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백무제-350화 (350/963)

350화. 암투(暗鬪)의 승자 (4)

“자네도 알겠지만, 도지휘사쯤 되면 암암리에 뛰어난 고수를 호위로 두게 마련이네. 자네만큼은 아니어도, 자네 가문의 장로급 정도 되는 고수들도 몇몇 있었지.”

“…….”

“그들 모두가 당했네. 놈들은 죽지 않는 괴물이었어. 팔다리가 날아가도 움직였고, 피를 몇 바가지나 흘렸음에도 쓰러지지 않았네.”

“그랬습니까.”

“목을 날리거나, 육신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서는 죽일 수 없네. 내 지금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네만, 그런 괴물들은 처음이었어.”

본디 여상도는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리 자세하게 말하는 건, 그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는 뜻일 것이다.

‘무리도 아니지.’

듣는 자신도 쉬이 믿기질 않았다.

물론 목을 날리거나 심장을 뽑아내면 버티지 못한다고 하니 불사신은 아니다. 그러나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수준의 치명상을 입었는데도 전투력이 급감하지 않는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무기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이 강철로 만들어진 것도 아닌 바에야, 방심만 안 하면 죽이는 데에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여상도 휘하의 고수들이 당한 것은 적의 전력 이전에 방심했기 때문일 확률이 높았다.

“여 공께서 걱정하시니, 저들은 일단 두겠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다 죽일 수는 있지만, 당신을 봐서 가만히 있겠다고 한다. 과연 호남의 패자다운 자신감이요, 자존심이었다.

여상도가 입을 열었다.

“그래, 그 부분을 제쳐 두고서라도 자네가 날 찾아온 계기는…….”

“예. 이미 접촉했습니다.”

“……누구와 접촉했다고 하던가?”

“신화교의 십팔무장이라고 하더군요. 그중 십이무장이란 놈과 부딪쳤습니다.”

여상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규적.”

“알고 계십니까?”

“아네. 도지휘사사, 위지휘사사, 나아가 승선포정사사 내에 암약한 놈들 대부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네.”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라고 놀고만 있지는 않았으니까.”

과연 대단한 인물이다.

사방이 감시의 눈으로 가득한 와중에 첩보 조직을 운영해서 놈들에 대해 알아본 모양이었다.

능력을 떠나, 이런 배포는 아무나 보여 줄 수 없는 것이다. 모용군은 여상도가 십 년 전에 만났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쩌면 연호정 그놈보다 여 공이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을 수도.’

모용군이 입을 뗐다.

“여쭤볼 게 있습니다.”

“물어보시게.”

생각보다 훨씬 유연한 태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외적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생각지도 못한 원군이 온 셈이다. 여상도가 관대해진 이유였다.

“그 전에, 한 가지 사실부터 말씀드리지요. 규적은 죽었습니다.”

“……!!”

여상도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놈이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어떻게…… 설마 자네가?”

“아닙니다. 본 맹에 젊은 고수 하나가 있는데, 그자의 손에 죽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규적은 십이무장이야! 내 비록 무공에 문외한이지만, 그자의 무공이 종사급이라고 들었네. 능히 일파의 문주를 맡아도 부족함이 없다고 했거늘.”

“그 젊은 고수의 무공이 이미 종사급입니다.”

“……!”

“듣기로, 온몸을 난자하다시피 하여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놈을 죽일 수 있었군요.”

“대체 그자의 이름이 뭔가?”

“연호정입니다.”

“연호정…….”

“강동 벽산연가의 장남입니다.”

순간 여상도의 눈이 번쩍거렸다.

“천하제일 후기지수?”

“아십니까?”

“모를 수가 없지. 자네 가문의 젊은이와 함께 강호 최고의 후기지수라 불리고 있잖은가? 그 정도 소문은 내 귀에도 들어오네.”

“그렇군요.”

“대단하군. 그 연배에 규적을 죽이다니.”

