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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무제-366화 (366/963)

366화. 나아갈 길 (1)

연호정이 정신을 차린 것은 치료를 받은 지 닷새째 되던 날이었다.

“끄으응.”

“정신이 좀 들어요?”

머리를 짚고 일어난 연호정이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여기는?”

“제 방이에요.”

기우희의 말에 연호정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 안은 온갖 약재들과 각종 문서로 가득 차 있었다.

집무실도 아닌 방이 이 정도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잠을 자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얼마나 지났지?”

“꼬박 닷새가 지났어요.”

연호정이 한숨을 쉬었다.

“민폐를 끼쳤군.”

“그런 말씀 마세요. 의원이 환자를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에요.”

“그냥 내 방에 던져두지 그랬어? 잠도 제대로 못 잤을 것 같은데.”

기우희가 미소를 지었다.

“환자의 상세는 자세히 꿰고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느닷없이 쓰러진 환자에게 어떤 일이 발생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지요. 차라리 제 거처에 두고 상태를 확인하는 게 훨씬 나아요.”

“고마워.”

“별말씀을요.”

연호정이 배를 문질렀다.

“닷새나 지났는데도 몸이 가볍구만? 배는 좀 고파도 말이야.”

“물부터 드세요. 조금 전에 끓여 놓은 물이라 미지근해서 몸에 부담이 없을 겁니다.”

기우희가 건넨 사발에 든 물을 벌컥벌컥 마신 연호정이 숨을 푹 내쉬었다. 확실히 물이 들어오니까 한결 살 만해진 느낌이었다.

기우희가 말했다.

“그간 피로가 많이 쌓여 있었어요. 아마 그마저도 잘 모르고 계셨겠지요?”

“몰랐지.”

“연 군장님답네요.”

“나도 아직 단련이 덜 됐군. 그거 조금 피곤하다고 기절까지 했다니, 쪽팔려 죽겠네.”

기우희가 한숨을 쉬었다.

“피로를 우습게 보지 마세요. 피로는 만병의 근원이에요. 관리를 소홀히 하다가는 훗날 큰 병이 도질 수 있지요. 그건 범부와 무림인을 가리지 않아요.”

“충고, 새겨듣지.”

연호정은 자신의 내부를 관조했다.

“흠, 닷새라고 했나? 내상 회복이 생각보다 훨씬 빠른데?”

“그러니 연 군장님이 강골이라는 거예요. 군장님이 연성한 여러 진기로도 이만한 회복 속도는 사실상 불가능하죠. 극한의 단련으로 생기(生氣) 그 자체의 밀도가 높아졌기 때문에 이렇게나 빠른 회복이 가능했던 거예요.”

“물론 옆에서 봐준 의원의 덕도 무시할 수 없겠지?”

기우희는 그저 웃어만 보였다.

연호정 역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로 신경 써야 할 건 없나?”

“마음 같아선 탕약이라도 지어 드리고 싶지만, 연 군장님 성격에 시간 맞춰서 드시지도 않을 거잖아요.”

“잘 봤구만. 물론 진짜 죽을 것 같으면 먹기야 하겠지.”

“제힘으로 털고 일어났으니, 몸 관리만 잘하면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을 거예요. 앞으로는 바빠도 피로 관리에 힘써 주시길 바랄 뿐이에요.”

“알겠어.”

연호정이 기우희의 어깨를 두들겨 주곤 방문으로 향했다.

가만히 그의 등을 주시하던 기우희가 툭 던지듯 물었다.

“신화교죠?”

연호정은 잠시 멈칫했다.

“맞아.”

기우희의 눈이 흔들렸다.

“제게 따로 물어볼 것은 없나요?”

“다 말해 줬잖아? 놈들에 대해서는.”

“물론 그렇지만…….”

연호정이 기우희를 힐끔 바라보았다.

“기 의원.”

“……네.”

“당신은 당신 나름대로 대의를 생각해서 신화교와 연을 끊고 무림맹에 들어왔어. 이런저런 복잡한 사건이 많았지만, 결국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겠다고 분명한 선택을 내렸지. 내 말 맞지?”

“맞아요.”

“앞선 몇 번의 만남에서 좀 거칠게 대하긴 했지만, 적어도 내가 보는 당신은 거짓말에 재주가 없어. 그리고 당신이 무림맹에 안착한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아마 나 때문이겠지.”

사실이었다. 비록 성정이 다소 거칠었지만, 기우희는 연호정의 두 눈에서 순수함을 보았다.

