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2화. 강자의 권한 (4)
일호무장 번작(飜雀).
신화교 십팔무장의 수장이자 명실공히 최강의 무장이며, 다른 무장과는 차원이 다른 무공의 소유자기에 무장들로부터 신장(神將)이라 불리고 있다.
실제 육십이 넘은 나이임에도 이룬 경지가 대단히 높아서 사십 대 중반으로밖에 보이질 않는다. 비록 무극의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했으나, 무종지벽을 돌파한 것만으론 절대 같은 경지를 거닐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강자가 그였다.
하물며 신화교의 선봉을 맡은 고수들이라는 십팔무장의 좌장이라면, 일국의 대장군(大將軍)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말하자면 번작은, 신화교가 어떤 전쟁에서도 자신 있게 내보일 수 있는 최고의 선봉장이란 것이다.
그런 번작의 눈에,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는 젊은 고수의 얼굴이 보였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 무표정한 얼굴임에도 무서운 분노와 소름 돋는 위압감을 전하는 중원의 강자가.
“귀찮군.”
떨어지는 도끼날을 향해, 번작이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연호정이 피를 토하며 뒤로 날아갔다.
벽산호장의 힘, 광룡부의 무게감, 백호공의 공격력을 일권에 날려 버렸다. 심지어 그러고도 아무런 충격을 받지 않은 듯 얼굴에 여유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묘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권력(拳力)이 상대에게 제대로 침투하지 않았다. 튕겨 나가면서도 활화산 같은 힘을 거의 다 흘려 냈다는 뜻이었다.
‘온 힘을 다해 내리쳤는데도 충격의 순간 권력을 분산했단 말이지?’
흥미로운 녀석이었다.
지닌 역량이 자신보다 한참 아래인데도 이런 술수를 부린다. 실전 경험을 넘어, 무공에 관한 감각 자체가 대단한 놈이었다.
그때였다.
“호정아!”
파아아악!
연위와 당관, 묵비가 연호정의 곁으로 뛰어왔다.
조금 전, 번작이 터트린 막강한 발경에 모두가 밀려났다. 그 즉시 번작이 먼 거리를 이동해 모용군을 쳐 냈고, 동시에 연호정이 번작을 쫓아와 일격을 먹이려 한 것이었다.
“괜찮으냐?”
“퉤! 괜찮습니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고 일어난 연호정이 번작을 노려보았다.
번작이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뛰어난 고수들이로군. 이만한 강자들이 한데 모여 있는 광경, 꽤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푸스스스스!
사방에서 솟구치던 불길이 어느새 제법 잠잠해졌다.
히히히히힝!
무수히 많은 말들의 울음소리.
신화병들을 모두 해치운 탕마멸사의 합군이 서서히 진형을 짜며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전투의 시작이었다. 이 싸움을 끝낼 자격이 있는 자들이 모두 모인 것이다.
신화교 측, 번작과 천강.
무림맹 측, 육가의 가주 셋과 유군 부대의 군장들, 그리고 오백오십이 넘는 고수들.
그들이 서로를 노려보며 전투 의지를 활활 불태웠다. 기나긴 싸움의 종장이 머지않은 순간이었다.
번작이 천강에게 말했다.
“일 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했구나.”
“죄, 죄송합니다.”
“쯧, 너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한 나의 오판이었다. 따로 죄를 묻지는 않으마.”
“……감사합니다.”
번작이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이 이만큼 뚫렸다…… 흥미롭군. 설마하니, 하남에 흩어진 무장들이 전부 당한 것인가?”
그때, 당관이 입을 열었다.
“그럼 놈들을 살려 두고 이곳에 이른 줄 알았더냐.”
번작이 당관을 돌아보았다.
서역인 특유의 푸른 눈이 무저갱처럼 깊어졌다.
“독기(毒氣)로군. 중원에 그만한 독기를 품은 자, 사천당가의 고수뿐이라고 알고 있는데.”
“잘 보았다. 내가 바로 사천당가의 주인 당관이다.”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당관은 내심 놀랐다.
도반삼양귀원공은 체내의 독기를 완벽하게 숨겨 준다. 요뢰 역시 독기를 발산하기 전까지는 그가 당가 측 인물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던가.
한데 번작은 그걸 단번에 꿰뚫어 보았다. 자존심은 상했지만, 그가 수준이 다른 고수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번작이 미소를 지었다.
두 눈은 서늘하기 그지없는데 입꼬리만 올라간다. 섬뜩한 미소였다.
