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어둠이 돌아오다 (7)
닷새 후.
‘흠.’
그간 워낙 바빠서 가족끼리 밥 한번 제대로 못 먹었더랬다.
간만에 시간이 나서 오붓하게 넷이 모여 밥을 먹자고 했다. 덕분에 이 자리엔 큰애와 둘째, 그리고 묵비가 함께하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연위는 연호정의 변화를 단번에 체감할 수 있었다.
“호정아.”
“예?”
젓가락으로 잘게 쪼갠 고기를 집어 먹던 연호정이 의아한 눈으로 연위를 보았다.
‘……?’
연위의 표정이 묘해졌다.
자신을 보는 아들놈의 얼굴이 퍽 순진해 보였다. 특유의 흑백 또렷한 눈동자 또한 투명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묘하구나.’
신화교의 십이무장이란 자와의 싸움 이후, 아들은 뭔가가 달라졌다.
정확히는 숨기고 있던 본성을 드러낸 것 같다고나 할까. 지옥 같은 아수라장을 거치며 키워 낸 광기의 마성(魔性)이 이제야 고개를 쳐든 느낌이었다.
그 때문에 걱정이 많았다. 몸에 상처를 입었으면 의원을 불러 고치면 되지만, 마음과 정신의 흔들림은 오직 스스로만이 이겨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이 자리도 연호정의 눈에 깃든 어둠을 걷어 내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을 줄 요량으로 만든 것인데, 뜻밖에도 아들의 눈은 맑고 깊기만 했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는가? 아니면…….’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양이 좀 줄었구나.”
“그렇습니까?”
“장정 서너 명이 먹을 양을 취하곤 하지 않았더냐?”
연호정이 머리를 긁적였다.
“근래 들어 몸을 크게 혹사하질 않아서요. 지금은 이 정도 양이 딱 맞습니다.”
소위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무림인들이 밥 먹고 싸움질만 하는 이들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다르다.
무림이 위험천만한 창칼의 세상인 건 분명하나, 실전을 겪어 본 자보다 그렇지 못한 자가 훨씬 더 많다.
나아가 실전을 겪고 성장하는 자들보다 한 번의 실전으로 죽는 자들이 허다하다.
애초에 실전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죽음을 기반으로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지만, 실전에 임하는 자들은 패배 시의 생존을 염두에 두지 않는 게 보통이다.
즉, 실전이라는 것은 그간 자신이 살아온 삶을 전부 내거는 행위다. 단순한 체력 소모를 떠나, 심력 소모가 엄청날 수밖에 없다. 그 자체가 극한의 긴장이란 말이다.
그런 면에서 연호정은 대단히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당대 어떤 무림인보다도 많은 실전을 겪었으며, 수많은 패배도 겪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살아남아 지금 이 자리에 있다.
헤아릴 수 없는 승패로 점철된 인생.
즉, 그에게 실전이니 생사(生死)니 하는 것은 더 이상 마음먹고 올라야 하는 무대가 아니었다.
삶 그 자체가 생사요, 실전이며, 긴장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마음이 평온하며, 실전임에도 비무처럼 임할 수 있고 긴장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실전(實戰)의 화신(化神).
온 천하에 몇 없는 귀신같은 실력의 소유자이기에, 수련량과 비례하여 식사량, 휴식, 업무 등 모든 것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상처는 어떠냐? 군병들과의 비무에서 다쳤다고 들었다만.”
“우리 거처에 용한 의원이 있잖습니까? 깔끔하게 다 나았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몸이 나은 것도 다행이지만, 예전의 지혜롭고 자신감 넘치는 아들로 돌아온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연위가 연지평을 보며 불쑥 물었다.
“심심하지는 않느냐?”
“예? 아, 저요?”
“그래.”
연지평이 무안한 듯 말했다.
“하루하루 검로(劍路)를 좇기 바쁜데 심심할 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밥만 축내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 아버지는 물론 형님과 누님도 워낙 바쁘신데, 저 혼자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서요.”
“그리 생각지 마라. 무림맹은 백도 무림의 연맹이다. 너 역시 백도의 일원이자 연가의 핏줄이다. 무림이 널 부를 때를 대비하여 하루하루 열심히 수련하는 것이 옳다. 그 검, 잘 벼려 놓도록 하라.”
“알겠습니다.”
