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41화 (341/963)

341화. 연합 (1)

“아침부터 땀을 한 바가지 흘리셨습니다?”

연호정의 느닷없는 방문에도 당관은 놀라지 않았다.

“뭐냐? 도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도끼 말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한데, 어째 진기가 상당히 불안하십니다?”

당관이 코웃음을 쳤다.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나저나, 그러는 네놈 몸뚱이도 정상은 아니로군. 또 어디서 무슨 사고를 치고 온 게냐.”

연호정이 피식 웃었다.

“모용군과 한판 찐하게 붙었지요.”

순간 당관의 표정이 돌변했다.

“모용군과?”

“예. 어떻게든 받아 내려고 했는데, 진짜 장난이 아니더군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걸 말하기 전에, 따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 있으십니까?”

당관은 실로 오랜만에 보았다. 연호정의 얼굴에 드리워진 진지함과 긴장을.

“들어오너라.”

“뭐라 하셨소?”

과연 정파 무림 최고의 성지라 불리는 소림사의 수장다운 반응이랄까?

공공대사는 놀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기도의 흔들림도 없었고, 수선을 떨지도 않았다.

그러나 제갈문호는 공공대사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놀라고 있음을 알았다. 기도는 여전히 깊고 맑은 호수와 같았으나, 불심 가득한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제갈문호가 다시 입을 열어 말했다.

“…….”

잠시 침묵이 일었다.

가만히 제갈문호를 보던 공공대사가 차 한 모금으로 목을 축였다. 여전히 기도는 잠잠했다.

“광신삼교라…….”

“그렇습니다.”

공공대사가 심유한 눈으로 제갈문호를 보았다.

직책의 상하가 없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제갈문호는 무릎을 꿇고 있었다.

단순한 사죄의 의미가 아니었다. 제갈문호는 같은 백도의 수장으로서, 무림맹 최고 수뇌부로서 온 게 아니었다.

지금의 그는 자신보다 더 지혜롭고, 더 인망 깊은 선배에게 기대러 온 후배였다.

공사 구분이 확실한 제갈문호가 이렇게까지 저자세로 나온다. 공공대사는 사안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다.

“즉, 군사께서 내게 이제야 그들에 관한 말을 한 것은, 그만큼 그들이 무서운 조직이라 말을 아꼈던 거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소?”

“그렇습니다. 그들은 황실과 관부에 성공적으로 침투했고, 심지어 사음교라는 무리는 묵룡부를 세우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

“그럴 리야 없겠으나, 그들의 마수가 우리 백도에도 뻗었다면 우리 중에 세작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조심하고 있었습니다.”

공공대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우리 중에 세작이 있을 확률이 있다. 참으로 위험한 한마디였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방장 대사님의 불심이 천하를 뒤덮고도 남음이 있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안이 사안인지라, 봉공 모두에게 차별을 둘 수는 없었습니다.”

“그 말씀은, 봉공들의 뒤를 조사했다는 말이오?”

역시 공공대사는 보통이 아니었다. 제갈문호의 말에 숨겨진 의미를 단번에 눈치챘다.

“그렇습니다.”

“…….”

너무나도 담담한 목소리로 인정한다.

그 목소리가 이리도 단단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을 텐가. 다른 걸 떠나, 공공대사는 제갈문호가 겪었을 번뇌가 상상을 초월했음을 알았다.

공공대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 고개를 드시오.”

“…….”

“내, 비록 군사보다 나이는 많을지언정 선배 대우를 받을 만큼 많은 덕을 쌓지도, 고아한 사람도 아니외다.”

“당치도 않은 말씀입니다.”

“군사께서 그리 고개를 숙이시는 것이 자신을 어여삐 봐달라는 의미가 아님을 알고 있소.”

“…….”

“이 상태로는 깊은 대화가 불가능할 것 같소이다. 이만 고개를 드시오.”

“죄송합니다.”

그제야 고개를 든 제갈문호가 편히 앉았다.

공공대사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이런 사안으로 농을 할 분은 아니라고 알고 있소만, 그래도 묻겠소. 사실이오?”

제갈문호가 품에서 고이 접은 문서 십여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걸 보십시오.”

공공대사가 문서들을 받았다.