자신에게 거칠게 대한 것도, 신화교의 고수를 잔혹하게 죽인 것도, 모용가주를 견제하는 것도 전부 평화를 위해서다. 적어도 연호정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고, 기우희 역시 그것을 알았다.

말하자면 연호정은 기우희의 판단에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었다.

“본인이 선택했으니 책임도 스스로 져야지. 다만, 기 의원은 나를 믿고 있잖아. 그렇다면 나 역시 기 의원을 믿는다.”

“……네.”

연호정이 미소를 지었다.

“간다. 내일 점심이나 한 끼 하자고. 나 때문에 고생했을 텐데 맛난 놈으로 사 줄게.”

* * *

기우희의 거처에서 나온 연호정이 향한 곳은 뜻밖에도 무림맹 숲속의 공터였다.

과거 많은 사람과 비무를 했던 장소. 아는 사람만 아는 이 장소는 오늘도 역시 조용하기만 했다.

연호정은 공터 중앙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무려 닷새 만에 깨어났으니 배도 고프고 몸도 찌뿌둥했다. 이럴 때는 그간 섭취하지 못한 영양을 양껏 받아들이고 한숨 자는 게 최고지만, 그건 잠시 뒤로 미뤄 두기로 했다.

‘후우.’

가볍게 심호흡을 한 그가 연가신단에 정신을 집중했다.

우웅. 우우웅.

엄청난 밀도로 단단하게 고정된 연가신단이 주인의 부름에 은은한 떨림을 발했다.

‘작아졌군.’

일전의 전투에서 쏟아 낸 진기가 아직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동시에 내상을 치료하기 위해 끊임없이 온몸으로 기를 돌리는 중이니, 못해도 열흘은 운기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았다.

연호정이 벽라진결을 운용했다.

후우우웅!

짙은 청색의 진기가 솟구치며 심신을 안정케 했다.

벽라진결은 언제나 그러했다. 몸과 진기를 안정적으로 유지시켜 주고, 신과 기가 안정되니 마음 역시 편안해진다.

운기의 시작으로 벽라진결만 한 무공이 없었다. 나아가 벽라진결은 연가신단 안에 스며든 무공, 벽라의 기를 운용하니 연가신단의 움직임도 활성화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심(心), 기(氣), 체(體)의 안정에 몰두하던 연호정이 용포신공을 운용했다.

화아아악!

변화가 확실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깨끗해질 것 같은 푸르른 진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거칠게 일렁이는 녹색의 진기가 솟구쳤다.

청룡기(靑龍氣)의 녹청빛과는 확연히 다른 진한 녹광(綠光)이 연호정의 전신을 감쌌다. 워낙에 진한 녹빛이었지만, 또 어떻게 보면 숲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성질은 달라도 근본은 같다. 벽라진결이나 용포신공이나, 대자연의 기를 극도로 순수하게 가공하여 쓴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는 것이다.

‘다행이야. 두 신공의 기는 흐트러지지 않았어.’

쓰러지기 전, 그는 번작과의 전투를 끊임없이 상기했다.

기실, 연호정 정도가 되면 그럴 필요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벽산호장 연호정이 아니라 흑암제 연호정에게 있어서, 번작의 무공은 독특할지언정 크게 배울 만한 구석은 없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연호정은 번작의 무공 하나하나를 곱씹었다. 기절한 와중에도, 꿈을 꾸면서까지 그의 무공을 들여다보았다.

이유는 하나.

‘나는 놈의 무공을 피한 걸 넘어 반격까지 가했어.’

사신무(四神武)는 천하의 절공이다.

각기 공격, 방어, 회피 및 반격, 철저한 살인에 특화된 무공들로, 형(形)은 잡혔으되 워낙 자유로워 어떤 방식으로든 응용이 가능하다.

병장기술은 물론 권각술로도 잘만 써먹을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신무의 난이도를 수직 상승시키는 이유이기도 했다.

투로(套路)는 확실하되 상황에 따라 언제든 변형시킬 수 있는 무공.

달리 말하자면, 다른 무공의 십 성(十成) 경지까지 몸에 붙이는 게 선결 과제란 것이다. 다른 무공은 초식을 익히는 것부터가 시작이지만, 사신무는 형(形)을 완성(完成)시키는 것부터가 시작이라 할 수 있다.

그 완성시킨 형을 창의성으로 상황에 맞게 풀어 낸다.

천하의 어떤 천재도 경험 없이는 사신무의 힘을 극한까지 끌어낼 수 없는 이유였다. 여러 상황을 겪을수록 창의성은 증가하고, 사신무의 활용도는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사신무를 전장의 무공이라 말하는 이유였다. 무조건 피와 죽음을 경험해야만 진기와 초식의 활용을 연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호정은 사신무의 달인이었다.

