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연합 (6)
파아아악!
연호정과 묵비는 단숨에 대별산맥을 통과해 북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묵비가 물었다.
“괜찮을까요?”
“뭐가.”
“당가주……님이요.”
당관에게 존대를 하는 게 아직은 영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녀의 표정도 조금은 얼떨떨했다.
연호정이 쾌활하게 말했다.
“본인이 괜찮다고 하잖아. 그 정도 자신감을 보여 줬으니, 괜찮겠지.”
“연 공자도 알잖아요. 승부라는 게 자존심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는 거.”
“자존심으로 결정이 되지.”
“네?”
“당가주 정도의 자존심이라면, 실전에서 큰 영향을 발휘할 테니까.”
“무슨 말이에요?”
“사천당가의 오만함은 본인들이 쌓아 온 공포에 기인한다. 그리고 그 공포는 곧 힘이었어. 독과 암기의 조종(祖宗)이라는 말을 괜히 듣는 게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하물며 당관이다. 암왕의 아들이기 전에, 그는 사천을 넘어 천하에 공포로 군림한 당씨들의 수장이야. 그의 자존심은 성천십삼좌 앞에서도 꺾이지 않을 거다.”
묵비가 한숨을 쉬었다.
“자신의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을 만하다는 건가요?”
“물론이지.”
“그래도 난 좀 불안해요.”
“믿어야지 별수 있나. 그리고 솔직히, 믿지 못할 이유도 없잖아?”
“네?”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그는 지금 세대의 당관이 아닌, 또 다른 과거이자 미래의 당관을 알았다. 그리고 그에겐 당관과 함께 사음교의 괴물들과 피 터지게 싸운 역사가 있었다.
그때 당관이 보여 준 무공은 가히 절대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력 여부를 떠나, 무공의 살상력만큼은 강호 정상을 다툴 만했다.
그런 그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당가의 진짜 고수들은 싸움에 임했을 때 결코 오만을 떨지 않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를 죽이지.”
“…….”
“최단 시간 안에 상대를 죽이는 것. 그것이 당가가 만천하에 절대적 공포를 뿌릴 수 있었던 이유다. 그리고 그것은 실전의 미학과도 상통하지.”
“최단 시간이라면……?”
“나아가, ‘그때’보다는 약할지언정 가주인 그에게는 당가 최강의 비기가 있어. 그 비기는 암왕 당형의 손에서 완성되어 무림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무적의 신공으로 변모했다.”
연호정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과거이자 미래였던 당시의 순간을.
흑백연합의 수뇌부들을 죽이기 위해 보낸 사음교의 특작 부대 서른세 명을, 단 한 수의 무공으로 깡그리 전멸시켜 버린 공포스러운 절기를.
지극히 화려한 강철의 꽃비를 뿌리는 사신(死神)의 무(武), 흑암제였던 당시의 그조차도 까딱 잘못하면 죽을 수 있었던 최악의 대인 살상 무공을.
“여하간, 걱정할 것 없어. 당가주는 아버지에 필적할 만한 고수야. 심지어 상성으로는 아버지가 밀리기까지 하지. 그만한 고수가 나섰으니, 분명 이길 수 있을 거야.”
“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요.”
묵비에게 있어 당관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반대로 연위는 그 누구보다도 신뢰하는 어른이었다.
당관이 연위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에 비해 큰 모자람이 없다면 어떻게든 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였다.
쿵!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울려 퍼진 굉음이 메아리가 되어 이곳까지 전달되었다.
“시작됐군.”
당관과 신화교 측 무장과의 싸움이.
“속도를 올리자.”
“네.”
파아아아앙!
두 사람이 바람이 되어 쏘아졌다.
* * *
‘위험한 놈이군.’
신화교의 십팔무장 정도가 되면 강호의 유명한 고수들에 대해 나름대로 해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물론 그 모든 고수를 실제로 만날 순 없었다. 하지만 자세한 묘사를 알고 있으니, 기질만 느껴 봐도 상대의 정체를 유추하기가 어렵진 않았다.