그 문서들에는 지금까지 광신삼교에 대해 조사한 내용이 세필(細筆)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문서를 읽어 가던 공공대사의 눈에 놀라움이 어렸다.

“의선각주?!”

“그렇습니다. 의선각주는 삼교 중 신화교의 혈통으로, 연 군장에게 교화되어 우리에게 많은 정보를 주었습니다.”

“…….”

“마저 읽으시지요. 놀라운 것들이 많습니다.”

공공대사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후, 차분하게 문서들을 독파했다.

잠시 후.

“허어.”

공공대사의 입에서 기어이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거늘, 빈승은 아무것도 모른 채 유유자적 살고 있었구려.”

“방장 대사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보고 듣지 않은 이상 주변에서 벌어진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대사님의 눈과 귀를 막은 것은 접니다. 그 죄, 모두 안고 가겠습니다.”

“……그 부분은 이 자리에서 얘기할 사안이 아닌 것 같소.”

담담히 일축한 공공대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봉공 중 누가 알고 있소?”

“강동 벽산연가의 가주 연위, 호남 모용세가의 가주 모용군, 사천 당씨가문의 가주 당관.”

“…….”

“현재는 대사님과 저를 비롯해 총 다섯입니다.”

“다른 봉공들에게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오?”

“아직은…… 그렇습니다.”

사안의 중요성을 떠나, 오죽하면 이렇게까지 조심하겠냐 싶기도 했다.

그간 드러나지 않은 조직에 관한 정보를 이 정도나 모았다면 제갈문호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터. 비밀 유지에 만전을 기한 걸 생각하면 차마 모두에게 공개하라 말할 수가 없었다.

“군사.”

“말씀하십시오, 대사님.”

“훗날 이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면, 군사께서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셔야 할 수도 있소.”

냉정한 현실이었다. 제갈문호가 고개를 숙였다.

“군사 자리를 박탈당한다면 겸허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 후, 삼교를 몰아내는 데에 목숨을 걸고 싸우겠습니다. 그러고도 제가 살아남는다면, 그때는 본가의 적통에게 가주위를 전하고 평생 무림맹 뇌옥에 들어가 벌을 받겠습니다.”

무서운 각오였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기에 더 무섭다. 제갈문호가 무림맹 뇌옥에 갇히게 되면, 어떻게든 제갈세가의 이름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제갈문호는 그 모든 걸 감수하면서까지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다.

공공대사가 탄식을 토했다.

“만약 군사께서 말씀하신 것이 전부 사실이고, 나아가 우리 모두가 이들과 싸워야 할 순간이 온다면…….”

“…….”

“나 역시, 부족한 힘이나마 한 손 보탠 후 방장직에서 내려오겠소이다.”

이것이다. 이래서 제갈문호는 공공대사에게 미안한 것이다.

공공대사는 융통성이 있는 인물이지만, 그 융통성을 필요할 때 이외에는 절대 발휘하려 들지 않는 인물이기도 했다.

이 비밀을 공유하는 순간, 공공대사 역시 제갈문호와 한배를 타게 된다. 그렇다면 제갈문호가 군사직에서 내려오게 될 때, 그 역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한다.

제갈문호가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공공대사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목소리에 흔들림은 없었으나 그 안에 담긴 절절한 감정을 읽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군사께서는 군사께서 하실 일을 한 거라 생각하오. 물론 그 과정이 아주 바르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바르게만 처리한다고 해결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

소림사 주지승방의 주인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소림사이기도 했다. 중원 불교의 성지 중 하나이자 무림의 태양이라 불리는 소림사지만, 그렇기 때문에 속세의 일에 정통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방장이었다.

어지간한 악업은 순리대로 흐르게 놔둔다. 그러나 감당키 힘든 재앙에는 적극적으로 개입해 협(俠)을 지킨다.

소림사가 그 성스러운 불심을 내려놓기까지는 수백 년에 달하는 고뇌가 존재했다.

“다만, 빈승이 방장 자리에서 내려오는 한이 있더라도 군사께서 뇌옥에 썩게 하는 일은 없도록 노력하겠소.”

“방장 대사님. 그러지 마십시오.”

