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청소의 시작 (5)
죽립(竹笠)을 쓴 사내가 산천을 내달렸다.
후우웅.
발끝으로 땅을 박차는 움직임이 몹시나 가볍고 우아하다.
그러면서도 빨랐다. 한 번 땅을 박차면 십여 장 거리는 우습게 돌파하는데, 숨 한번 몰아쉬지 않고 수십 번이나 그런 동작을 반복했다.
다리에는 탄력이 넘치고, 호흡은 지극히 안정되었으며, 속도를 배가시키는 팔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유연하여 새의 날갯짓을 보는 듯했다.
그렇게 사내는 달렸다.
고상하고도 우아한 자세로, 그러나 어떤 고수와도 비교를 불허하는 속도로.
얼마나 달렸을까.
번쩍!
죽립 아래, 어둡게 그늘진 사내의 두 눈에서 연녹색 광채가 뿜어졌다.
‘저기로군.’
파아악!
종전에도 빨랐지만, 지금은 더 빨랐다. 바위를 박차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그의 모습은 말 그대로 한 마리 새와 같았다.
타다닥!
하늘 높이 날아올라 수많은 나뭇가지를 밟고 전진한 사내의 눈에, 마침내 한 명의 중년인이 보였다.
번쩍!
번개처럼 이동한 죽립 사내가 어느새 중년 사내 앞에 내려섰다.
중년 사내, 모용군의 얼굴에 은근한 감탄이 일었다.
“강동 전체에 이런 말이 있다고 들었소. 판관이 날아오르면 모든 악(惡)이 숨을 죽인다…… 과연, 그 결단력만큼이나 놀라운 신법이오.”
“과찬이오.”
사내가 죽립을 벗었다.
그는 연위였다.
“빠르시구려. 못해도 이틀은 더 걸릴 줄 알았거늘.”
“언제 싸움이 벌어질지 모르는 판국에 여유를 부릴 순 없었소이다.”
모용군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칫하다간 혼자 잡으러 가야 하나 싶었소이다.”
연위가 물었다.
“그쪽 군장에게 연락은 받으셨소?”
“그렇소. 앞으로 반나절 뒤에 도착할 것 같소.”
“반나절이라.”
연위가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밤이었다. 달빛은 맑았지만, 구름도 적당히 끼어 있었다. 사물을 구분하기에 부족함은 없었으나, 대낮처럼 환히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무(武)로써 신(神)의 영역에 올랐다는 성천(聖天)의 강자를 제외하면, 전 무림에서도 적수를 찾기 어려운 강자들이었다.
이 정도 밝기라면 내공을 이용, 뛰어난 안력으로 사물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저기로군.”
연위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장원이 있었다.
그 크기가 어찌나 큰지, 어지간한 고관대작들도 혀를 내두르며 감탄할 만한 규모였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식솔 수백 명을 거뜬히 수용할 수 있을 만큼 크고 넓었다.
모용군이 말했다.
“근 일 년 동안 주변 민간인을 다른 곳으로 이전시켰다고 하오. 덕분에 저 장원을 기점으로, 반경 십 리 안에는 민간인이 없소.”
“다행이구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싸워 봐야 알겠지.”
“전력 파악은 되었소이까?”
“물론이오.”
모용군이 품에서 작은 서신을 꺼내 들었다.
“도지휘사 여상도 공의 첩보 조직이 알아낸 것이오.”
서신을 받아 읽은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넷이라…….”
“정확히는, 최악의 경우 넷일 수 있단 거요. 우리가 이곳저곳 쑤셔 놨으니 놈들도 정신이 없을 터. 다른 곳으로 파견을 보냈다면, 저쪽에 우리와 상대할 만한 고수는 두셋 정도라고 보면 될 것이오.”
“그들만 있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오만.”
“물론이오. 무종지벽을 돌파한 초절정고수를 제외해도, 나름대로 실력이 출중한 고수가 수백은 있을 거요.”
“수백.”
“내, 몰래 여 공을 만나러 갔을 적, 그분을 감시하는 놈들이 대략 오십은 있었소. 그들 오십은 하나같이 출중한 실력을 자랑하는 고수들로, 결코 만만히 볼 놈들은 아니었소.”
연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호정의 말로는 그들이 신화병(神火兵)이라 하더이다.”
“신화병이라…….”
모용군이 조소를 머금었다.
“이름 한번 거창하군. 하기야,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이었으면 관부를 장악하려 했을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렇다면 신화교 측에서 하남 관부에 보낸 고수의 숫자가 본래는……?’
