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강자의 권한 (1)
“아버지!”
“연락이 왔느냐?”
“네!”
제갈아연에게서 서신을 받아 든 제갈문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역시.”
제대로 처리할 줄 알았다. 이 서신은 연호정과 당관, 묵비 쪽이 승리했다는 승전보였다.
제갈문호는 그들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작전도 십 할의 확신을 가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사람이 하는 일에는 언제나 변수가 따르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다행히도 그 셋은 자신들의 능력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멸사군의 도움도 있었겠지만, 아군이 도착할 때까지 물고 버틴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공(功)이었다.
“지금쯤이면 이미 놈들의 본거지 쪽으로 올라갔겠군.”
그때였다.
“군사님! 정보 고문에게서 급보가 왔습니다!”
“급보?”
정보원이 건네준 서신을 읽은 제갈문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약을……?!”
제갈아연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화약이라니요? 설마 제가 아는 그 화약이요?”
“그래. 적들의 본거지를 쓸어 버리기 위해 도지휘사 공께 부탁하여 화약까지 동원했다고 하는구나.”
화탄(火彈)이 아닌 화약이다.
어떤 의미로는 화탄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것이 바로 화약이었다. 화탄은 제조법에 따라 안전장치를 결속시키거나 외피를 두껍게 만들어 보호할 수 있지만, 화약은 불만 붙으면 곧장 터져 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습도에도 취약하다. 그것은 위력이 강한 화약일수록 더더욱 그러하다.
‘화탄도 아니고 화약을 건넸다…… 관리에 드는 비용과 어려움을 생각하면, 여 공 측에서도 사활을 걸었다는 뜻이로군.’
제아무리 도지휘사라도 그 정도 양의 화약을 외부로 유출하려면 큰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다. 하물며 제국의 힘이 약화 된 지금, 자칫 꼬투리를 잡히면 삭탈관직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아닌가. 오히려 화약이 더 안전할 수도 있겠어.’
화탄이 터지면 그 잔여물이 남기 마련이다. 반면 화약은 터지면 그것으로 끝이다.
혹시 모를 꼬투리를 피하고자 화약을 건넨 거라면, 과연 여상도 역시 보통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뭐가 어찌 되었든, 화약까지 동원한 이상 큰 피해 없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탕마멸사군은 화탄 운용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는 부대들이었다. 단순히 쓰는 걸 넘어서, 폭발의 피격 반경과 침투 경로까지도 훈련했다고 들었다.
남은 것은?
‘잔챙이들은 탕마멸사 합군이 처리할 수 있을 터. 그러나 고수진은?’
제갈문호의 눈이 깊어졌다.
‘얼마나 대단한 고수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물론 십팔무장급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만에 하나, 그 이상의 고수가 왔다면.
초절정고수 이상의 강자가 그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다면?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설령 그렇다 해도, 우리 쪽의 전력도 결코 부족하지 않아.’
제갈문호는 성천십삼좌급의 고수가 얼마나 강한지 알지 못했다.
당연히 그 영역에서의 힘은 상식을 초월할 것이다. 어쩌면 육가의 수장급 서너 명의 전력도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물러나는 정도라면 그만한 전력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연 군장과 모용가주는 이기지 못할 싸움에 목을 매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아군이라면 누가 죽어도 가슴 아픈 일이겠지만, 특히나 그들 네 사람은 이번 싸움에서 절대 죽어선 안 된다. 물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한다.
제갈문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석양이 지는 시간. 지금쯤이면 이미 모든 싸움이 끝난 이후일 것이다.
하남의 마지막 싸움은 과연 어떻게 끝났을까?
“……부디 모두 안전하길.”
* * *
쿠구구궁!
탕마군의 진군은 멸사군의 진군과 완전히 달랐다.
콰앙! 퍼어어억!
“크악!”
“아아악!”
단순히 베고 찌르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중갑을 걸친 것은 군병만이 아니었다. 멸사군의 군마가 체력이 좋고 날렵하다면, 탕마군의 군마는 육중하니 힘이 넘쳤다.