사신기를 전부 소환하고 투로를 완벽하게 체득한 후, 흑도 무림에 뛰어들어 헤아릴 수 없는 싸움을 겪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싸움이 그를 폭발적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번작과의 싸움에서, 뜻밖에도 연호정은 사신무의 덕을 크게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는 번작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 내는 걸 넘어 반격까지 감행할 수 있었다.

어떻게?

“약점을 본다라…….”

연호정은 옥청의 말을 떠올렸다.

‘재능입니다. 본능적으로 약점을 꿰뚫어 보시잖습니까?’

‘군장님의 무공이 두 분에 비해 아직 모자람이 있음을 압니다. 그런데도 진법의 약점을 공략해 진세를 차근차근 무너트리셨어요.’

약점을 간파하는 눈.

사실 그것은 재능이라고 할 만한 게 아니었다. 연호정은 형(形)에 있어서 무림사 최고로 손꼽히는 사신무를 연성했고, 그 사신무로 수십 년간 전장을 누볐다.

달인 소리를 들을 만큼 실전을 겪다 보면,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의 약점을 파고들 수 있다. 약점이 없다면 만들어서라도 집요하게 파고들어 상대를 무너트릴 수 있는 것이다.

즉, 적의 약점을 파악해 내는 것은 선천적인 재능의 영역이 아니라 후천적인 노력, 경험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연호정은 그렇게 생각했고, 그리 확신했다.

하지만 번작과 싸울 때는 어떠했는가?

‘그저 번작의 무공을 보고, 놈의 약점을 간파하여 반격했을 뿐이었다. 사신무는 한 초식도 쓰지 않았는데.’

약자에게는 그럴 수 있다. 상대적으로 강자의 눈에는 약자의 약점이 수도 없이 보일 테니까.

그러나 자신보다 강자에게는 그러기가 힘들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상대의 무공을 받아 내기도 힘든 상황에서 약점을 찾아낸다는 건 언어도단이다.

그리고 연호정은 그걸 해낸 것이다.

‘단순히 놈보다 깨달음이 높아서?’

아니다. 그건 절대 아니었다.

이성이 아니라 본능이었다. 연호정은 번작의 무공을 파훼하고 자신의 권법을 적중시킨 그 합이, 결코 깨달음 때문에 가능했던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거야, 원.”

연호정은 새삼스럽다는 듯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지평에게 조언할 위치가 아니었군. 내게 정말로 그런 재능이 있다면, 난 수십 년 동안 그것도 모르고 살아왔다는 거잖아.”

애초에 약점을 본다는 것 자체가 상대적이다. 그래서 그런 재능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 말도 안 되는 재능이 자신에게 있었던 거다.

멸사삼살진을 파훼했을 때처럼, 상대하기 벅찼던 번작의 무공을 모조리 피하고 반격했을 때처럼.

‘재능이 있다고? 내게도?’

연호정은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문득 스승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래, 네게는 무재(武才)가 부족하다. 세인들이 말하는 천재에 부합하는 재능은 없지. 하지만 그런 네가, 어지간한 재능으로는 십 년을 노력해도 몸에 붙이기 힘든 사신무를 오 년도 안 되어 완전히 몸에 붙여 버렸구나.’

‘……스승님께서 잘 이끌어 주신 덕분입니다.’

‘사신무는 홀로 배우는 것이다. 나는 그저 여러 길을 보여 줬을 뿐, 그 모든 길을 답습하고 체득한 것은 온전히 네 능력이다.’

‘…….’

‘쯧, 자신이 가진 칼이 천하 명검인 줄도 모르고 고기나 썰고 있는 자가 어찌 천하를 논하겠는가. 너도 갈 길이 멀다.’

‘예?’

‘되었다. 다만 내가 해 줄 말은 너 자신을 잘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정확하게 간파할 수 있다면, 적어도 길가에서 객사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설마하니 그때의 그 대화가, 바로 이것을 뜻함이었던가?

‘약점이라…….’

연호정의 눈이 깊어졌다.

“더 알아봐야겠어.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번작을 놓친 일은 사라져 버렸다. 아쉬워도 한번 지나간 일에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다.

그의 그러한 면은, 연지평보다는 강량과 많이 닮아 있었다. 물론 강량이 그에게 배운 것이겠지만.

어쩌면 그러한 면모는 아직 그가 백도보다 흑도에 더 가깝다는 증거일는지도 모른다.

“쩝, 지평을 볼 면목이 없구만. 앞으로는 적당히 나대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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