“나쁘지 않군. 실로 나쁘지 않아. 면면을 보아하니 다들 무림맹에서 온 듯한데, 이미 우리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던 건가?”
연위가 입을 열었다.
“투항하시오.”
“음?”
“당신의 강함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소. 그러나 더는 빠져나갈 곳이 없소.”
번작이 피식 웃었다.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 줄 테고?”
“그렇소.”
“매혹적인 권고로군. 자네에게 그만한 권한이 있는가?”
“없소. 하나, 적어도 지금 당장은 그대들의 목숨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오.”
“당장 죽지 않아도 끌려가면 죽을 수 있다는 것이로군.”
“그렇소.”
“솔직하군.”
“거짓을 좋아하지 않소. 설령 거짓을 입에 담는다 한들, 당신이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소이다.”
가만히 연위를 보던 번작이 툭 던지듯 물었다.
“이름을 알고 싶군.”
“강동 벽산연가의 가주, 연위요.”
“판관검 연위! 과연 들리는 명성만큼이나 사람됨이 괜찮군. 적에게도 최소한의 예우는 한다…… 적임에도 불구하고 술잔을 나누고 싶은 대협이로고.”
“해서, 대답은?”
번작이 고개를 저었다.
“투항하지 않겠네.”
“유감이오.”
“나 역시 유감일세. 이 정도 병력으로 날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꽤나 얕보이고 있었군.”
무시무시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당관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어디 한번 시험해 보겠나?”
“시험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 애초에 우릴 잡겠다고 모여들었는데, 당연히 칼질은 오고 가야지 않겠나?”
“오만한 놈!”
그때였다.
번쩍! 콰앙!
한 줄기 벼락같은 검기가 번작을 후려쳤다.
푸스스스스.
희뿌연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모두가 벼락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느닷없이 검기를 뿌린 것은 바로 모용군이었다.
모용군이 차갑게 말했다.
“쓸데없이 주절거리지 말고 어서 잡읍시다.”
파아아악!
연기를 향해 뛰어든 연호정이 짧게 말했다.
“동감.”
부우우우웅!
광룡부에 불꽃 같은 살기가 가득 맺혔다. 홍염육살공이 시전된 것이다.
콰콰쾅!
폭음과 함께 연호정의 상체가 뒤로 홱 젖혀졌다.
“쯧쯧.”
후우웅.
연기를 걷어 내고 나타난 번작, 모용군의 검기를 맞고 연호정의 공격까지 받아 냈음에도 아무런 피해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 정도 병력을 모아 두고도 기습이라니, 도리를 모르는 놈들이로다.”
그때, 묵비가 시위를 놓았다.
피유우우웅! 타악!
번개처럼 날아간 화살이 번작의 손에 잡혔다. 놀라운 반사 신경이었다. 피할 것도 없다는 듯 가볍게 잡아채는 그 손놀림에 엄청난 여유가 묻어 나왔다.
당관이 외쳤다.
“죽여!”
파파파파팡!
쏟아지는 연환오장(連環五掌), 당가천독수가 대기를 뒤흔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뛰어든 연위가 철검대연의 검법을 구사했고, 재차 쏘아진 묵비의 화살이 귀신처럼 두 사람을 피해 내며 번작의 머리와 가슴을 노렸다.
번작의 눈이 깊어졌다.
제아무리 신장이라 불리는 그라도 만만하게 받아 낼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화르르르륵!
보이지 않는 불길이 그의 양손에 모여들며 거대한 용두도(龍頭刀)를 형성했다.
신화교의 절기 화룡마도(火龍魔刀)였다. 하지만 다른 무장들이 구사하는 화룡마도와는 차원이 달랐다.
훨씬 더 격렬했고, 훨씬 더 강력한 화기를 발산했다. 그 화기만으로도 쏟아지는 공격의 절반이 위력을 잃을 정도였다.
번작이 쌍수를 휘둘렀다.
콰콰쾅! 쩌정!
번작의 화룡마도는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날카로운 절삭력은 물론, 화도(火刀)의 경파만으로 고수들의 공격을 흐트러트렸다. 무서운 힘, 뛰어난 내공 운용이었다.
콰르르릉!
놀라운 것은 또 있었다.
번작의 무공은 강하기도 했지만, 그 속도 면에서 천강과 차이가 없었다.
번쩍!
당관의 눈이 부릅 뜨였다. 어느새 번작의 기세가 자신의 측후방에서 느껴졌던 것이다.
“계속 부딪치면 자네의 독은 버티기가 힘들 것 같군. 자네부터 가시게.”
콰앙!
