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연합 (3)
그날 밤.
“……?”
홀로 침상에 앉아 다음 작전을 검토하던 연호정은 자신을 향해 쏘아지는 지극히 은밀한 기세를 읽었다.
그 기세의 은밀함은 가히 암살자의 그것에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었지만, 기운이 품고 있는 청아함은 천하 어떤 정종 신공보다도 그윽했다.
‘어찌?’
연호정이 아는 기운이었다. 그래서 더 놀라웠다.
그가 아는 ‘이분’은 절대 이리 은밀하게 움직일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륵.
단숨에 창가로 빠져나와 마당으로 내려선 연호정이 서쪽을 바라보았다.
청아한 기세가 조금씩 멀어졌다. 자신더러 따라오라는 뜻이리라.
‘전음이라도 보내시지 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연호정은 움직였다. 기(氣)란 그 사람의 심정은 물론 성품까지 알려 주는바, 적어도 ‘이분’에게서 삿된 의도는 엿보이지 않았다.
스르륵.
연호정이 은밀하게 상대의 기를 쫓았다. 야심한 시각에 이런 식으로 불렀으니, 필시 다른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되는 일이리라.
그렇게 얼마나 움직였을까.
족히 이십 리를 나아가니, 어느새 조촐한 연무장이 나타났다. 연호정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연무장이었다.
무림맹에는 그런 곳이 여러 군데 있었다. 무림맹은 그렇게나 컸다.
그리고 그 연무장 중앙.
“오셨는가.”
연호정이 절도 있게 포권했다.
“그간 격조했습니다.”
“허허.”
놀랍게도 연호정을 부른 사람은 바로 무당파의 장문인, 승현진인이었다.
“유군 부대의 수장이니 할 일 없는 늙은이들과는 달리 오죽 바빴겠는가. 한 번씩 들러서 어깨라도 두들겨 줘야 했는데, 엉덩이가 무거워 찾아오지도 못했네. 미안하이.”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진심일세.”
물론 연호정도 알고 있었다. 승현진인이 빈말을 하는 게 아님을.
승현진인이 뒷짐을 지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네는 참으로 놀라운 사람일세.”
연호정은 말없이 승현진인을 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승현진인이 서서히 눈을 감았다.
“내가 자네를 처음 본 것은, 자네가 멸사군과 함께 중원을 돌며 여러 악적들을 처단하고 돌아온 이후였더랬지.”
“…….”
“그때 나는 앞뒤 가리지 않고 자네에게 따져 물었네. 허허, 말이야 따져 물었다고 하였네만, 기실 자네를 혼내 주려는 생각이 컸어. 부끄럽게도 말이야.”
“아닙니다.”
“하지만 자네는 자네 나름의 주관이 있었고, 그 누구보다도 군병들을 위하고 있었네.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자네의 진심을 알기에 충분한 대화였어.”
다시 눈을 뜬 승현진인이 연호정을 바라보았다.
순간 연호정은 괜스레 마음이 적적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을 보는 승현진인의 눈빛. 그 눈빛은 피와 살점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썩어 버린, 그 역시 안고 태어났을 것이 분명한 순수함을 다시 떠올리게 했다.
승현진인의 눈빛은 그처럼 맑고 깊었다. 연호정 특유의 맑은 눈빛과는 궤를 달리하는 눈, 선무(仙武)의 도(道)를 깨달은 것도 모자라 속세의 도(道)에도 정통하게 된 진짜 도인의 눈빛이었다.
“살업(殺業)으로 점철된 삶에서 구원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
“하지만 자네는 달랐네. 자네는 살검(殺劍)을 휘두르고 있었지만, 흔들리지 않은 강인한 마음과 세상을 위한 걱정으로 가득했지. 아슬아슬한 선이었지만, 그 선이 무척 굵고 단단함을 알았네.”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닐세. 그저 내가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뿐이야.”
승현진인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자네가 마음에 드네.”
굉장한 울림을 지닌 한마디였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살아온 적은 없지만, 연호정은 괜스레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무당파의 수장, 겉만 번지르르한 속세의 강자들과 다른 진짜 도인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한다. 평생 피에 젖은 삶을 살아온 살인마임에도.
