놈이군.”

습격한 자신도 자신이지만, 규적 역시 이유를 불문하고 상대를 죽여야만 했다. 저렇게 호기 넘치는 눈으로 자신을 보며 이름을 물을 게 아니란 말이다.

이름이란, 일단 상대를 반쯤 죽여 놓고 물어도 상관이 없다. 애초에 습격자가 제정신으로 이름을 알려 주진 않을 테니까.

규적이 재차 입을 열었다.

“너희가 중원이라 부르는 이곳의 대지든, 내가 왔던 곳이든 이만한 강자를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야. 피차 주먹을 겨누었으니 이유를 묻는 것은 의미 없는 일. 다만 네 이름만은 알아 두고 싶다.”

“그 전에.”

“……?”

연호정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네놈이 왜 그 옷을 입고 있는 거냐?”

“……흐음.”

“네놈이 왜, 제국 위지휘사사(衛指揮使司)의 진무(鎭撫) 관복을 입고 있느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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