“네가 무림맹으로 오겠다는 것을 내가 말리지 않은 이유는, 가문이 안정되기도 했거니와 네가 더 큰 곳에 와서 시야를 한층 넓히길 원했기 때문이다.”
연위가 손으로 연호정과 묵비를 가리켰다.
“네 형과 비아는 단순히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요, 바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이 둘이 무엇을 보고 겪었으며, 갈등과 사건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도 잘 봐 둬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연호정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묵비는 괜스레 얼굴을 붉혔다. 자신은 썩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추켜세워 주는 것 같아서 민망했던 것이다.
연위가 웃으며 묵비를 보았다.
“그나저나, 축하한다.”
“네?”
묵비가 눈을 끔뻑거렸다.
“저, 저요?”
“그렇다.”
“무엇을……?”
연위가 눈살을 찌푸리며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말해 주지 않은 것이냐?”
연호정이 담담하게 답했다.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껏 해 왔던 대로 이어 나가면 그뿐이니, 무(武)의 정진 차원에서 보면 호들갑 떨 일도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이놈아. 무(武)의 일차 종착지(終)를 알리는 벽(壁)을 반쯤 허물어 버린 천재다. 사흘 밤낮을 축하해도 모자랄 일이거늘.”
연호정이 멋쩍게 웃었다.
“허물어트리는 중인 것이지, 완전히 허물어트린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래도 그런 것이 아니지.”
묘한 대화였다. 적어도 묵비에게는 그러했다.
연지평이 놀라서 묵비를 보았다.
“누님!”
“어, 어? 왜?”
“축하드립니다!”
“……뭘?”
“무종지벽을 허무시다니요! 대단하십니다!”
묵비가 눈을 끔뻑거렸다.
“무종…… 어? 뭘 허물어? 누가? 내가?”
연지평의 얼굴에 솔직한 감탄이 묻어 나왔다.
“어쩐지 누님의 진기가 묘하게 깊어진 것 같았는데, 역시 그랬던 거군요.”
“으응?”
묵비가 당황하여 연위를 바라보았다.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무종지벽을 돌파하는 중이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꾸준히 하면, 이번 달이 지나기 전에 상승의 영역으로 올라올 것 같다.”
“헉!”
묵비는 깜짝 놀랐다.
“제, 제가 무종지벽을 돌파했다고요?!”
연호정이 고개를 저었다.
“말은 바로 해야지. 돌파하는 중이야. 돌파한 건 아니지.”
“그게 그거잖아요!”
“다르지, 인마. 그러니까 괜히 신난다고 무리하지 말고, 아버지 말씀처럼 지금껏 해 왔던 대로만 해.”
묵비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연호정이 혀를 찼다.
“이래서 말 안 하고 있었는데.”
연위가 고개를 저었다.
“충분히 기뻐해야 마땅하다. 너도 너지만, 비아 역시 젊은 나이다. 이 나이에 무종지벽을 돌파한 고수는 결코 흔치 않아.”
“뭐, 그것도 그렇지요.”
묵비가 침을 삼켰다.
‘내가 무종지벽을……!’
벅차오르는 기쁨에 저도 모르게 주먹이 쥐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그런데요.”
“음?”
묵비의 얼굴이 얼떨떨해졌다.
“저는 제 변화를 몰랐는데…… 제가 무종지벽을 부수고 있다는 걸 대체 어떻게 아시는 거죠?”
“아, 그것 말이냐?”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기실, 어느 하나의 경지를 돌파한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이라, 외인(外人)이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무수히 많은 사람이 엇비슷한 경지에 도달하기 직전 겪는 하나의 ‘관문’이라는 것이 있다.”
“아, 네.”
“다만 그 관문을 통과하는 과정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지. 호정의 경우 사신무(四神武)의 모든 무공을 개화하고 벽라진결을 십 성 대성하여 단숨에 통과했더랬다. 내 경우, 무종의 관문에서 제법 고생이 많았다.”
아들들의 재능이 워낙 뛰어나서 그렇지, 연위 역시 재능으로는 누구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그런 희대의 검객조차 어려운 관문이었다 하니, 무종지벽의 난해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벽을 부수고 나아가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지만, 극의(極意)에 도달하면 누구나 비슷한 벽을 만난다. 물론 그 극의의 벽 역시 제각기 형태가 다르고 난해함이 다르겠지.”