그 사실이 감사하고, 또한 부끄러웠다. 자신은 저토록 뛰어난 도인의 인정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닌바 선이 제아무리 굵다 한들 살업이 끼얹는 탁수(濁水)는 언제나 무서운 법일세.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만, 이 걱정 많은 말코는 자네의 미래가 심히 우려될 수밖에 없었네.”
“말씀이라도 감사드립니다.”
“하여, 내 자네에게 작은 도움을 주고 싶네.”
“예?”
연호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움이라니요?”
승현진인이 돌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정오쯤 방장 대사께서 이 사람을 찾아오셨네.”
“……!”
“정확히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말씀해 주지 않으시더군. 다만 자네가 힘든 싸움을 하고 있으며, 그를 위해 뭔가 해 줄 것이 없는가를 물으셨더랬지.”
“방장 대사님께서…….”
“자네와 함께 움직이는 자들이 몇 있다고 들었네. 하지만 그들은 육가(六家)의 수장들로, 이미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지. 무공이든 자신의 주관이든, 혹은 생의 목적이든.”
늦겨울의 삭풍이 잦아들고, 초봄의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을 맞으며, 승현진인의 눈빛이 점점 더 깊어졌다.
“자네가 육가의 수장들은 물론 구파일방의 수장들 못지않음을 아네.”
“감당키 힘든 말씀입니다.”
“무공을 말하는 게 아니야. 자네의 의지와 단단한 성품을 말하는 걸세.”
“아직 부족한 게 많습니다.”
승현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다만, 자네는 아직 젊어. 젊어서 더 무섭지. 모르긴 몰라도, 차세대 강호의 주역 중에 자네의 이름만큼 빛나는 명성을 드리울 후배들이 많지는 않을 게야.”
“…….”
“힘이 있는 자, 그 무게가 주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네. 그 책임을 잊는 순간 천하가 도탄에 빠질 테지. 한 사람의 광기로 그런 것이 가능하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네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네. 그것이 무림이고 또한 세상일세.”
압니다.
연호정은 저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할 뻔했다.
무(武)든 문(文)이든, 세상에 큰 영향력을 미치는 자들은 그 사실만으로도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그들의 말 한마디는 대중의 마음을 흔들고, 대중의 마음이 흔들리면 나라의 근간도 흔들린다.
높은 자리에 앉은 자, 불세출의 명성을 얻은 자.
그런 자들이 책임 의식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다. 설령 본인이 원하지 않은 삶이라도, 그에 맞는 격을 보여 줘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야 세상이 혼란에 빠지지 않는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속세를 떠나 산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다.
냉정하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힘을 가진 위정자들, 혹은 거상들은 언제나 그러했네. 권리는 남발하면서 그만한 책임을 지는 자들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아.”
승현진인이 자연스럽게 손을 휘둘렀다.
후우우웅.
따뜻한 바람이 그의 늙수그레한 손끝에 맴돌며 연무장의 공기를 안온하게 덥혔다.
“올라오시게.”
연호정이 연무장으로 올라갔다.
승현진인이 천천히 자세를 낮추었다.
“잘 보게나. 자네의 수준이라면, 한 번으로도 충분할 게야.”
그때부터였다.
그때부터 승현진인의 아름다운 춤사위가 시작되었다.
후우우웅.
부드럽게 내딛는 발걸음은 너무나도 가벼워서, 마치 무게가 없는 듯했다.
후웅. 후우우웅.
휘두르는 양손에 맑고 그윽한 진기가 담겼다.
펑퍼짐한 소매가 허공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다만 그 손길을 따라 흐르는 바람 소리가 연호정의 귓가를 간질였다.
부드럽고 또 부드럽다. 한없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승현진인의 양손은 천하 어떤 무희(舞姬)보다도 아름다운 선을 그려 냈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연호정의 얼굴에는, 감탄보다 경악이 드리워졌다.
‘이건?!’
후웅!
바람 소리가 한층 거세어졌다.
아리따운 춤선이 조금씩, 조금씩 날카로워졌다. 곡선이 자아내는 부드러움은 그대로였으나, 완벽한 원형(圓形)을 그리던 식(式)이 점점 납작해지고 빨라진 것이다.
이윽고.
퍼엉!
허공을 터트린 재빠른 일권(一拳).
진기의 수급이 완벽하다. 그래서 더더욱 놀라운 권법이었다.