거기에 중갑까지 걸치고 몰아붙이니, 그 파괴력은 제아무리 절정고수라도 쉬이 당해 낼 게 아니다. 온갖 창검에 몸이 난자되면, 군마의 말발굽이 그들의 몸을 짓밟고 지나갔다.
콰콰쾅! 콰앙!
화약은 전부 터트렸는데도 여전히 여기저기서 폭음이 울린다. 탕마군의 돌진력과 군마의 무게감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알 수 있었다.
모용우가 외쳤다.
“하나하나 확실히 죽여라! 목숨줄이 질긴 놈들이다!”
목을 베라거나 머리를 으깨어 버리라는 등의 말도 없었다.
그러나 굳이 그런 설명이 없어도 군병들은 모용우의 명령을 착실히 이행했다. 힘이 넘치는 돌진력을 구사하면서도, 그들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여국은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한 파괴력이야.”
퍼억!
신화병 하나의 목을 날려 버린 팽만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회랑단 쪽 일 빼고는 전군 출동이 처음인데도 진형이 완벽하오.”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아예 몸에 붙여 놓은 거지.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움직임과 침착함을 동시에 보여 주는 건 불가능해.”
“뭐가 됐든, 이제야 유군 부대다워 보이는군.”
“그러게나 말이야.”
퍼어엉!
무자비한 창술로 신화병 한 놈의 목을 꿰뚫어 버린 송연경이 외쳤다.
“아군 실력을 품평할 때가 아니에요! 달려요!”
“아, 물론이지.”
파바바박!
멸사군의 공격은 빠르고 날카로웠다. 탕마군의 공격은 육중하고 파괴력이 넘쳤다.
정면에서 치고 들어가는 탕마군과, 좌우에서 미친 듯이 퍼붓는 멸사군의 합공은 그야말로 손발이 척척 맞았다. 서로의 영역은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무척이나 효율적으로 적을 섬멸하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크윽!”
육호무장 고혁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그의 좌반신은 끔찍한 상처로 가득했다. 피딱지로 뒤덮인 몸통 일부는 뼈까지 드러나 있었다.
아무런 대비 없이 있다가 화약의 폭발에 당했기 때문이었다. 폭발력이 강한 화약이었음에도 육신이 그대로 터져 나가지 않은 게 다행이랄까. 하지만 끔찍한 고통과 뭉개져 버린 혈도 탓에 제 실력의 삼 할도 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구호무장 주창은 더 심했다. 그의 하반신은 완전히 부서져서 무공 구현 자체가 불가능했다.
고혁이 외쳤다.
“방진을 펼쳐라! 당황하지 마! 본부 안쪽의 기름통을 던져 화진(火陣)을 형성하라!”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신화병들을 지휘한 고혁이 주창에게 다가갔다.
“괜찮나?!”
“크으윽!”
주창이 이를 악물었다.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하지만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도 평생 병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힘을 내게! 신녀(神女)께서 어떻게든 고쳐 주실 것이야!”
그때였다.
“성녀도 있고 신녀도 있나? 그건 몰랐구만.”
자욱한 연기를 걷어 내며 모습을 드러낸 건 모용군이었다.
고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놈은 대체 누구……!”
퍼어어엉!
주청의 머리통이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야말로 끔찍하기 짝이 없는 죽음이었다. 발검(拔劍)과 동시에 뇌정섬(雷霆閃) 일격으로 주청을 죽인 모용군이 살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새외의 천한 것들이 감히 중원을 넘봐?”
“이, 이 개자식이!”
고혁이 괴성을 질렀다.
“죽이겠다!”
번쩍!
제 실력을 내지 못한다 한들 고혁 역시 모용군에 큰 모자람이 없는 고수였다. 우장(右掌)에서 뽑아내는 열화신장의 화력이 단숨에 모용군을 집어삼켰다.
콰르릉!
고혁의 힘은 놀라웠다.
그간 다른 무장들이 보여 주었던 열화신장보다도 훨씬 더 뜨거운 장력을 구사한다.
십호무장 안쪽의 고수들은 실력 차가 거의 없다. 다만 제각기 특기가 다를 뿐이었다.
고혁의 특기는 바로 화력 그 자체였다. 일호와 이호무장을 제외하면, 화기(火氣)의 운용력에 있어서는 최고의 무장이라 불리는 그였다.