“네에.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러나 그 벽을 허물고 나아가는 자에게는 하나의 특징이 보인다.”
“특징이요?”
“그렇다.”
“어떤 특징이요?”
“진기(眞氣).”
“……?”
묵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진기의 밀도가 바뀌는 거야. 그냥 이렇게 말하면 그게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러느냐 싶지만, 전혀 다르지.”
“어떻게요?”
“진기의 밀도가 달라지면 본래 지닌 단전이 급속도로 축소된다. 당연하지. 밀도를 올려야 하니까.”
“……!!”
“단전은 작아지지만, 그 안에 품고 있는 진기는 더 단단하고 농밀해지며, 시전자의 운용 방법에 따라 효율성 역시 극대화된다.”
연위가 연호정의 말을 받았다.
“나아가, 벽을 뚫고 진기의 밀도가 높아지면 근골에 깃든 진기까지도 단전으로 모여든다.”
“네에?!”
“비워야 채울 것 아니더냐? 비워진 근골에 대자연의 순후한 기가 깃드니, 단전은 물론 신체까지도 더 완벽하고 빈틈없이 발전하는 것이다.”
화르르륵!
연호정이 젓가락 하나에 불을 붙였다.
젓가락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타들어 가더니, 이내 하얗게 물들었다.
꾸욱.
숯처럼 변한 젓가락을 강한 악력으로 부수고 주먹 안에 가둔 그가 이번에는 현무기를 끌어 올렸다.
치이이익!
허연 연기와 함께 그의 손안에 작은 구슬이 생겨났다. 어찌나 강하게 압축시켰는지, 그 크기가 엄지손톱만큼이나 작았다.
“불순물이 제거된 극상승의 육체, 그리고 밀도가 올라간 단전.”
“……!!”
“그 이상의 깨달음을 얻기 위한 육체의 재구성이다. 지금의 몸으로는 세인들이 말하는 초절정의 깨달음을 온전히 담아낼 수가 없어. 그래서 육신의 내외부가 뿌리부터 바뀌기 시작하는 것이다. 더 강한 무(武)를 품기 위해.”
묵비의 눈이 흔들렸다.
“……환골탈태를 말함인가요?”
“엄밀히 말하면 다르지만, 변화라는 측면만 생각하면 그 역시 환골탈태라고도 볼 수 있지. 근골 자체가 바뀌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여하간 스스로 깨닫기 전까진 말 안 하려고 했더니, 이렇게 되었군. 축하한다.”
“네? 아, 네!”
평소 묵비라면 장난으로라도 연호정에게 툴툴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얼떨떨하기도 했고, 기쁘기도 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이왕 이렇게 모인 거, 술이라도 한잔할까요?”
“그것 좋지. 너와 지평이 가서 술상 좀 봐 오거라. 난 말이 나온 김에 비아의 내력 좀 돌봐 줘야겠다.”
“알겠습니다.”
연호정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음?’
그와 연위가 거의 동시에 창가로 눈을 돌렸다.
연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허어, 이 시간에 어인 일로 오셨을꼬?”
“그러게나 말입니다.”
“혹, 그이에게 뭔가 부탁한 것이라도 있느냐?”
“있긴 합니다만, 며칠 만에 결과가 나올 일은 아닙니다. 다른 일로 온 것 같은데요.”
“흐음.”
연위가 묵비에게 말했다.
“잠시 지평과 함께 기다리거라.”
“네!”
이상할 정도로 힘이 들어간 대답이었다. 연위가 머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연위와 연호정이 파군각의 대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당관이 있었다.
연위가 포권을 취했다.
“어서 오시오.”
당관 역시 짧게 포권을 취했다. 따로 인사는 없었다.
연호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당관이 연호정을 힐끔 바라보았다.
말없이 그를 보던 당관이 연위에게 말했다.
“연 가주.”
“말씀하시오.”
“잠시 가주의 아들내미 좀 빌립시다.”
연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무슨 일로……?”
당관이 입맛을 다셨다.
“다녀와서 말해 주겠소. 이번 일은 연 가주보다 이 싸가지 없는 놈이 더 나을 것 같아서 말이오. 하긴, 제 놈이 싼 똥이니 제 놈이 치워야지.”
“으음?”
당관이 몸을 돌렸다.
“따라오너라.”
연위와 연호정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부자간의 눈빛이 실로 오랜만에 비슷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