“군사의 눈은 협(俠)에 닿아 있소. 군사께서 그런 결단을 내려 주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찌 되었을지 모를 일이 아니겠소?”

“과찬이십니다. 제가 한 것은 그저 결단을 내린 것 하나입니다. 제가 세웠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공(功)은 연씨 일가가 이룬 것이니, 부디 그 부분을 정명히 봐 주시길 바랍니다.”

공공대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무림맹의 모든 사람이 군사와 같았다면 얼마나 좋았겠소.”

“…….”

“잘 알아들었소. 내 당분간 입을 봉하고 있으리다.”

“감사합니다.”

“오늘 밤, 시간이 되면 빈승과 차나 한잔하십시다.”

“물론입니다. 그럼.”

제갈문호가 마지막 인사를 건넨 후 거처를 나섰다.

공공대사가 눈을 감았다.

“도고일척(道高一尺)이면 마고일장(魔高一丈)이라…….”

문득 연호정의 당돌한 말이 떠올랐다.

‘도불(道佛)의 선사들께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있지요. 도고일척이면 마고일장이라, 삿되고 악한 것은 언제나 선함을 앞섭니다.’

‘힘이 있는 자라면, 끊임없는 자기 수양으로 전제로 도고삼척, 도고칠척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요.’

그 말을 듣고 공공대사는 크게 놀랐다.

힘이 있다면 바름을 위해 쓰라. 소림사가 무림의 일에 관여한 것이 바로 그와 같은 선사의 유지 때문이었다.

어쩌면 잊고 있었을, 너무나도 당연한 의무.

공공대사가 입을 열었다.

“게 있는가?”

“예, 대사님.”

“무당의 승현진인께 기별을 넣어 주게. 금일 정오에 찾아가겠다고.”

* * *

“오셨소?”

당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무 의자에 앉았다.

팔짱을 끼고 창가로 눈을 돌린 그의 모습은 묘하게 차가워 보였다. 기분이 꽤 좋지 못한 모양이었다.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호정에게 들으셨소?”

“들었으니 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자리에 온 것 아니오?”

“미안하게 되었소.”

당관이 코웃음을 쳤다.

“그간 참으로 재미있었겠소. 뭣도 모르는 놈 앞에서 저희끼리 희희낙락했을 걸 생각하면 아직도 열이 뻗치는군.”

“당가주. 우리는 절대 그러지 않았소. 오히려…….”

“시끄럽소.”

당관이 연위를 노려보았다.

그는 긴말하지 않았다.

“더 숨기는 것이 있소?”

“없소.”

“흥! 믿을 수가 있나.”

아직도 화가 안 풀린 듯 당관이 으르렁거렸다.

“이런 중차대한 일, 또 숨기는 일이 있으면 그때는 끝이오.”

“유념하리다.”

당관이 발로 탁자를 툭 찼다.

쿵.

“싸가지.”

연호정이 입맛을 다셨다.

“부르셨습니까?”

“뭐 하고 있는 거냐? 빨리 차나 타 와라.”

방에는 연위와 당관, 묵비와 연지평, 그리고 연호정이 있었다. 제갈문호와 모용군도 올 것이다.

생각보다 인원이 꽤 많다. 연호정이 헛기침을 하며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연지평이 슬그머니 일어났다.

“제가 돕겠…….”

순간 당관이 무시무시한 눈으로 연지평을 노려보았다.

연지평은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연호정이 손사래를 쳤다.

“앉아 있어라. 내가 타 올 테니까.”

“예, 예!”

“……아, 젠장 거 불편하게끔.”

연호정이 작게 중얼거리자 당관이 벌컥 화를 냈다.

“개소리 그만하고 빨리 타 와!”

“알겠다니까요.”

투덜거리던 연호정이 후다닥 방을 나섰다.

“…….”

침묵이 만근의 무게가 되어 공기를 짓눌렀다.

잠시 후, 당관이 툭 던지듯 물었다.

“모용군도 온다고 했소?”

“그렇소.”

“그놈이 내 심기를 흩트리면 그 즉시 목을 날려 버릴 테니, 절대 날 막지 마시오. 알겠소?”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노력은 해 보겠소.”

참으로 어려운 자리다. 천하의 연위조차 입 안이 까끌까끌해질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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