“그래서 문제입니다.”

모용군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뭐가 어찌 되었든 놈은 위소(衛所)의 진무였습니다. 말하자면 강호인이 관리를 죽인 셈인데, 그냥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제야 여상도는 알 수 있었다. 모용군이 왜 자신을 찾아왔는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것이었다.

“막아 달라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

“신화교 놈들이 여 공을 감시 중이라면, 놈들 역시 사건이 크게 번지는 걸 달가워하진 않을 겁니다. 제 예상은 그렇습니다만.”

여상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로군.”

만약 신화교가 하남성 관부를 전부 삼켜 버렸다면 여상도를 감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애초에 살려 두지도 않았을 것이다.

즉, 지금 신화교 측은 하남성 전체를 집어삼키기 위해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형식으로든 일이 커지는 건 바라지 않을 터였다.

“이미 일이 커지긴 했네만.”

“더 커질 겁니다.”

“음?”

“대별산에 관부 고위급 관료의 의복을 입은 자가 출몰했습니다. 적어도 도지휘첨사 이상, 덩치가 큰 중년의 사내라고 하였습니다.”

여상도의 눈이 흔들렸다.

“요뢰……!”

“현재 그자를 잡기 위해 고수 하나가 움직였습니다.”

“요뢰를 잡겠다고?!”

“그렇습니다.”

“가능하리라 보는가? 요뢰는 규적보다 더한 고수야. 그만한 고수를 잡으려면…….”

“잡을 수 있습니다. 야수를 보냈거든요.”

“야수?”

“사천당가의 주인입니다.”

여상도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당가주, 당관이라 했던가?”

“그렇습니다.”

무림의 인물이 아니라 해도, 상식적으로 독과 암기라 하면 음습하고 불쾌한 느낌을 받게 마련이다.

사천당가는 독과 암기의 조종 소리를 듣는 사천 최강의 문파 중 하나. 그곳의 수장이 움직인다고 하니, 안심이 되기도 하고 떨떠름하기도 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 당가주가 요뢰를 이길 수 있다고 보는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요뢰라는 자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겪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는 규적보다 한 수 위라고 들었네. 고수일수록 한 수 차이가 엄청난 차이라고들 하더군.”

“맞습니다.”

“비단 규적만이 아닐세. 일호부터 십호까지, 열 명의 무장들은 제각기 특출난 장기가 있다고 했네. 오호무장 요뢰는 그저 한없이 강한 권법가라고 들었네만, 그 정도 고수라면 아무리 당가주라도…….”

“연호정에게 당한 자보다 한 수 위의 실력. 거기에 권법가라면, 제아무리 기공술에 능해도 당가주를 이기긴 힘들 겁니다.”

“어찌 그리 생각하시는가?”

모용군은 잠시 침묵했다.

왜 그리 생각하냐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이윽고 모용군이 입을 열었다.

“환경, 상황이 도와준다는 전제하에, 당가주는 다른 육대세가 가주의 합공에도 반나절은 버틸 수 있을 겁니다.”

“……!!”

“그가 우리보다 강해서가 아닙니다. 그의 무공 특성 자체가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물론, 그만한 시간을 버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지극히 뛰어난 무인이라는 증거입니다. 괜히 육대세가의 일인이 아니지요.”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진 관계다.

그러나 모용군은 알고 있었다. 믿고 있었다.

당관이 절대 새외의 잡놈에게 당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사적인 악연을 떠나, 당관은 성천십삼좌를 제외한 어떤 고수와 일전을 벌여도 높은 승률을 가져갈 만한 남자다. 독공에 강한 열양공을 익힌 초절정고수라 한들 당관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나긴 힘들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당가주가 그 요뢰라는 놈을 죽인다면, 이건 위소의 진무를 죽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됩니다.”

“……음.”

“막아 주실 수 있습니까?”