그러나, 요뢰는 상대의 기질을 읽고도 그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사실 빼고는.
‘이놈은 위험해.’
음험하다? 음침하다? 사이하다?
그런 평범한 단어로는 형용할 수 없다. 양(陽)보다는 음(陰)에 가까운 기도인데, 또 그 안에는 하늘이라도 뒤흔들 것 같은 막강한 패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한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기도지만, 폭발적인 일격을 내칠 수 있을 것 같은 잠재력이 깃들어 있다.
푸스스스.
상대가 발을 내딛자, 얼어붙은 땅이 연기를 내며 물러졌다.
전투 의지로 표출되는 극소량의 외기(外氣)만으로도 외물에 손상을 가하는 경지다. 굳이 따지자면 초절정의 영역에서도 한창 무르익은 경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번쩍!
요뢰의 안광이 점점 강렬해졌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구파일방이나 육대세가의 가주급, 혹은 그 이상이야.’
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재미있군.’
모습을 드러내기 전, 은근하게 전달되는 압력만으로 파악했을 때는 분명 자신보다 몇 수 아래였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서 마주하니 전혀 달랐다. 안개처럼 주변을 장악하는 살기만 보면 자신과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는 무위였다.
요뢰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우두둑.
거권(巨拳)에서 울려 퍼지는 살벌한 소리가 일대를 뒤흔들었다.
당관이 비릿하게 웃었다.
“도망은 포기했느냐?”
“도망이라니?”
요뢰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런 재미있는 장난감을 앞에 두고 왜 도망을 가겠나? 오히려 고마워해야 마땅하지. 정말 무료하던 참이었거든.”
“흐음.”
“왜? 상대가 겁을 먹지 않아 초조하신가?”
“주제 모르고 날뛰는 애송이들을 워낙 많이 봐서 말이다.”
당관의 얼굴에 조소가 깃들었다.
“적어도 이거 하나는 알겠다. 네놈은 크게 될 놈이 아니야. 호승심에 눈이 멀어 보고도 가만히 있다니, 그저 힘만 센 꼬마였군.”
요뢰의 눈이 차가워졌다.
불처럼 타오르던 호승심이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급격한 변화였다.
“네놈, 정체가 뭐냐?”
“늦었다.”
당관이 부드럽게 일 보(一步)를 밟았다.
번쩍! 찌이익!
순간 요뢰가 상반신을 뒤로 눕혔다. 그 거대한 덩치를 생각하면 도무지 믿기지 않는 유연성이었다.
“쓸 만하군.”
파아악!
무서운 탄력으로 몸을 바로 세운 요뢰가 재빨리 뒤돌아서서 자세를 낮추었다. 어느새 당관이 그의 뒤에 서 있었던 것이다.
당관이 꽉 쥐었던 주먹을 펼쳤다.
펄럭!
그의 손에서 떨어진 것은 요뢰의 찢어진 앞섶 일부였다.
“반응 속도가 제법이야. 하긴, 새외의 잡놈 주제에 관부의 관직을 꿰차고 있을 정도면 뭐 하나 잘하는 것 정도는 있었겠지.”
상대의 자존심을 무참하게 짓밟는 말이었다.
하지만 요뢰는 경동하지 않았다. 이번 한 수로 상대의 실력을 알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명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우리를 안단 말이냐?”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군. 그럼 네놈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이 산골까지 찾아왔겠느냐?”
“……!!”
“하긴, 싸가지 그놈 손에 작살난 놈도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었다고 하였지. 새외 놈들은 다 그런 모양이군. 멍청하면 조심성이라도 있어야 하거늘, 대체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요뢰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당관의 말은 이치에 맞았다. 하기야 중원 한복판에서 저만한 고수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우연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요뢰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그리 깊게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굶주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마 중원에 침투한 신화교의 교도 대다수가 득실거리는 욕망을 애써 누르고 있을 것이다.