규적, 그리고 요뢰.
거기에 연호정과 당관에게 간 세 명의 무장과 지금 두 사람이 공략하려는 곳의 고수들까지 합치면?
‘초절정고수만 아홉…….’
오싹한 숫자다.
각개 격파로 둘을 먼저 해치워서 다행이었다. 이제 저쪽에서 연호정과 당관, 묵비가 적들을 몽땅 해치운다고 가정해도 네 명이 남는다.
대단한 전력이었다. 하기야 한 성(省)의 모든 것을 휘어잡고자 한다면, 그 정도 전력은 투입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휘하 고수도 수백 명이라 하였다.
‘공략할 수 있을까.’
연위의 눈이 깊어졌다.
그가 모용군을 바라보았다.
‘모용가주…… 분명 숨겨 둔 한 수가 있다.’
권모술수가 너무 뛰어나서 지닌바 무공이 저평가된 경향이 있다.
이렇게 가만히 보기만 해도 모용군의 무력은 자신과 차이가 없었다. 게다가, 듣기로 모용군은 모용가의 가주지학인 건곤무(乾坤武) 외에 또 다른 무공을 연성하고 있다고 하였다.
즉,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 역시 그렇다만.’
차이는 있었다. 모용군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부러 숨긴 것이고, 연위는 제 실력을 드러낼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나 모용군이나,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못해도 한 수는 더 강하다는 것.
‘그러나 저들의 무공 역시 예상보다 뛰어날 수 있다.’
특히나 두 사람이 노리는 곳은 놈들의 사령부라고 할 수 있었다.
본래는 여상도가 휘하 관리들과 모여 군정(軍政) 토론을 활발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곳이라 하였다. 덕분에 넓기도 넓었고, 수성(守城) 면에 있어서도 꽤 탁월한 효과를 자랑했다.
게다가.
“잠시 정찰을 나가도 되겠소?”
모용군이 연위를 힐끔거렸다.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소?”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좋소, 함께 갑시다.”
훅!
두 사람이 기척을 죽이고 장원과의 거리를 좁혔다.
얼마나 접근했을까.
모용군의 눈이 번쩍거렸다.
[맡았소?]
[맡았소.]
모용군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놈들, 대비를 아주 단단히 했구려.]
극도로 활성화된 두 사람의 감각을 가장 먼저 자극한 것은 은근하게 풍기는 기름 냄새였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니 초절정고수라도 이만큼 감각을 극대화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쳤을 만큼 냄새를 잘 막아 두었다.
[놈들은 하나같이 열양공의 고수들이오. 연 군장의 말에 따르면, 스스로 불을 내어 증폭된 화기(火氣)를 빨아들여 내력 소모를 줄이는 걸로 모자라 힘을 키운다고 하오.]
[나도 그리 들었소.]
실제로 연위는 연호정과 규적의 전투 장소에 직접 간 적이 있었다.
발 빠르게 막아서 다행이었지, 자칫 큰 산불로 번질 뻔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제아무리 열양공의 대가라도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은 쉽게 시도할 수 없는 모험이었다.
평범한 무사들에게 모험인 것이, 그들에게는 모험이 아닌 것이다. 신체의 강력한 내열성을 근본으로 하지 않으면 결코 쓸 수 없는 전법(戰法)이었다.
하긴, 모험 이전에 그 넓은 영역에 불을 지른 내공 발경 자체가 대단한 것이지만.
‘이로운 환경에서 싸운다…… 전투의 기본이긴 하지만.’
두 사람이 더 조심스레 움직였다.
제아무리 뛰어난 고수라지만, 둘은 백도 무림의 정통 무공을 익힌 사람들이었다. 기공의 깨달음이 대단하여 기척을 줄이고 늘리는 게 자유자재라지만, 초일류의 은신술까지 펼치는 건 무리였다.
즉, 내부까지 파고들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무종지벽을 돌파하지 못한 고수만 깔려 있다면 모를까, 무장급 고수가 하나라도 있다면 들킬 확률이 높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일대 외곽을 전부 돌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골치 아프게 되었군.”
모용군의 눈이 깊어졌다.
“사방에서 기름 냄새가 나고 있소. 만약 전투가 벌어지면, 놈들은 불부터 지르고 시작할 것이오.”
“내 생각도 같소.”