또한, 그것이 그가 화약의 폭발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였다. 체내의 화정이 외부에서 들이닥친 폭발력을 절반 가까이 상쇄시켰기 때문이다.
‘죽었나?’
화염 폭풍과 연기로 뒤덮인 전면을 바라보는 고혁의 얼굴에 긴장이 드리워졌다.
‘열화신장을 정면으로 맞았다면 무사하진 못할 것이다.’
일순간 머리가 핑 돌 정도로 내력을 쏟아부었다. 적어도 극심한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머리통이 터진 주청의 시체를 내려다보던 고혁이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미안하네, 주청. 자네의 원통함은 훗날 반드시……!’
그때,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지이이이잉!
자연에선 들을 수 없는 기괴한 음.
말할 수 없는 섬뜩함에 고혁은 재빨리 몸을 돌려 방어 태세를 취했다.
퍼어어어억!
고혁의 얼굴이 멍해졌다.
어느새 벼락처럼 날아온 검기(劍氣)가 그의 오른팔을 통째로 날려 버린 것이다.
“상대의 상태도 확인치 아니하고 도주하는 작태라…… 정말이지 기가 차는군. 그따위 어설픈 마음가짐으로 이 중원을 손에 넣으려 했던 것인가.”
푸스스스.
연기가 걷히고, 모용군의 모습이 드러났다.
옷에 먼지가 묻고 머리카락이 산발했을 뿐, 모용군은 멀쩡했다. 전신에서 방출되는 뇌정지기가 열화신장의 화기를 완벽하게 차단한 것이다.
신화교의 열양공을 익히기 위해선 신체의 내열성을 극단적으로 높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모용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뇌정공은 상고(上古)의 절학으로, 어지간한 재능으로는 입문조차 할 수 없는 극상승의 무공이었다.
뇌기(雷氣)를 다루는 만큼, 내열성에 있어선 신화교의 고수에 뒤지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내열성에 한해서는 무장급 고수보다 뛰어날 수도 있었다.
“변방의 천한 버러지, 이 무공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
모용군의 검에서 시퍼런 뇌기가 폭발했다.
번쩍! 촤아아아악!
번개가 물살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터졌다.
동시에 고혁의 몸이 대여섯 조각으로 잘려 나갔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무시무시한 검공(劍功)이었다.
모용군이 익히고 있는 무적의 검법, 무정천뢰식(無情天雷式)의 낙뢰교격(落雷交擊)이었다. 번개의 움직임을 형상화한 그 검격은 인간의 반사 신경으로 반응조차 하기 힘들 만큼 빠르고 강했다.
고깃덩이가 된 고혁의 시신을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는 모용군.
그때였다.
콰아아아앙!
저 멀리 본부의 중심지 쪽에서 무지막지한 폭음이 터져 나왔다.
깜짝 놀란 모용군이 폭음이 난 곳을 바라보았다.
‘뭐지?’
단순한 폭음이 아니었다. 그 폭음에서 느껴지는 충격파의 밀도가 실로 엄청났다.
파아아악!
폭음의 근원지로 몸을 날린 모용군의 눈에, 비틀거리는 연호정과 분노로 가득한 한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모용군의 눈이 흔들렸다.
‘저놈은 또 뭔가.’
화르르르륵!
청년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화염은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금껏 싸웠던 신화병들, 그리고 무장들과는 전혀 다른 색의 화염이었다. 단순히 색만 다른 게 아니라 기질의 사나움 자체가 차원을 달리했다.
“아주 깜찍한 놈들이네.”
청년의 목소리는 몹시 낭랑하여 시끄러운 전장 곳곳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그래, 어쩐지 요 며칠 동안 공기가 묘하다 싶더니, 벌레 새끼들이 이곳을 노리고 있었군. 한데 어떻게 알고? 아! 여상도,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늙은이가 알려 줬나?”
무서운 청년이었다. 목소리에서 매서운 광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모용군이 차갑게 물었다.
“넌 뭐냐?”
“습격자가 할 말이 아닌데?”
청년이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뭐, 몰라도 상관없을 거야. 너희는 여기서 다 죽을 거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