싸움, 피, 그리고 죽음.
생을 불꽃처럼 화려하고 거칠게 살다 가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그들에게는, 주체하기 힘든 힘을 지금껏 억누르고 있었던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뿌리 깊은 신앙이 없었다면 절대로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군.”
화르르르륵!
당관의 눈에서 이채가 발해졌다.
요뢰의 몸에서 시뻘건 화염이 솟구치고 있었다. 실제 화염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뜨겁고 치명적인 화기(火氣)의 실체였다.
“깨우쳐 주어서 고맙다. 그래, 내 욕망 이전에 대의(大意)가 우선인 것을.”
화륵! 화르르르륵!
뿜어지는 화기가 점점 거세졌다.
이내 그의 주변에 있던 수목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불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일전, 연호정과 규적이 싸웠을 때와 비슷한 양상이었다. 다만 규적은 일부러 화진(火陣)을 형성한 것이고, 요뢰는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도 어느새 화진이 형성되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한 수 차이지만, 요뢰는 규적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낼 수 있는 강자였던 것이다.
“네놈은 십중팔구 무림맹에서 왔겠지? 그렇다면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다는 뜻이렷다.”
“이제야 그 무식한 대가리를 굴리기 시작했느냐?”
“그렇군. 그랬었군.”
“그나저나, 저 모옥의 원래 주인은 어디로 갔지? 다른 데에 발령이라도 보냈느냐?”
요뢰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는 당관의 말에 대답지 않고 중얼거렸다.
“규적을 죽인 것도 네놈들이었어.”
“규적인지 뭔지 알 바 아니다. 대신, 내가 아는 어떤 버릇없는 놈 손에 너희 동료 하나가 오체분시를 당했다는 말은 들었지.”
“……너도 웃기는 놈이로구나. 만에 하나를 위해 숨겨야 할 사실을 대놓고 말해 주다니.”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뭐?”
당관은 진심으로 의문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쉽게 밟아 죽일 수 있는 사냥감한테 넋두리도 못 하겠느냐?”
“…….”
“너, 설마하니 진정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냐?”
“이놈…….”
“크하하하!!”
우우우우우웅!
당관의 광소에 무시무시한 내공이 실렸다.
쩌어어어어어엉!
웃음소리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겠다. 퍼져 나가는 웃음은 그 자체로 치명적인 음공(音功)과도 같았다. 불문의 사자후(獅子吼)만큼 인상적인 웃음소리였다.
물론 그의 웃음은 사자후와 판이했다. 그보다 훨씬 더 어둡고, 지독한 살기로 가득한 웃음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그 살기만큼은 요뢰 이상이었다. 요뢰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때, 당관이 웃음을 멈추었다.
“무엄한 놈!”
콰르릉!
그의 양손에서 은은한 노을빛 광채가 피어올랐다.
요뢰의 불같은 기세와는 전혀 다르다. 어딘지 모르게 아름답게까지 느껴지는 그 진기는, 당장이라도 흩어질 듯 바람을 따라 마구 일렁이고 있었다.
그러나 요뢰는 그 힘을 무시할 수 없었다.
‘강하다!’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그 진기 속, 천하에서 가장 지독한 독사의 숨결이 느껴졌다.
‘독?’
신화교의 열양공 못지않은 패력과, 그 패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독한 독기를 머금은 기이한 진기.
세상은 그 무공을 도반삼양귀원공(導反三陽歸元功)이라 부르며 두려워하였다.
“설마 당문?!”
순간 당관의 손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쾅!
피할 새도 없었다. 팔을 교차해 당관의 장력을 막은 요뢰가 나무 두 그루를 부러트리고 나서야 가까스로 멈춰 섰다.
당관이 살벌한 웃음을 띠었다.
그의 웃음은 독사를 연상케 했다. 용보다도 크고, 호랑이보다도 사나운 독사를.
“내가 당씨임을 알았다면 얌전히 목을 내놓거라. 고통 없는 죽음으로 자비를 베풀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