여상도가 빤히 모용군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바 아니네만, 그게 쉽지는 않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설령 잠시나마 사건을 은폐한다 한들 그건 미봉책일 뿐이야. 나 자신의 목숨은 물론이거니와 하남성 민생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네. 신화교 놈들, 음험하기 그지없으나 동시에 하나같이 호전적이고 불같은 성정을 지니고 있어.”

“…….”

“……자네, 설마?”

“그렇습니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악귀의 미소였다.

“신화교의 고수를 죽인 자, 연호정과 당가주의 소재지를 놈들에게 알려 주십시오.”

“……!!”

“알아서 처리하러 올 겁니다.”

여상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 두 사람, 자네의 정적(政敵)인가?”

“며칠 전까지는 그랬습니다.”

“지금은 아니란 말인가?”

“집안싸움 이전에 외적부터 처리해야지요.”

“한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가? 그 둘이 제아무리 강하다 한들 신화교의 표적이 된다면……!”

“다 잡을 겁니다.”

모용군의 눈이 살벌하게 빛났다.

“십팔무장은 신화교의 중간 고수층이자, 하남성 관부의 명줄을 쥐고 있는 놈들입니다. 그중 네다섯의 목숨만 날려도 여 공의 숨통이 트이실 텐데요?”

“…….”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공동의 적을 처리해야 합니다. 저희만으로는, 아무리 팔방으로 날뛰어 봤자 놈들의 뿌리를 뽑을 수 없습니다.”

“…….”

“제대로 거들어 주셔야 할 겁니다. 하남 관부를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으시거든.”

여상도가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정녕, 자네들이 잡을 수 있단 말이지?”

“물론입니다.”

모용군이 쓰게 웃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연호정이나 당가주나 실전에서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부류들입니다. 어느 정도의 전력을 파견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전에 대비만 하고 있다면 이쪽이 당할 일은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

“함께하시겠습니까?”

“자네들에게, 내 목숨과 하남성 관부의 운명을 걸어야 한단 말이지?”

“외람된 말씀이오나,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면 여 공께선 첩보 조직을 놀리는 것 외에 하실 수 있는 일이 없잖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물끄러미 모용군을 바라보던 여상도가 이내 눈을 감았다.

“내, 이제 와서 무슨 자존심이 있다고 날을 세우겠는가. 어차피 놈들에게 저당 잡힌 목숨, 폐하를 위해 불사른다 생각하면 아무것도 겁날 것이 없지.”

“…….”

“막아 주겠네. 나아가, 자네가 말한 대로 정보를 흘려 주지.”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네. 자네들이 놈들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하남성을 위해서라도 자네들을 표적으로 삼아 움직일 수밖에 없네.”

“이해합니다.”

여상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개봉부에 연조각이라는 주루가 있네. 그곳 삼층 금실(金室)에 들어가 술잔 세 개를 거꾸로 놓도록 하게. 내 휘하 첩보원이 찾아갈 걸세.”

“사흘 뒤 찾아가겠습니다. 동료에게 연락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시게.”

“하면,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알겠네.”

“아, 그전에…….”

“음?”

모용군이 의아한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왜 집무실을 놔두고 이곳에서 일을 보시는 겁니까?”

여상도는 비밀이랄 것도 없다는 듯 순순히 말해 주었다.

“이곳이 내 첩보 조직의 거점이니까.”

“…….”

“신화교 놈들은 내가 농땡이나 피우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내게도 편하네.”

모용군이 미소를 지었다.

“가 보겠습니다.”

“모용가주.”

“예, 말씀하십시오.”

“부디 건투를 비네.”

“승전보를 기대하십시오. 곧 하남성이 깨끗해질 수 있을 겁니다.”

훅!

그 말을 끝으로 모용군이 사라졌다.

여상도가 한숨을 쉬며 의자에 등을 묻었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가.”

* * *

동료에게 연락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모용군의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모용군은 사흘 동안 여상도의 동태를 살폈다. 그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흘 후, 그는 여상도가 말한 연조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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