“참으로 재미있는 놈들이오. 화공(火攻)이 통하지 않는 걸 넘어 도리어 그것이 도움을 줄 수 있다…… 실로 흥미롭군.”
곰곰이 생각이 잠겼던 모용군이 툭 던지듯 말했다.
“저 정도면 폭우가 쏟아지지 않는 한 불을 꺼트리긴 무리일 것 같소.”
“…….”
“이로운 환경을 만드는 것이 전투의 기본이고, 놈들이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이점부터 지우고 나서 전투를 진행하는 것이오.”
“맞는 말씀이오.”
“어중간한 물로는 끌 수도 없을 터. 그렇다면 전투 장소를 옮겨야 한다는 말인데.”
“음.”
“우리에게 이로운 장소로 유인을 한다면…….”
“꼭 그럴 필요가 있겠소?”
“무슨 말이오?”
연위는 잠시 말을 아꼈다.
유독 진지한 얼굴이었다. 모용군은 그의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잠시 후, 연위가 말했다.
“이곳에 당가주가 왔다면 좋았을 것이오. 독을 풀어 적들의 전투력을 급감시킬 수 있을 테니까.”
“문제는 그가 없다는 것이지.”
“그렇소.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세 가지요.”
“말씀하시오.”
“첫째. 전투를 포기하는 것.”
“……뭐, 그 또한 선택지 중 하나가 될 수는 있겠지. 무리하게 공격하다 일이 틀어지는 것보다야 후일을 도모하는 게 나으니까.”
“그렇소. 문제는, 내 아들과 당가주 쪽이 승전보를 전해 오면 이놈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상상이 안 간다는 것이오.”
“그래서 나와 연가주가 온 것 아니겠소. 이 기회에 놈들을 싹 잡아 버리는 게 최선이니까.”
“그렇다면 두 번째 선택지가 있소. 모용가주께서 말씀하셨듯, 전투 장소를 바꾸게끔 유도하는 것이오. 말하자면 유인책을 펼쳐야 한단 것인데.”
“그게 제일 낫다고 보긴 하오. 이왕이면 물가가 좋겠지.”
신화교의 화공(火攻)을 무마시키려는 것이 아니었다. 모용군은 자신이 익힌 뇌정공(雷霆功)이 수기(水氣)를 받아 증폭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잘하면 일격에 놈들 대부분을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물가로 유인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문제는, 저렇게 준비성이 투철한 놈들이 과연 유인책에 걸려들겠냐는 거요.”
“음.”
고개를 주억거린 모용군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세 번째는 뭐요?”
“이곳에서 싸우는 거요.”
“가장 나쁜 선택지로군.”
“가장 나쁘지만, 경우에 따라선 가장 괜찮은 선택이 될 수도 있겠지.”
“무슨 말씀이오?”
연위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순간 모용군의 눈이 커졌다.
“……당신, 미쳤소?”
여러모로 역사적인 순간임은 분명했다. 모용군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건 정말 흔치 않았다.
심지어 그것이 감탄이라면 더더욱.
연위가 한숨을 쉬었다.
“여 공과 손을 잡지 않았다면 떠올리지 못했을 거요. 게다가, 여 공이 그것을 쉽게 허락할지도…….”
“아니, 허락할 거요.”
“확신하시오?”
“물론이오. 놈들에 대한 여 공의 분노는 나에 못지않소. 놈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목숨까지 건 양반이외다. 뭔들 못하겠소?”
“그렇다면…….”
모용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어차피 저쪽 전투가 끝나도 예까지 소식이 닿으려면 사흘은 걸릴 거요. 그리고 여 공이 힘을 써 준다면, 이틀 안에 모든 준비를 마칠 수 있을 거요.”
“……좋소.”
연위가 힘 있게 말했다.
“그럼, 곧바로 작업에 착수합시다. 여 공께는 모용가주께서 직접 가 주시오.”
“알겠소. 연가주께선 예서 탕마군(蕩魔軍)을 기다리시오.”
“그리하리다.”
몸을 돌린 모용군은 잠시 멈칫했다.
“연가주.”
“말씀하시오.”
“연 군장 쪽은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모용군답지 않은 격려였다. 하지만 속내를 알고 보면, 실로 모용군다운 말이기도 했다.
자식 걱정 때문에 이번 전투에서 냉정을 잃으면 안 되니까.
연위가 미소를 지었다.
“다녀오시오.”
파악!
모용군이 무서운 속도로 움직였다.
연위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기지 못해도 괜찮다. 다치지만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