당관이 피를 토하며 옆으로 날아갔다.
번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군.’
당가천독수를 순간적으로 금강오독장(金剛五毒掌)으로 바꾸었다. 독기로는 대성한 천독수를 따라갈 수 없지만, 무공 자체의 강성과 탄력은 오독장이 몇 수 위였던 것이다.
본능에 따라 무공의 종류를 바꾸며 대응하는 고수.
‘이놈만이 아니야.’
번작이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번쩍!
화살처럼 날아온 검경이 그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연위였다. 언제 이곳까지 당도했는지, 냉정한 기세로 휘두르는 검법이 철벽과도 같았다.
번작이 재차 화룡마도를 휘둘렀다.
쩌저저저저정!
도검(刀劍)이 십여 회 부딪치며 엄청난 불꽃을 일으켰다.
연위가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완벽에 가까운 무도(武道)를 구현하는 그였지만, 힘에서는 번작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번작은 깜짝 놀랐다.
주르륵.
그의 어깨에 한 줄기 검상이 새겨졌다. 연위의 철검대연이 만들어 낸 상처였다.
‘그걸 뚫었어?’
화룡마도와 금제순화공의 이중 방벽을 뚫고 들어와 상처를 냈다. 비록 피육만 벤 검격이었지만, 중요한 건 이만한 내공 방패를 뚫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파바박!
연위가 그답지 않게 탄력적인 보법으로 번작의 측면을 잡았다.
콰르르릉!
번작의 손에서 천둥 치는 소리가 울렸다.
화룡마도가 아니었다. 열화신장이었다.
한데 열화신장의 힘을 모은 것만으로도 엄청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상대로 하여금 일격의 위력이 화탄에 준하리라는 걸 예측게 하는 굉음이었다.
‘어디, 이것도 받을 수 있나 보겠다.’
번작이 열화신장을 휘둘렀다.
후우욱!
무시무시한 화염이었다.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황금빛 불기둥이 쏟아져 나온다.
이 정도면 다른 무장들이 구사하던 열화신장은 어린애 장난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겠다. 불꽃이 뿜어져 나오는 그 순간 오 장 밖에 떨어져 있던 목재들에 불이 붙을 정도였다.
파악!
주변에 있던 고수들은 저도 모르게 십여 장 밖으로 물러났다. 초고온의 화력을 버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연위는?
퍼퍼퍼퍼퍼퍼펑!
화포의 포격과도 같은 장력이 연위가 그려 낸 검막(劍幕)에 부딪히며 연신 폭음을 냈다.
퍼퍼퍼펑! 화르르르륵!
연이은 폭음과 함께 서서히 줄어들던 장력이 어느 순간 하늘 높이 솟구쳤다.
‘……!’
번작의 얼굴이 굳어졌다.
“후우.”
그의 앞에는 자세를 낮추고 검을 세운 연위가 있었다. 옷 여기저기가 불에 탔지만, 표정은 여전히 냉정하기만 했다.
“그걸 막았다고?”
단순히 막은 게 아니었다. 막고 튕겨 내길 반복하다가, 장력의 힘이 어느 정도 깎이자 그대로 끌어내 하늘 높이 날려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신기(神技)의 검술이었다. 당관은 물론 모용군마저 그 완벽한 파훼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역시 강하구려. 하지만 어떻게든 받아 낼 수는 있겠어.”
자세를 푼 연위가 다시 기수식을 취했다.
그답지 않게 공격적인 자세였다. 일검에 목을 취하겠다는 듯, 이전보다 한층 날카로운 예기가 전신을 가득 휘감고 있었다.
벽산연가의 가주, 판관검 연위.
당금 강호의 검사 중 가장 완벽한 검법을 구사하는 자.
내공의 강약을 떠나, 검에 관한 깨달음이 지고의 경지에 올라서 있다. 단순한 초식만으로도 더 강한 힘을 파훼하는 압도적인 능력은 바로 그 깨달음에서 온 것이다.
번작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
‘연가주가 이렇게 강했다고? 강호에 명성을 날린 지 오십 년밖에 안 됐다는 검가의 수장 주제에?’
그때였다.
퍼어어억!
섬뜩한 파육음과 함께 천강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번작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헉! 아, 그놈 자식 더럽게 잽싸네.”
번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피투성이가 된 연호정이 천강의 멱살을 잡아 올리고 있었다. 천강은 도끼에 제대로 맞았는지, 상체에 거대한 자상이 나 있었다.
연호정이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번작을 노려보았다.
“이제 진짜 너 하나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