발경(發勁)을 구사하지 않았는데도 공기 중으로 퍼져 나가는 충격파가 풍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원을 그리며 모은 힘을 일권, 일권에 싣는데, 그것만으로도 능히 절정의 무공을 정면으로 깨부술 수 있을 듯했다.
더 놀라운 것은, 연호정이 이미 저 권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르륵.
자세를 바로 한 승현진인이 멋쩍게 웃었다.
“어떤가?”
“……대단하십니다.”
“그리 말할 것 없네. 빈도도 아직 수양이 부족해. 하여 중간중간 힘이 과하게 실렸네.”
연호정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리 말씀하실 것이 아닙니다. 한없이 부드럽기만 한 무당태극권(武當太極拳)으로 그만한 힘을 선보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 승현진인이 보여 준 것은 연호정도 알고 있는 태극권이었다.
하지만 동작이 비슷하다고 하여 같은 태극권이라 할 수는 없었다.
승현진인의 태극권에는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깨달음과 완벽에 이른 힘의 수급, 그리고 발산이 함께했다.
동작만 안다고 구사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었다. 형(形)은 쉽지만, 그 안에 담긴 깨달음은 백분지 일도 흉내 내기 어렵다.
그것이 바로 승현진인의 무(武)였다. 많은 실전을 겪지 않았음에도, 순수한 깨달음과 선사(先師)들의 가르침을 토대로 홀로 오롯해진 무당 장문인의 저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순간, 연호정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진다.’
흑암제의 힘이 있으면 이길 수 있다. 아니, 흑암제 정도가 아니라 지금보다 한 계단만 더 올라서도 극에 이른 실전 능력으로 승현진인과 박빙의 승부를 이룰 수 있다.
하지만 연호정은 질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미 마음으로 졌다.’
무(武)란 주먹과 발, 병장기로만 펼칠 수 있는 게 아니다.
연호정은 승현진인의 태극권에서 감히 도달하기 힘든 깊이를 느꼈다. 그리고 그 깊이에 경외심을 느꼈다.
아마 연호정이 흑암제 시절의 힘을 되찾더라도 승현진인을 상대로 이길 순 없을 것이다.
왜? 애초에 싸우려 들지 않을 테니까.
승현진인이 자신에게 검을 겨누면, 연호정은 곧바로 도끼를 내려놓고 패배를 선언할 것이다.
그것이 선도(仙道) 무학의 극치, 도불(道佛)의 수양자들이 마땅히 도달해야 할 궁극의 깨달음이었다.
승현진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참으로 자네답구먼. 내 태극권을 보고 승패부터 생각하다니.”
“아…….”
“역시나 자네는 타고난 전사(戰士)일세. 십 년 뒤면, 속세의 무(武)로 자네를 꺾을 자는 손에 꼽힐 것이야.”
“부끄럽습니다.”
“자네는 나의 태극권을 보며 닮고 싶다는 생각보다 승패를 떠올렸으며, 이내 패배하는 스스로를 보았네. 자네와 나의 차이지. 다만, 나는 그 차이를 조금은 좁혀 보고 싶네.”
“예?”
“자네와 육가의 수장 몇몇이 강호를 위해 고단한 일을 한다고 들었네. 내 따로 묻지는 않았네만, 대사의 얼굴을 보니 보통 일이 아니구나 싶었네.”
“…….”
“어떤 살업이 자네의 미래를 붉게 물들일지는 모르겠네만, 부디 그 지친 마음에 한 줄기 온기라도 심어 주고 싶네. 그저 그것이 전부야.”
그 말 직후, 승현진인이 알 수 없는 구결을 불러 주었다.
연호정은 곧장 무릎을 꿇고 승현진인의 구결을 그대로 암송했다.
그것은 무당파의 무공이 아니었다. 태극권에 녹여 낸 승현진인의 깨달음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고, 묘한 운율이 있어 마치 노래를 듣는 듯했다. 한 번 듣는 것만으로도 누구나 외울 수 있을 만큼 강한 울림 또한 갖고 있었다.
그렇게 연호정은 출정 전, 큰 선물을 받게 되었다.
어쩌면 평생 그의 마음을 지켜 줄, 무당선산 원무신(元武神)의 지고한 깨달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